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어떤 가치까지를 인정할 수 있을까?

아이루다 2014. 7. 15. 16:39

 
세상은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사람들은 또 그만큼의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 가치들은 때로는 비슷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반대편에 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양하고 많은 가치들은 오직 하나의 절대 가치를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 즉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의견과 성향 그리고 추구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다양한 가치라고 표현한 것에는 최종 목표인 행복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인정하는 다양함은 오직 그 수단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런 수단으로써의 다양한 가치라는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수단으로 삼은 가치에 대해 꽤나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편이다. 마치 그런 것들이 인간으로써 해야 할 당연한 것이라든가, 그건 것들을 추구하거나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산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까지 자신의 가치를 공고화 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들의 이면엔 당연히 자신이 느끼는 가치에 대한 믿음, 자부심, 객관적인 근거, 인간의 보편성, 자신만이 가진 경험에 의한 판단 등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믿는 가치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나 그 자신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가치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불유쾌함 역시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가치 사회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반대로 타인의 가치 역시도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가치들은 모두 그것을 추구하는 당사자의 행복이란 최종 가치를 가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군가 행복하기 위해 어떤 가치를 추구했다면 원리적으로는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가끔 자신이 관대함에 대해서 한계를 시험 받게 만든다. 그것은 도대체 타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어디까지를 용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인데, 혐오스러움을 유발하거나 도대체 도저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인정해주기 힘들만큼 특이한 가치들은 심각할 정도의 증오를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하거나 은밀한 부위를 사진으로 찍는 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이기를 즐기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타인의 고통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돈의 가치만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등등 우리가 흔히 신문이나 TV를 통해 듣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바로 그 예가 된다. 그나마 이런 가치 추구들은 보통 불법적인 것이 많아서 법적 처벌이라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 참 애매한 것들도 있다.
 
오늘 우연히 본 글 중 하나에 '강아지 유치원' 이란 내용의 글을 보았다. 한 달에 한 60만원 정도 한다고 하는데 어린 강아지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강아지 훈련원이라고 말을 했다면 사람들의 반발이 좀 덜 했을까? 아무튼 유치원이란 말에 대해서 강아지가 사람처럼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이런 세태를 한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을 주고 강아지의 어린 시기를 교육 시켜 주는 것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좀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한달 비용이 좀 비싸다는 점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이것이 나름 틈새 시장이고 고객이 그리 많지 않다면 또한 그 비용 역시도 나름 합리적일 수 있다. 적어도 그런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맞아서 그런 것일 테니까.
 
우리 인간은 이런 비슷한 것 상황으로 자주 타인의 가치에 대해 반발하거나 공감하는 일을 한다. 월세 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비싼 외제차를 사는 사람들이나 모은 돈을 모두 명품 가방을 사는데 소비하는 사람들 혹은 심한 경우엔 여자의 똥을 사는 변태 남까지도 이런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누구에게 명확한 손해를 입히는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의 똥을 돈 주고 산다는데 그것을 무슨 죄로 판별하겠는가? 한다면 유독성 폐기물 유통 법이어야 할까?
 
그래서 우린 자신의 한계점에서 이것을 시험 받게 된다. 그러고 그러기에 이런 것에 대한 의견은 정말로 다양하게 표출되게 되어 있다. 이해하는 사람들부터 심각한 수준의 비난을 하는 이들까지 모두 자신이 믿는 상식을 기반으로 하여 의견을 말한다.
 
아마도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아마도 타고난 성격적인 차이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정말로 자신이 즐기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타인의 어떤 형태의 가치 추구라고 해도 아마 그 자체로 인정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반대로 우리는 그렇게 하고픈 것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타인의 그런 식의 낭비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꽤나 심한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의 근거엔 다 같이 사는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을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 부분은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뭐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고 본다. 정말로 그 자신이 공동체를 위해 살아간다고 주장한다면 이미 그 말부터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존재하고 나머지가 부수적으로 있는 것이지 어떤 것을 위해서 그 자신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대상이 목숨과 같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다 가치는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돈에 대한 부분은 적어도 우리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가면서 더욱 이런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형태의 가치 추구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돈이 점점 많아지면서 그 돈을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점점 더 타인들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현상이다. 실제로 수억 원의 좋은 차를 사거나 수 십억의 고급 요트를 사거나 아예 개인용 비행기나 잠수함까지 구입하는 말 그대로 세계적인 부자들도 있는데 왜 우리는 강아지에게 월 60만원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최저 임금은 현재 한 시간에 5,580원이다. 하루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보면 44,640 원이며 한달 20일을 일했다고 치면 892,800원이다. 그리고 강아지 유치원은 한 달에 60만원이다.
 
