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선택과 필수

아이루다 2015. 1. 13. 15:25

 
예전에 행복에 대한 글을 쓸 때, 행복을 질과 양이란 방식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글에서, 살기 위해 먹는 것은 양적인 행복이며,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질적인 행복이란 설명을 했었다.
 
오늘 글에서는 이것을 다시 선택과 필수의 측면에서 바라보기로 해보자. 실제로 이것은 질과 양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개념일 수 있지만, 인간의 행복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이해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오랜 시간 생각했지만,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우리는 가치를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한다는 점이다. 생명체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생명체로써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가치인 생명 그 자체를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포기 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기도 하다.
 
자살을 하는 것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어떤 생명체가 행복하지 않고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 역시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현재 자연계에서 자살하는 동물은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자살은 특별한 행위이다. 뭐 물론 쥐의 일종인 레밍과 같이 자살을 하는 또 다른 동물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인간은 가치를 위해 죽을 수 있고, 행복하지 못하다고 해서 죽는 존재이다. 이것은 그냥 들으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음은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죽음은 최고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다른 것을 위해서 그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특징은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자, 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이해하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 시선을 다시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으로 옮겨보자.
 
생명체가 뭔가를 먹는 행위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설령 단세포나 바이러스와 같은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에게도 존재하는 규칙이다. 실제로 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는 태양으로부터 출발한 에너지를 영양분 삼아 생명을 유지한다.
 
물론 우리 인간은 태양 빛을 직접 이용해 에너지를 생성하지는 않지만, 이 태양 빛을 이용해 자란 작물과 그 작물을 먹은 동물을 먹음으로써 태양의 에너지를 간접으로 흡수한다. 아무튼 그래서 생명체와 그것에 일종인 인간은 반드시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즉,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또한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면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한다. 즉, 이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에 대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하는 주체자에게 큰 행복감을 준다. 즉, 우리는 먹는 행복을 위해 살기도 한다.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생각하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명히 우리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말한 가치와 행복을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우리들의 고유한 특징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먹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 반드시 틀린다고만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먹는 즐거움 덕분에 세상을 살기도 한다. 그래서 만약 그 즐거움을 얻을 수 없으면 절망하여 자살할지도 모른다.
 
먹는 즐거움이 사라지면 자살한다는 말을 들은 누군가는 그런 사람은 정신력이 약하다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육체적 활동을 통해 큰 행복을 얻던 사람이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잘린 후, 결국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 대해서 역시나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먹는 것에 큰 행복을 느낀 사람은 좀 불편하더라도 다리 하나 잘리는 것과 혀가 잘리는 것 중에서 다리를 선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는 원래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을 잘 이해 못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결국 인간이 느끼는 행복은 크게 선택적 행복과 필수적 행복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필수적 행복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살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을 통해 얻는 행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하기 싫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안 하면 죽기 때문이다.
 
일단 먹는 것이 그렇다. 잠자는 것도 그렇다. 똥을 싸거나 오줌을 싸는 배설의 행동도 그렇다. 실제로 이 세 가지만 이루어지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더해서 호흡과 같은 부가적인 행위도 포함할 수 있지만, 호흡은 뭐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중요한 행위이기에 호흡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 일은 별로 없다.
 
먹고 자고 싸는 것은 그래서 인간의 필수적 활동이며 필수적 행복이 된다.
 
두 번째인, 선택적 행복은 실제로 이외의 거의 모든 것이 해당된다. 이 선택적 행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자. 물론 먹기 위해 사는 것이 매우 흔한 예가 되겠지만, 좀 더 이해를 하기 위해서 취미 생활을 생각해보자.
 
취미 생활은 일단 기본이 선택적이다. 취미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 맞는 취미를 선택함으로써 큰 행복을 얻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취미 생활들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하는 이유는 일단, 행복해서 그렇고 더해서 취미 생활의 종류에 따라 삶의 활력소를 얻거나 실제로 몸이 더욱 건강해지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취미 생활 자체가 선택적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취미 생활에 자신의 가진 많은 것을 투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매니아라고 불리우기도 하고, 그런 집중으로 인해 먹고 사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취미 생활에 가치를 부여하더라도 결론은 안 한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선택적인 것이다. 단지 더 행복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 좋을 뿐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것이 필수적이든 선택적이든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배가 고프다가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피곤하다가 잠을 잘 자고 나면 피곤이 풀리면서 행복해진다. 배가 무척 아프다가 똥을 싸고 나면 행복해진다.
 
또한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고 나면 행복해진다. 또한 우리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자고 나면 더욱 더 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아주 번잡하고 불결한 장소에서 똥을 싸는 것보다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서 똥을 싸는 것이 더 행복하다.
 
그렇다면 과연 필수적 행복과 선택적 행복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실제로 이것은 분류가 되었을 뿐, 우리들의 착각이나 혹은 잘못된 사고 방식이 아닐까?
 
좀 더 깊은 맥락에서 보면, 선택적 행복은 실제로는 필수적 행복을 기반으로 한 부가적인 행복임을 알 수 있다. 맛있는 먹을 것을 먹는 행복은 먹는 것 자체에 행복이 없다면 얻을 수 없는 행복이다. 또한 좋은 잠자리 역시도 수면이 주는 행복이 없다면 얻을 수 없다. 똥을 싸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느끼는 모든 행복은 바로 필수적 행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우리는 그 필수적 행복을 좀 더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참 많은 것들을 투자하게 된다.
 
