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의 의미성

아이루다 2014. 12. 24. 08:39

 
'삶의 의미' 란 말은 참 익숙한 문장이다. 실제로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상관없이, 아니 좀 더 냉정히 말하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에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이 표현을 제법 접해보았을 것이다.
 
삶의 의미란 말을 해석하면, 우리 개개인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며 목적성을 말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혹은 다른 말로 삶의 가치라고도 할 수 있고, 존재의 이유라는 말로도 대체가 가능하다.
 
우리는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을 '철학' 이라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 왜 철학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드는 생각은 아무래도 삶의 이유 같은 것을 찾는 것이 별로 현실적이지 않아서 그렇게 된 듯 하다. 그래서 결국 특정한 사람들만이 삶의 이유에 대해 생각한 후 그것을 책으로 써 내고, 평소 삶의 이유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그들의 책을 통해 그 답을 찾기 때문에 그런 듯 보인다.
 
인간은 살면서 어떤 일을 할 때, 보통은 합당한 이유와 목적성을 갖는다. 아주 단순하게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을 때도 어느 회사 제품을 먹을지, 몇 개를 먹을지, 라면을 실제로 끓일 때는 라면을 먼저 넣을 것인가 아니면 수프를 먼저 넣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 결정엔 자신만의 이유와 목적이 깔려있다.
 
그런데 자신이 사는 삶에 대해서는 그렇게 명확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들 대부분은 삶을 전체로 관통하는 이유나 목적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나마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그것의 절대적 진실 여부가 완전히 증명된 대상이 아니다. 즉, 종교는 삶의 의미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한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물론 그 당사자는 그렇게 믿을 수 있겠지만, 객관적 입장에서 보면 그 믿음을 인정은 하되, 공감하긴 힘들다.
 
또한 종교는 답을 스스로 낸 것이 아닌, 신이든 인간이든 어떤 존재가 이미 정해 놓은 답을 자신의 정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종의 베껴 쓰기를 했다는 뜻이다. 물론 정답을 베껴 쓰기 했다면 그 답도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베껴 쓴 것이 정답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놀랍게도 우리는 그리도 중요한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생각보다 무신경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것에 그리도 무심할까?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반대로 이것에 그리도 집착하면서 평생을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죽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삶이 가진 두 가지 단면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삶의 첫 번째 단면은 바로 우리가 흔히 사는 모습이다. 그것은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은 최고의 이유이며 목표이다. 그래서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데이트를 하고,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 행복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모두 포함된다. 즉, 우리를 좀 더 낫게 해주는 모든 것이 이 행복이란 것의 목표이며 증상이다. 우리는 행복할 때 가장 기분이 좋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러면 포만감으로 인해서 행복해진다. 이것이 아주 전형적인 행복함을 얻는 과정이다.
 
하지만 행복은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가 되기인 부족하다. 왜냐하면 행복 자체가 바로 죽음과 멀어지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가 고프면 죽음이 가까워진 것이다. 우리가 쓸쓸해지면 죽음에 한발자국 더 다가간 것이다. 외로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외로우면 죽는다. 우리가 얻는 모든 행복의 근원은 바로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흔히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현대인의 많은 질병을 부르는 무서운 증상이다. 그런데 우린 왜 스트레스를 받을까?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바로 죽음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가장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바로 죽음을 코 앞에 두었을 때이다.
 
직장에서 잘릴까 봐 받는 스트레스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생존에 대한 문제점이 발생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몸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심각한 스트레스에 노출 된 사람은 자살을 하거나 이것을 이겨내도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린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망 원인 상위권에 자살과 암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죽는다. 인간은 현재까지의 기술의 범위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죽음이다. 그런데 삶의 첫 번째 단면으로만 보면 그 과정은 죽음을 얻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즉, 행복을 얻는 과정은 우리의 결론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뭔가 서로 맞지 않는다. 결론을 내지 않으려고 과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자연스럽게 두 번째 단면을 생각하게 된다.
 
