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 만족도

아이루다 2014. 12. 19. 09:54

 
미드 하우스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한 편 소개된다. 그것은 바로 어떤 환자가 암에 걸려서 6개월 밖에 못한다고 알려줬는데, 나중에 조직검사를 정밀하게 해보니, 실제로 암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환자에게 알려주자, 환자는 매우 당황스러워하면서 의사를 원망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는 암 선고를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시간 중에서 가장 충만했으며, 또한 이젠 마지막 남은 재산인 집도 팔아서 마지막 여행을 가려고 준비했는데, 더 오래 살아야 한다니 돌아갈 집도 없다고 한탄한다.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이제 기껏해야 6개월만 살 수 있기에 자신을 다시 되돌아 보고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어차피 죽으면 의미 없어질 돈도 걱정 없이 쓰고, 마지막 남은 재산인 집도 팔아서 가고 싶었던 여행을 나서려 했었을 것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 역시도 이제 겨우 6개월만 더 살 수 있는 그 사람에게 좀 더 집중해주었을 것이고, 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었으며, 그가 하려고 하는 일에 거의 반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불행함에 처한 사람에 대해서 대하는 태도 중 하나인데, 죽음은 그 불행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변 사람들의 충실한 응대는 아마도 그 사람의 삶이 늙어감에 따라 시들어가고 쪼그라들어 가서 결국엔 사는 건지 살아지는 것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만큼 쇠락했을 때, 남은 삶의 시간에 제약이 생기면서 어떤 의미로 새로운 삶을 다시 부여 받은 것 같은 활력과 의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수십 년간 더 살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행복한지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내지 못할 때 이것의 답을 낼 수 있는 한가지 방법론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보통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일반적으로 소소한 행복을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먹는 밥이나 고정적으로 보는 TV 프로그램 등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당장은 매일 조금씩 행복하긴 한데, 자신의 삶이 정말로 행복한지에 대한 것은 솔직히 확신을 갖기가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혹은 이것이 정말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 그리고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삶은 없나? 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 좀 다른 형태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 온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불현듯 혹시나 자신이 뭔가를 빠뜨리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겁이 나기도 한다. 물론 주변 사람들을 보지 않고도 이런 생각은 충분히 들 수 있다. 육체가 노쇠해가는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현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태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물론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한 책을 읽고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현재 행복한가를 답을 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실제로 현재 자신이 사는 삶이 자신이 선택 가능한 가장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확신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때 이것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서 앞에서 설명한 에피소드를 적용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바로 오늘 당장 자신의 삶을 단 3개월이나 6개월만 살 수 있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것처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반드시 당장 먹고 사는 일은 제외하고 나머지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아마도 오늘 술 약속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주말에 어딘가 등산을 갈 계획이 잡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한 달 뒤에 유럽 여행을 갈 계획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3개월의 시간이 남았을 때,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추진하겠는가?
 
당장은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더 생각하고 더 생각해도 변함이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현재 당신은 지금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 맞다. 더 이상 다른 선택이 없다. 비록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로 인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아무튼 그 외의 삶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이때부터는 다시 생각을 해야 한다. 아무리 뜻이 있는 일을 하든지, 아무리 남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일을 하든지, 아무리 멋진 삶을 살든지, 아무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하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단지 3개월 남았고 그것을 할 때 충분한 삶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다면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남들에게 좋게 보여서 하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어느 시점에 자신의 머리 속에 잘못 박힌 선입견일 수 있다. 마치 수퍼맨이 되어서 영웅이 되어 남을 돕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 3개월 남은 수퍼맨이 되어 영웅이 되는 것과 평범하지만 오래 사는 사람들 중 어떤 삶을 선택하겠는가?
 
3개월 후에 죽는데도 불구하고 인터넷 서핑과 각종 게시판에서 즐거운 글을 읽은 것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그것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 맞다. 3개월 후에 죽는데도 오늘 등산을 가고 내일 해외 여행을 가겠다면 정말로 그것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적어도 하루 밤 꼬박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일인지 아니면 그런 것을 해야만 자신의 삶이 제대로 되었다라고 증명되는 것이라 간주하는 경향도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도 괜찮다. 3개월 후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서 인간의 문명 자체가 완전히 망가진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이런 경우 세계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완벽한 무질서한 사회가 연출되겠지만, 이런 현실적인 모습 말고, 말도 안되지만 사람들 모두 그냥 각자 자신의 나머지 3개월을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한다고 가정해보자.
 
모두 한꺼번에 죽고 아무도 남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가 쌓은 모든 문명적 기록도 사라지고 우주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아니, 지구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이 된다면 과연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
 
오늘 상대성 이론을 뛰어넘는 대단한 물리학 법칙을 발견하든,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든, 남들은 거의 가보지 못한 곳을 정복하든, 전 세계 여행을 모두 다하든, 역사에 남을 만한 멋진 책을 한 권 쓰든지 간에 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할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떤 사람은 3개월간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먹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지구 상의 거의 모든 곳을 방문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원 없이 죽여보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 남은 3개월을 권력자의 모습으로 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정말로 자신이 원해서 선택을 했고, 죽는 순간에 후회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진정한 행복인 것이 맞다.
 
그것은 종류에는 상관도 제한도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갑자기 이혼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갑자기 동성 친구에게 평생 동안 사랑했다고 고백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평생 가졌던 종교를 버리고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의 종교에 더욱 더 빠지는 이들이 대다수이겠지만 말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재충전 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한 후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얻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우리는 죽음 후의 삶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고요함과 너그러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진실함과 욕심을 버린 모습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지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다면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우린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진실해진다.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죽는 사람처럼 산다고 말한다. 그래야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도덕적 범주와 혹은 모든 문화가 가진 편견을 뛰어 넘는다. 그 제약을 없애지 못하면 상상하면 결국 다시 그물에 걸리고 만다.
 
우리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우리도 모르게 수많은 사회적 역할에 대한 주문과 책임을 할당 받는다. 그것은 성적으로도 동성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 경제 생활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것,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것, 각종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 등등이 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아무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해도 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남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 목표와 공동체의 삶이 그다지 심한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에 대해 찾아야 한다. 도대체 3개월이 남은 시점에 오늘도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남의 페북에 들어가서 좋아요를 누르고,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 댓글을 달고, 즐거움을 위해 사람들과 만나고, 남들이 좋다는 곳을 여행하고, 비싸고 좋은 가방을 사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최신 전자 기기를 사며, 멋진 시계를 사거나 비싼 차를 살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니면 집에서 만화책을 읽고 뒹굴 거리거나, TV 뉴스, 드라마를 보든지 아니면 외국 드라마를 찾아서 볼지도 고민해야 한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마음껏 읽을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엔 하루를 보내고 난 후 이렇게 하루를 그냥 살았으면 된 것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내일 도살장으로 끌려 갈 돼지가 오늘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은 저런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어떤 것도 공통된 정답은 없다. 모든 답은 각자에게 답이다. 그 와중에도 다른 이의 답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넘쳐나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이때도 사지선다형으로 문제를 내주어야 할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남은 3개월을 오직 자신만의 답을 낼 자신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우린 살면서 그 중요한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해서 도대체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질 않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치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비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별똥 별이 떨어지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자신의 소원을 빌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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