아주 오래된 질문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이다. 우리는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운 이 질문을 받을 때 가끔 묘하게 헷갈린다. 특히 먹을 때 큰 행복을 얻는 사람일 경우 가끔 거울에 보이는 그 자신을 보고 할 질문이 되기도 한다. 과연 나는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두고 어떤 이들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질문과 유사하다고 말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 두 개의 질문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예상보다 많은 생각을 가져오게 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면서 여기에 숨겨져 있는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놀랍도록 본질적인 면을 보도록 하자.
시간을 들여서 이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면, 이 질문의 답이 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단순한 질문이 삶에 관한 매우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질문이 우리가 삶의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보도록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하나는 바로 생존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좀 더 대비하여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전자는 삶의 양, 후자는 삶의 질로서 표현 가능하다.
우리 인간은 100년 정도를 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100년 정도를 살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이들이 그 중간에 100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각종 사고나 병으로 인해 세상을 뜬다. 그리고 이런 유한하고 짧은 생애로 인해 인간은 유기체로서 본능인 생존 기간의 연장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표현해서 이것은 생존 본능이면서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누구나 생존 기간이 최대한 길기 바란다. 그래서 이것은 시간에 대한 절대량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두 번째 먹기 위해 사는 것은 단순한 양의 문제가 아니다. 이젠 양은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그 질에 대해 따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랜 인류의 사회 발전으로 인해 생존에 대한 보장이 매우 안정적으로 변한 탓에 우리는 점차 양보다는 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이 질은 언제든지 봄에 내린 눈처럼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끔 우린 이런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다른 각도로 보는 변화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매번 반찬타령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산에 갔다가 길을 잃고 수 십일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구출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느 정도 시간 내에는 더 이상 반찬 타령을 안 할 것이다.
이 변화는 영구적일 수도 있고 일정 기간만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이 충족되면 보통 바로 질로 넘어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50~60대는 보통 양만을 경험하고 살아온 세대이다. 즉 그들은 전후 힘든 시대에 태어나 어려서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양에 집착하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지금도 집에 방문을 하면 거대한 산봉우리 밥을 담아서 주는 것을 손님 대접 잘하는 것으로 믿고 계신다. 또한 손님은 그 밥을 모두 맛있게 잘 먹어 줘야 주인에 대한 예의가 된다.
하지만 이 분들의 후세대, 즉 지금의 20~30대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적은 양이라도 맛있는 먹을 것을 바란다. 즉 이들은 많은 밥이 아닌 맛있는 밥을 먹길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초대 문화 역시도 그런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손님이 오면 많은 밥이 아닌 맛있는 밥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손님 역시도 그 밥을 맛있게 먹어 주어야 주인에 대한 예의가 된다.
이 현상은 이후로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물론 중간에 전쟁이 나거나 혹은 영화처럼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서 인류 문명이 어느 한 순간 무너지면 다시 양의 승부하는 세상으로 순식간에 바뀔 테지만. 만약 그런 시기가 온다면 누구도 더 이상 질을 따지지 않는다. 그땐 오직 생존이 가장 큰 목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양이 보장된 상황에서 사는 것이 매우 익숙해진 우리들은 이젠 아예 양을 향한 본능적 욕망을 질을 향한 욕구의 힘으로 눌러 내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것은 바로 행복에 대한 욕구를 말하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주객이 전도 되었지만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간다.
이것은 행복하지 못하다면 계속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 질문에 더해서 '이후로도 노력해서 행복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혹은 거의 불가능 하다면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과연 우리 개개인은 어떤 해답을 내놓으려고 할까?
이 질문은 마치 먹을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더 이상 좋아하는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가장 싫어하는 음식만을 죽는 그 순간까지 주게 되면 과연 그 사람이 그것을 먹고 생명 연장을 통한 양적 관점에서 살아 가게 될지 아니면 그 질적 관점을 고집하다가 굶어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봄으로써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만약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가장 첫 번째 이유가(아이, 사랑하는 사람, 평생을 받친 연구 등등) 사라질 때 그것을 견뎌내고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맛난 먹거리를 뺏긴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갈 것이다.
인간이 자살은 어떤 설명을 부여하더라도 결국 삶에서 주어진 시간의 양적 종료를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살을 하는 것은 우리 생존 본능을 철저하게 배신하는 것인데, 이 배신의 배경엔 질적 욕구가 숨겨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고 행복할 희망이 없으면 자살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즉 생존을 기반으로 한 행복 추구에서 행복에 희망이 없으니 않으니 생존을 버리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말해왔듯이 이것은 바로 질이 충족되지 못하여 양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50~60대 어른들은 요즘 같은 실업률이 높은 시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어디든 들어가서 일을 하라고 말을 하곤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도 하면서.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일을 했다고 과거를 추억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도 양적 관점에서 삶을 보는 행동이다.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박봉을 받는지 상관없이 일단 일을 한다는 양적인 관점에서만 삶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철저하게 질적 위주로 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단지 양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만 직장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그 힘든 일을 참고 해내려면 질적인 요소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돈과 미래 성, 직장 간판 등이 주요한 필수 요건으로 꼽히고 있다.
이런 현상 역시도 사회가 발전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두 세대간의 좀 큰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대한민국에서 양적 관점에 충실한 어른들은 어디든 재취업을 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절대로 질을 포기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백수로 지내고 만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매우 생각보다 큰 문제이다.
