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산다는 것의 가치

아이루다 2014. 12. 27. 10:46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을 하든, 또한 어떤 가치로 우리를 정의하든 간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존재가 매일 살아가는 본질적 목적은 생존이다.
 
물론 우린 위대한 목표를 가지기도 하고, 그것을 하다가 죽어도 좋을만큼 대단한 가치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마치 우리가 죽음을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
 
그래도 인간들 중 정말로 아주 소수는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는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보다 더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삶이나 혹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만이 자신이 평생 추구한 것을 이룰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살 가능성이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살려고 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보통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첫 번째 목표는 오래 사는 것이다. 철없는 사춘기 시절에 어떤 아이들은 백혈병에 걸린 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는 환상을 품고 살긴 하지만, 그것은 그때뿐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오래 사는 것에 미련을 갖는다.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생명체는 원래 오래 사는 것을 원하도록 유전자 레벨에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단 한 차례도 한 눈 팔지 않고 생존을 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이렇게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오래 사는' 것에 대해서 평생을 추구하다 보니, 우린 왜 오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별 생각을 안 하게 되었다. 또한 오래 사는 것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그다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왜 우리는 살아야 할까?
 
이것은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할까에 대한 질문이다. 이 두 질문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 답을 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은 혼자 답을 낸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범용적이고 객관적인 답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 답을 찾아 보기로 하자.
 
우리의 육체는 원래 오래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되어 있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살아야 하는 것이 목적인 우리는, 매 순간, 매 상황마다 죽음으로부터 가능하면 멀어질 수 있는 선택을 한다.
 
높은 곳에 오르면 두려움이 느껴진다. 뜨거운 곳에 가까이가면 화끈거리면서 피부에서 경고를 보낸다. 뾰족한 것에 찔리면 아주 심한 고통이 밀려오면서 상처 부위를 치료하도록 한다. 눈을 향해 어떤 물체가 날라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서 소중한 눈을 보호하려고 한다. 에너지를 섭취하기 위해서 때가 되면 늘 배가 고파진다. 그리고 피곤하면 잠이 온다.
 
또한 우리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단지 정신적인 영역은 한 번 더 꼬아져 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육체와 달리 정신은 행복을 통해 죽음과 멀어진 것을 보상해주는 시스템으로 동작된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그 모든 것은 죽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졌을 때 얻는 보상이다.
 
우리는 혼자 보다 무리를 지어 어울릴 때 좀 더 안전해지기에 행복해진다. 좀 더 나은 능력을 가진 이는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래서 좀 더 안전한 환경에서 살 수 있기에 행복해진다. 우리는 존재감과 자존감을 통해 자신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받고 스스로도 인정하게 됨으로써 행복해진다. 우리는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돈을 얻음으로써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서 한 명씩 죽음으로 향하게 될 때 조차도 가장 마지막에 설 수 있기에 행복해진다.
 
이런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반응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높은 곳에 올랐을 때 공포심을 극복할 수는 있지만, 공포심 자체가 생기지 않게는 못한다. 단지 좀 익숙해지면 상태가 나아질 뿐이다. 우리는 배고픔을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배가 오랜 시간 고프면 그냥 죽는다.
 
또한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얻는 행복을 좀처럼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능력, 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도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나마 이런 것들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할 수 없기에 포기한 것이다. 할 수 있으면서 포기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 가능한 다른 행복을 찾은 것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간은 평생 동안 오래 살려는 본질적 목표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떠오른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질문인데, 그것은 왜 오래 살려고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다들 오래 사는 것을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왜 오래 살려고 하는지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잠시 생각한 후 가까스로 이런 대답을 할 것이다.
 
"행복 하려고요"

 

이것은 돈을 벌려고도 아니고, 권력자 되려고도 아니고,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본질적인 답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 대답만 들어도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든다.
 
이렇듯 이 대답은 참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앞에서 행복은 죽음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느끼는 보상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보상을 얻기 위해서 산다는 뜻인데, 결국 이 말은 죽지 않기 위해서 산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왜 사는지 물으니, 죽지 않기 위해서 산다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지 물으니, 돈이 없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로 답이 아니다. 이것을 답처럼 들리지 모르지만, 진짜 답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을 답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산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보자. 한 40대쯤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 20년을 더 살 수 있고 그 후엔 자신이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는 것과, 그냥 살 수 있는 나이까지 살다가 죽는 경우 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엔 20년 이상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적어도 40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귀엽기 그지없는 손자나 손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나, 인류의 생존을 위한 위대한 희생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이든 간에 상관없이 자신이 느끼는 최고의 가치를 의미한다.
 
