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하지 않은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

아이루다 2014. 6. 15. 13:26

 

누군가 주변에 삶의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어 본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해외 이민일수도 있고 시골로 귀농이나 귀촌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일명 홈 스쿨링, 즉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교육은 아니지만 집에서 부모가 직접 시키는 교육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직종으로써의 전환에 대한 소식일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종류의 변화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면 부럽다든가 혹은 왜 그럴까 라는 자신만의 판단을 하기도 하고 기회가 된다면 그런 결정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기도 하고 걱정을 해준다면서 각종 문제점을 나열시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말리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 하나는 실제로 그것을 먼저 했다가 망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해보지 않았는데 각종 나쁜 결과를 들어 본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시키는데 많이 익숙해져 있어서 본인이 써 본 제품 중에 문제가 있었다고 느꼈던 것들은 보통 계속 그 제품에 대한 좋지 않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물론 제품이란 것이 늘 품질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기본적 속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해도 어쩔 수 없는 제품별 편차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떤 제품을 썼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좀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그러니 당연히 큰 결정에 있어서 자신의 경험적 판단은 그 중요도가 일반 제품 하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귀농을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온 사람이나 이민을 갔다가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거나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직접 경험한 이들의 주관적인 의견은 그렇다고 쳐도 실제로는 전혀 경험이 없이 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어 간접 경험을 한 사람들의 조언이라고 이름 지어진 일종의 참견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할까?

 

만약 누군가 자신의 아이를 정규 학교를 그만두고 대안학교나 혹은 집에서 가르치고 검정고시를 보는 방식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는 결정을 내려 주변에 아는 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정규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의 만족도나 혹은 문제점을 인식한 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인데 만약 그것이 어쩔 수 없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경쟁의 대열에 참가하여 치열하게 자녀를 키워 냈다면 반대할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줄 세우기 교육에 대한 문제점이나 과도한 경쟁적 교육 제도 환경 하에서 대안이 없어 그냥 자녀를 키운 사람이라면 그 결정에 박수를 보내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아예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응은 그들 자신의 입장이나 성격적 문제 혹은 다양한 형태의 환경적 요소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정말로 중요한 점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는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조언자일 뿐이고 그래서 영원한 구경꾼일 뿐이란 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결정은 완전히 그 자신의 삶에 대한 내용이 된다. 특히나 삶의 궤적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결정은 더욱 더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냥 판단하고 조언을 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좀 자세히 그리고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실제로 그들의 말은 조언이란 이름으로 치장된 비겁한 변명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해보지 않은 일이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실제로 그것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를 하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특히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거나 나름 성공해서 시스템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일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데 당연히 익숙해져 있고 편할수록 그 자리를 깨고 나가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서 다른 대안이 있다는 점을 무시하려 애쓴다. 그래서 보통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나 자신이 선택한 배우자, 가족에 대해 평생을 걸쳐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길 원한다. 이런 우리의 성향은 분명히 선택한 길에 대한 만족도는 높여주지만 반대로 다른 선택을 하고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가능성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린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할수록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행복이란 것이 분명히 개개인적 성향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환경에서 스스로 합리화 시킨 결과가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이 그런 길들여짐과 익숙해짐을 뛰어 나가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한다.

 

만약 그렇게 다른 세상을 향해 나간 이들의 어떤 종류의 행복을 얻어냈다는 소식을 보내 오면 도대체 그 자리에서 뭉개고 있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봄날 눈 녹듯 녹아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두려운 이들은 성공한 사례보다는 실패한 사례를 더욱 집중해서 읽고 기억하며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길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결과를 종합한 후 새로운 결정을 내리려 하는 이들을 붙잡고 조언을 가장한 채 그 길을 가지 말도록, 그래서 혹시나 성공하여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후회스럽게 만들 수 있는 불행 가능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설득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한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그런 성향이 강한데, 혼자 살거나 특별한 직업을 갖거나 자녀를 안낳고 살거나 하는 일반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닌 일에 대해서도 끝없는 간섭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단지 해보지 않은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의 이론과 근거를 끌어와 자기 의견의 옳음을 증명하여 애쓴다.

 

예술을 하면 굶기 십상이라든가 자녀를 낳지 않으면 노후에 쓸쓸해진다든가 혹은 좀 더 큰 개념에서 사회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후대를 남겨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공공의식 등이다. 그렇게 후대 사회에 대한 걱정을 한다면 자신이 아이를 한 20명쯤 낳아서 키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기본적으로 사람은 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 할 때나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될 땐 당연히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담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이 없어 잘 하지 못하는 일을 겁 없이 막 하다가는 얼마 되지도 않아서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질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본능적 방어 기제이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것을 이겨내야만 새로운 땅에 들어갈 수 있으며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현재에 머물렀다고 해서 그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너도 그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신뢰성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그 조언의 대상이 너무도 실패가 뻔한 길을 가려고 해서 그것을 말리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와 성공의 의미가 아닌 그냥 좀 다른 삶의 형태를 띈다고 해서 그리고 그 형태가 우리가 아는 흔한 삶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 침 튀기며 말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죽고 사는 일에 대한 선택이 아닌 바에야 삶의 형태는 그 삶을 선택한 본인에게 가장 행복한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해 불필요한 조언은 필요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그 결정에 대한 조언을 구한 것도 아닌 이미 오랜 시간 고민을 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면 왜 거기에 대해서 그리 오래 고민도 해보지 않고는 일단 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일까? 과연 그 사람에게 주는 조언을 그 당사자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일까? 자신이 겨우 들은 지 몇 분만에 떠올리는 생각을 수 년간 고민한 당사자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거란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거기에 더해서 조언이라고 해주는 것을 듣는 당사자는 그 조언을 해주는 사람 혼자에게만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기에 수 없이 반복되는 조언이 될 수 있음을 왜 인식하지 못할까.

 

얼마 전 우연히 미국의 대학생 중 98%는 정상적으로 졸업을 하는데 실제로 중간에 포기한 2%에 속한 사람이 빌 게이츠, 스티븐 잡스, 마크 저커버거(페북 창업자)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적인 길을 가고 그 중 아주 소수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데 그들 중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망가져서 완전히 잊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든 망하든 상관없이 모두 그 자신에 대한 온전한 결정이란 생각은 왜 안해주는 것일까?

 

높이 날고 싶은 조나단 리빙시턴 시걸의 꿈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미래와 꿈을 향해 살아갈 자유가 있고 그것은 어떤 종류에 상관없이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 실제로 존중할 정도의 인격이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그것을 조언을 빙자한 비겁한 자기 합리화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는 어차피 썩은 물고기나 훔쳐 먹어야 하는 갈매기일 뿐이라 말하며 조나단을 비웃던 다른 갈매기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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