산다는 것은 원래는 생존을 의미 했었다. 그런데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사회에서 생존은 더 이상 그리 얻기 힘든 조건이 아니다. 우린 우리의 모든 포식자를 제압했고 각종 제도와 장치들과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정말로 쉽게 죽기도 힘든 세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안정화 된 사회에서는 이젠 질이 양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질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의 발전이나 방향을 보면 확실히 그런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 질에 대한 추구가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와 있다는 점이다. 30~40대 중간 계층은 부모 세대로부터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컸다. 이것은 서양의 발전된 사회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영역인데, 그들은 교육을 바로 개인의 행복을 찾는 과정으로 여기는 반면,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바로 질을 돈으로만 환산해 낼 수 있는 우리의 경험적 한계에서 오는 행동이 된다. 즉 우리는 이제 겨우 양을 질로 바꾼 지 몇 십 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이 질이란 것을 과연 어떻게 얻을 것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린 수 많은 혼란과 가치 충돌 속에서 결국 남은 모든 사람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가치인 '돈'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돈에 대한 추구는 또 다른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1990년도에 맞은 경제 위기 덕분인데 이때 우리 사회에서 생존에 대한 안정성 부분이 매우 크게 깨졌다. 그것은 바로 수 많은 실직자와 그 후로 나타난 비 정규직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이런 경제적 안정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후 우리 사회는 더욱 '돈'의 가치에 매몰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사회발달의 시기적으로 보면 30대 정도가 아이를 키울 때는 본격적으로 그 아이들의 행복에 대한 교육을 시킬 때도 되었건만 우리는 경제 위기라는 치명적인 양적 문제를 겪은 후 다들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상하고 묘하게 퇴보 된 후 결국 다시 질이라고 믿고 있지만 결국엔 먹고 사는 문제인 양에 대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린 단지 돈을 지불하여 맛난 음식을 먹고, 멋진 볼거리를 보며, 해외 여행을 다니는 삶을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믿고 살게 되는 것이다. 즉 결국 돈이 질을 높이는 최고의 요소가 된 것이다. 물론 돈이 질적인 영역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돈은 일단 양적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주요한 수단으로 동작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후로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아오지 않은 탓에 과연 그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할 지를 알기가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이렇게 방향을 잃은 우리나라의 21세기는 가치에 대한 쏠림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부분을 좀 잘 생각해보자. 정말로 우리가 후세대를 잘 키워내고 싶다면 무엇을 해줘야 할까? 성인이 된 우리는 현재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누구나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옳다.
비록 우리는 그것을 우리 부모 세대로부터 배우지 못했지만 그 동안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한 결과라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혹은 노력했던 과정을 알려주어서 그들이 또다시 우리처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후 맨땅에서 헤딩하지 않게 끔 경험이라는 지혜를 전달해 주어야 한다. 만약 아이를 키우는데 하나의 철학이 필요하다면 나는 이것을 말해주고 싶다. 어떻게 그 자신이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지 알게 해주는 것.
우리의 부모 세대는 우리에게 가득 담긴 밥을 통해 행복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것에서 밥을 조금 줄이고 맛난 반찬을 더했다. 그렇다면 우린 정말로 질적으로 나아진 것인가? 나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줄인 것은 단지 밥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양적 의미이지만 이 밥이 가진 진정한 가치와 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이 밥을 같이 먹어 주는 사람조차도 줄여 버렸다. 그래서 맛은 얻었지만 한끼 식사가 주는 본연의 행복을 잃어 버린 셈이다. 그래서 결국 우린 늘 엄마의 밥상을 그리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린 우리 다음 세대에 무엇을 감하고 더해줘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바로 한끼 식사가 가진 감사함에 대한 행복과 그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간의 따뜻함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우리 후세대에게 남과 싸우는 법과 남에게 이기는 법을 필사적으로 가르쳐서 더 비싼 돈을 들여서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법을 알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이젠 우리들보다 더 맛있는 식사를 먹을진 모르지만 더욱 썰렁해진 식사자리와 더욱 의미 없어진 한끼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돈의 지불 액수를 늘리는 길임은 확실하지만 그 만큼의 돈이 지불되었다고 해도 결국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인지는 의문이 있다.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 대답하기 곤란하긴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현재 먹기 위해 살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양을 배제하고 질을 추구함에 있어서 양의 가치를 부정하고 질의 방향을 잘못 잡아서 결국 양이 가진 가치와 질이 주는 의미를 동시에 놓치고 있는 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혼란스러움은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사회는 많은 자살자를 내면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질적 영역으로 가고 있다고 대 놓고 표시하고 있지만 반면, 그렇게 많은 중도 탈락자를 내고 있는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현재 양도 아니고 질도 아닌 매우 이상한 중간 상태에 서서 양을 질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 요즘에 들어서 우리가 치르는 각종 경조사는 모두 그 원래 의미를 잃고 그 당사자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자리로 변해 버렸다. 60년을 산 것을 기념하는 회갑이나 만 한 살까지 살아 남음을 기념하는 돌잔치들은 이미 거의 보장된 누구나 달성 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후 양적 의미가 퇴색되었으나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통해 자신의 질적 역량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비싼 곳에서 치르는 이런 행사들이 과연 실효적인 질적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시간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에 관한 현상도 역시나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소소한 물품으로 동네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주던 이 미래의 행복을 위한 절차는 이젠 양적으로 질적으로 급팽창하여 동원되는 사람들이나 혹은 치러야 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커졌지만 실제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질적 향상을 가져온 것일까 하는 데는 의문이 있다. 진정 화려한 결혼식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일까?
이런 변화들이 바로 질적인 면에서 이루어졌다고 믿어지지만 실제로는 양적 의미도 잃고 질적 의미의 실체 조차도 사라져버린 우리의 자화상을 말해주는 현실적 예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