이때 단지 더 오래 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20년이 정해진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이 가진 숨겨진 비밀을 조금은 이해한 사람이다.
 
실제로 오래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그냥 타고난 자연적 본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왜 태어났는지는 몰라도 태어남과 동시에 생존을 목표로 한다. 거기에 왜 생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없다. 그냥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태어났으니까 존재해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이유를 찾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개나 고양이나 바퀴벌레나 개미가 오래 살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없다. 우린 인간이기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린 행복 하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행복하기에 오래 산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우리 인간은 이것이 다일까?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고 지적인 탐구와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참모습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렇게나 그냥 동물적인 존재들인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타고난 인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 자신이 개와 고양이와 비교되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정복자이며 주인이지 결코 그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이름이 지어 졌으며 우리의 소유물이다.
 
집안에 쥐가 들어오면 그것은 쥐의 잘못이다. 밭에 멧돼지가 와서 농작물을 먹으면 그것은 멧돼지의 잘못이지 그곳에 밭을 만든 인간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생존을 위한 행동은 정당하고 그것을 손해 입히는 다른 존재의 생존을 위한 반응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정의한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생명체이지만, 우리에게 병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박멸해야 할 대상이 된다. 쥐도 마찬가지다. 조류독감을 옮긴다고 해서 올해도 수 많은 오리와 닭이 죽음을 당했다. 우리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그 모든 존재는 모조리 죽음을 당한다.
 
이렇듯 세상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세상은 우리들 하나하나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태도를 조심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유일한 원리이다.
 
결국 이런 타고난 자부심으로 인해, 우리는 다른 어떤 존재들과는 자신이 다르다고 믿는다. 따라서 오래 사는 것 자체도 그냥 오래 사는 본능에 따라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 하려고' 오래 산다는 황당한 답을 내놓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그것이 가진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물이 죽지 않으려고 사는 것과 우리가 행복 하려고 산다는 말이 다르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로 인간이기에 답을 낼 수 있는 우리들만의 유일한 삶의 의미성이라고 믿고 산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원리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일까? 이렇게나 절망스러운 것일까?
 
아니다.
 
아직은 한 가지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인간' 만이 유일하게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즉, 정말로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은 조금 황당할 수 있다. 오래 사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데, 죽음을 받아들인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일한 해답의 후보이다. 이것 이외엔 모두 행복을 추구하는 삶데 대한 변형된 답일 뿐이다.
 
즉, 우리는 지적 사고를 통해서 오래 사는 것의 무의미성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오래 살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그냥' 이란 답을 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언뜻 생각하면 이 대답은 그리 어려운 답이 아닌 듯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답에 숨겨진 의미는 매우 크다. 그것은 바로 사는 것이 그냥 살기 때문에 죽는 것도 그냥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를 든 20년을 살고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선택한 사람들은, 그것이 가치 있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시간의 차이만으로 20년을 살다가 죽는 것과, 살만큼 살다가 죽는 것을 선택할 때, 20년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나마 선택할 사람은 현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은 사람 정도일 것이다.
 
생명체로써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생존하도록 내부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배고 고파도 음식을 먹을 마음이 안 생기는 것과 같다. 이것이 정말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물론 거식증과 같은 병에 걸리면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병일 뿐이다.
 
우리가 생존을 통해 얻는 행복에 대해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못하고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짓이기에 불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한계로 인해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것이 가능해진다. 지적 능력이 가장 뛰어나 생명체인 인간이 자신이 가진 본질적 한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
 
누가 그 삶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란 점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겠는가? 우리 안에 있는 에고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화를 낼 것이다. 난 소중하다고, 난 의미 있어야 한다고, 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난 살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모든 가치를 내려 놓을 수 있을 때, 아마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만족감과 행복을 얻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기대가 없는 것에 대한 만족도란 거의 무한대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아침이 기적과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일 살 수 있다는 기대치가 없다는 것은, 잠을 들 때 마다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부활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하다. 이것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오래 사는 것과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과는 원리 상 같지만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는 약간 차이는 난다. 하지만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냥 오래 살기 위해서 살고, 그 중 소수의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산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만 해도 큰 차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역시 동물의 영역이다. 거기에서 가치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커다란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삶이 무미성에 대한 자조적 판단이 아니다. 진정으로 삶의 무의미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행복하면서 무의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 상태에서 행복이나 불행도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삶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걱정이 단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진 삶이란 것 정도만 예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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