오랜 시간을 그러다 보니, 마치 우리가 사는 삶이 필수적 행복이 아닌, 선택적 행복을 위해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닌 먹기 위해 산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명백하게 착각이다.
 
원래 필수적 행복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필수적 행복은 삶을 연장시킨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선택적 행복은 말 그대로 선택적이다. 그것을 한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삶이 연장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했듯 먹기 위해 살지 못한 상황에 놓였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선택적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 기반이 되는 필수적 행복이 추구하는 삶의 연속성을 포기하는 행위 말이다.
 
이것은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 면에서는 행복에 대한 중독이다. 더 행복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로 인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선택적 행복을 위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만약 마약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이 행복할 수만 있는 약물이라면, 이 세상은 온통 마약을 하는 사람 천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술과 담배와 같은 것들이 현재로써는 그런 마약을 대신하고 있다. 그나마 담배는 몸에 워낙 해로워서 가능하면 끊고 싶어하지만, 술 같은 경우엔 그 해로움이 덜하고, 더해서 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이 크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술 자체가 나름대로의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술을 마시고 있다.
 
물론 마약, 술, 담배등을 함으로써 운동을 하지 않아서 몸이 상하는 일에 대한 경고는 계속 나오겠지만, 실제로 집안에서 TV를 보는 것이나,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나, 게임을 하는 일 모두가 실제로 부작용만 없다면 마약, 술, 담배를 하는 것에 비해서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면에서 보면, 행복에 대한 추구는 실제로 중독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중독된 우리들은 필수적 행복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젠 이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문명이 주는, 생산성이 주는 힘이다. 우리는 실제로 하루 일과 중 일부분만을 일하고도 참 많은 것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 그것은 사회가 가져다 준 분업화의 힘이며, 생산성이 높아진 업무 방식의 힘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더 이상 필수적 행복을 만족시키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먹고 자고 싸는 것에 있어서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더 이상 큰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이젠 선택적 행복을 더욱 더 추구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인류의 문명이 발전되면 더 발전될 수록 이 현상은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최대한 간편하고 싸고 쉽게 행복을 얻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꼭 문제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떤 것도 단점이 없는 장점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현상에도 단점이 존재한다.
 
이것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행위에 대한 '진지함' 이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는데, 우리 사회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놓길 바란다. 그래서 사람도 사귀고, 취미 활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TV도 본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분의 시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하길 바라기에 하나만을 추구하다가 혹시나 실패 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계획은 이중 삼중으로 이루어진다. 산행을 계획했어도 비가 오면 산행이 포기되지만, 술집에서 모여 뒤풀이는 할 수 있다. 실제로 여기에서 산행은 사람들이 모이는 적절하고 바람직한 핑계가 될 뿐, 원래 목적 자체가 뒤풀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중으로 추구되는 행복은 바로 하나의 행위에 대한 가벼움으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서 산행이라면, 산행 자체만 계획이 되었다면 비가 와도 비를 맞고라도 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목표가 이미 준비되어 있는 마당에 누가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하려고 할 것인가?
 
물론 그 산행을 하려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정말로 산행이 좋아서 산에 오르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지하게 산행을 바라본다. 하지만 마음이 이미 술집으로 간 사람은 비 오는 산행을 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들에겐 산행을 쉽게 포기하고는 원래 목적인 술집에 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결국 그래서 비를 맞으면서라도 산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뭐하러 힘들게 산행을 하느냐' 라는 말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바로 진지함을 가진 사람이 받는 상처이다. 그리고 이런 상처는 그 당사자를 불행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진지함으로 상처 입은 사람은 그 자신도 점점 더 덜 진지해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말하는 '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쿨한 사람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우리가 쿨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 그리 아쉽지 않는 영역일 뿐이다. 누구도 비행기 시간에 늦었을 때, 뛰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자가용 비행기를 가진 자만이 걸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쿨한 태도는 마치 전염병처럼 계속 퍼져간다. 두 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하는 도중 한 사람이 스마트 폰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상대편 역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면 각자의 스마트 폰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화를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진지함을 버렸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젠 한 두 명의 수준이 아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스마트 폰을 바라보는 세상으로 나가고 있다.
 
실제로 네트워크 상의 세상만큼 진지함이 없는 곳도 드물다. 실제로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각종 채팅이나 SNS는 가볍기 때문에도 잘 이용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담 없이 말을 하고자 할 때, 전화를 이용해 말을 하기 보다는 한 줄 채팅을 더 선호한다.
 
선택적 행복은 그야말로 선택적 행복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본질적 행복은 아무리 돌고 돌아도 결국엔 필수적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필수적 행복은 진지함을 기반으로 한다. 누구도 밥이 없어서 배가 고픈 상태를 장난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하지만 영원히 배가 고플 일이 없는 세상에서 이런 진지함은 무겁고 버겁기만 하다. 우리는 좀 더 가볍게 세상을 살고 싶어한다. 진지함은 그럴 땐 참 멋대가리 없고 어울리지 않는 껍질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또한 이 진지함을 잃은 우리는 결국 필수적 행복을 통해 얻는 가장 원초적인 행복감을 잃어버림으로써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이 마치 호흡을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되는 세상에서 더 많은 선택적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필수적 행복의 부재로부터 오는 공허함은 쉽게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외로움과 고독의 정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밥, 사랑하는 이의 따듯한 포옹, 친구와 나누는 깊은 대화,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선물이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더 행복 하려고 하다가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진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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