삶의 두 번째 단면은 바로 죽음이다. 혹은 불행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래서 행복하지 않거나 불행할 때 이 두 번째 단면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철학자가 될 수 없다. 삶의 아픈 단면을 보지 못한 사람은 생각을 시작할 수 없다.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이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순수하게 행복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서 결국 자신이 보기 싫어도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 번쯤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의 결론이 죽음이라면, 죽음을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죽음은 불행하고 불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멈춘다. 더 이상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아주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만 이 두 번째 단면을 제대로 경험한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첫 번째 단면인 행복만을 보고 살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삶이란 과정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가끔은 불행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욕망을 잘 제어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삶의 의미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즉, 이것은 그냥 사는 것이다. 어제도 존재했고, 오늘도 존재하니까, 내일도 존재하는 관성의 삶이다. 그래서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반대로 삶의 두 번째 단면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성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그리도 좋아하는 행복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것은 진실을 보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것도 역시 욕망이기에 이루어지면 나름대로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어떤 계기로 인해서 죽음을 아주 가까이 체험한 사람들도 있다. 수 많은 죽음이 존재했던 어떤 수용소의 고통스러운 삶을 경험했거나 큰 사고를 통해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이나 기타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직접적으로 죽음 근처를 배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엔 실제로 죽음을 잠시간 경험한 사람들도 존재 한다.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기회가 있던 이들에게는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우선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삶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데,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뻔한 사람이 그것의 진정한 소중함에 대해 재인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가까이 경험한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치를 부여한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그래도 누군가 주입한 의미도 아니고, 그냥 하루를 존재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삶의 전체 과정을 관통하는 그 자신만의 유일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그 나름대로라도 제대로 찾지 못한 이유는 바로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접적으로든 매우 가까이 바라보든 상관없이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기에 그렇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대해 평생을 관념적으로만 바라보고 최대한 피하려고만 하다가 삶을 마감한다.
 
각 상태 별 사람의 행복도에 대한 순위를 내본다면, 첫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바로 어떤 계기로 인해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삶의 첫 번째 단면인 행복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삶의 두 번째 단면을 보고는 결국 자신만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철학자들이 그리 염세적인 생각을 하고 살다가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특히 서양의 철학자들은 특히나 더 그랬다.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이것을 보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해야 할 이유와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이미 관념적 사고 방식일 수 있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나 목적성을 반드시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냥 존재하니까 살고, 죽는 존재니까 죽으면 된다.
 
이것을 단순히 보면 마치 삶의 첫 번째 단면인 행복만을 보고 사는 사람과 비슷한데, 실제로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바로 보는 태도이다. 사니까 사는 것까지는 동일한데, 죽으니까 죽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삶의 두 번째를 단면을 경험하지 못하면, 사니까 사는 것은 거짓이 되고 만다.
 
사니까 살려면 죽으니까 죽어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사니까 사는 것이 아닌, 죽기 싫어서, 죽지 않으려고 사는 것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세상에는 어떤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은 운 좋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책이나 강의로 전달하려고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로 그들이 느끼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제대로 된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간접 경험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도 이것은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에 대한 설명과 사진을 아무리 많이 들여다 봐도 그곳에 직접 가서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면 파리는 그저 관념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단지 이들의 이야기는 도움은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다. 이정표는 목적지가 아니다. 목표도 될 수 없다. 이정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도 이런 이정표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빈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그것이 주는 고독감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린 이미 같은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선험적 이야기와 그것을 제대로 풀어냈든 아니면 결국 오답을 낸 수많은 풀이 과정을 공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은 해 낼 수 있다.
 
또는 그 정답을 제대로 찾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실제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모든 정답의 후보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것만 해도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보가 쉽게 공유되는 시대에 태어난 행운이다. 아마도 이것이 백 년 전만 해도 이런 행운은 없었을 것이다. 인쇄술과 통신 기술의 발달이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찾을 수 있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의미는 그 자신에게만 옳다.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의미를 타인에게도 인정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믿는다면 다른 이들의 믿음을 딱히 원할 필요가 없다.
 
다른 이들의 믿음을 원하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다수의 힘으로 그것을 스스로 납득시키려는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제대로 답을 찾았다면 그것은 다른 이를 위해 공유는 해줄 수 있다. 그래서 수 많은 정답들 중 하나의 후보로 올려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한계이다. 아직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에게 작은 힌트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 한다.
 
그나마 얼마나 부러운 사람들인가? 어떤 답을 얻었던 간에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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