아마도 이런 사회의 숨겨진 부분이 강아지 유치원에 대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평생 만나볼 일도 없는 미국의 어떤 부자가 산 잠수함 이야기는 그냥 그저 동화 속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강남에 산다는 어떤 아주머니가 강아지에게 쓴 60만원은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닫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보통 먹고 사는, 흔히 말하는 의식주에 대한 필수적 비용을 지출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선택적 소비라고 믿는다. 물론 이 필수적 지출 역시도 열심히 줄여보려고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한계가 있기에 일단은 필수적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필수적 지출을 제외한 선택적 지출만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지가 보인다. 왜냐하면 돈은 바로 가치와 바꿀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도 바로 돈의 이런 특징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택적 지출과 연관된 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다. 이런 돈과 시간이 투자된 것을 우리는 취미나 삶이라고 이름 짓기도 한다.
 
그리고 이 취미란 것은 가치추구의 방법이므로 사람마다 너무도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는 타인들에게 이로운 자원봉사나 야학, 농활 등의 활동도 있고 자신에게만 좋은 여행, 운동, 사진 찍기, 영화 감상과 같은 것들도 있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취미는 타인에게 이로운 것은 거의 없다. 보통은 자기 만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타인의 기쁨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것만을 통해서 자기 만족을 얻는 성격은 꽤나 드물다. 누가 양로원에 가서 노인을 씻기고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물론 존재하긴 하지만 흔하지는 않다.
 
이런 가치 추구의 특징으로 인해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 가치 추구를 하게 되어 있다. 단지 그것이 범죄에 가까운 행위만 아니라면 우리는 보통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난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말릴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없이 타인의 가치추구에 대해서 평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평가 뒤에는 반드시 그렇게 내린 평가에 대한 근거가 따라 붙는다. 그리고 거기엔 보통 자신 역시도 그리 자신 없는 도덕적 가치관과 사회 정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추구 등의 그럴법한 이유들이 따라 붙는다. 그래야 다른 이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이 글을 쓰는 내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 부분은 전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왜 자신에게 전혀 피해도 주지 않고 또한 자신의 돈을 그 자신이 행복한 곳에 쓰거나 또는 돈이 남아 돌아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소비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 많은 참견을 하고 평가를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면엔 그렇게 낭비된다고 느낀 돈들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에게 베풀어졌으면 하는 순수한 바램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나마 사회가 점점 미래로 가면서 좀 더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 타인의 가치 추구에 대해서 아주 조금씩 관대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국민적인 원성을 들을 법한 것들도 많이 다르게 대해지고 있다. 아마도 1960년대 강아지 유치원 기사가 나왔으면 그 사람은 범 국민적인 지탄을 받고 특별법으로 지정된 강아지 우대 죄로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못 느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은 정말로 갖기가 힘들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은 아마도 글을 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인정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 부분은 이런 다 가치에 대해서 무한정의 관대함을 갖는 것도 괜찮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솔직히 이것에 대한 답을 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결국 사회는 미래로 갈수록 점점 더 그것을 시험 받게 될 것이다. 과거에 없었던 염색을 하는 사람들과 문신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피어싱이나 현재로써는 엽기적으로 느껴지는 다양한 형태의 외모 변화가 늘면 늘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익숙해짐 아닌가 싶다. 요즘 누가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이들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하지만 그들은 20년 전이라면 미친 사람 취급 받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간 이 땅엔 젊은 여인들이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고 여자들은 여름이 되면 가슴이 훤히 들어나는 복장을 하고 돌아다닐 것이다. 또한 현재 우리가 엽기적이라고 느끼는 일본의 성문화가 우리나라에 정착해서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특이한 취미와 또 어떤 특이한 생각이 미래에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 왜 그것을 어색해 하고 비난하게 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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