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사람의 본성은 무엇인가

아이루다 2014. 12. 29. 12:36

 
아버지가 두 번째 책을 내었다. 아니 전체로 따지면 세 번째인 것 같다. 아무튼 꾸준하시다. 책의 제목은 "사람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 책에 대한 제대로 된 독후감을 쓸까 한다. 그리고 이 글은 아버지께 보여드릴 생각이다. 무엇을 느끼실 지 모르지만, 무엇이라도 느끼시길 바란다.
 
아버지는 책에서 인간의 본성을 지배욕으로 설명했다. 일단 이 관점은 매우 좋다. 사람에게 있어서 지배욕은 정말로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거나 작게 지배욕을 가지고 산다. 또한 어떤 일을 성취함으로써 큰 행복을 얻는다.
 
그래서 아버지의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아마도 아버지의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책에 대해서 나름대로 만족하나 보다. 좋은 책이라고 칭찬을 많이 듣는 모양이다. 뭐, 물론 아버지 말씀에 따른 것이니 실체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생각하기엔, 그 나이대 분들이 내는 책들은 뻔하기 그지 없다는 면에서는 가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자기 삶을 포장한 자서전이나 누구도 공감하기 힘든 시집 등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비교해서 아버지 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래서 호평을 많이 들은 책을 읽은 아들로써, 독자로써 나는 아버지 책에 대한 좀 냉정한 비판을 할 생각이다. 물론 이 비판을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버지의 그릇 문제이다. 그리고 딱히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스스로 말씀한 대로 사람의 편협함은 아버지 당신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계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나 자신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진리도 아니고 객관적일 수도 없다. 단지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아버지가 지금의 사고 범주를 좀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일단 가장 첫 번째로 지적해야 할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 지배욕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왜 지배욕을 본성으로 가지게 되었을까 에 대한 문제이다.
 
아버지는 책에서 많은 동서양 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정리하시면서 그들이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다시 아버지는 책에서 우리 인간이 왜 그런 본성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싶다.
 
나는 우린 왜 지배욕을 갖고 있을까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다면 가장 밑바닥에 깔린 본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현대 우주는 과거 뉴튼의 공식으로도 거의 대부분 맞는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으로 나온 공식으로 계산하면 훨씬 더 정확하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본질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데, 왜 두 가지 모두가 거의 정확할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실제로는 현재까지는 뉴튼은 틀렸고 아인슈타인이 맞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조차도 미립자로 구성된 양자의 세계로 가면 오류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아직도 과학자들은 세상을 통하는 TOE (Theory Of Everything) 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가장 과학적인 태도로 그 본질을 알아내는데 있어서 조차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듯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원래 장님은 아무리 코끼리를 만져도, 코끼리 전체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글이 잠깐 벗어 났는데, 아무튼 우리가 무언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밑에 있는 원천적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욕은 중간에 걸쳐 있는 것일 뿐, 가장 밑바닥이 아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것만을 보고는 어떤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대충 맞을뿐, 정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장 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인간으로 하여금 지배욕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욕구일까? 그것에 대한 답을 내면서 글을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아버지의 해석과 달리 인간을 관통하는 유일한 본성은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 이다.
 
잘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많은 책을 읽고 이런 책을 써 내는 것도 아버지의 행복이기 때문에 한다. 그것을 어떤 미사여구와 어떤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더라도 이것이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결국 본질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버지께서는 이 책을 쓰고 펴내는 동안 행복을 느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낸 책이 다른 이들에게 호평을 받을 때 행복하다. 그래서 책을 쓰신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진리를 알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쓴 책이 아니다. 당신이 가진 지식과 지혜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쓴 책이다. 그래서 남들이 많이 읽어주고 좋은 평가를 해주길 바란다.
 
물론 이 좋은 책을 많이 이들이 읽어서 다른 이들이 좀 더 뭔가를 알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아버지 스스로 말씀하시는 지배욕의 변형된 모습이다. 아버지의 사상이 다른 이들에게 좀 더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마음 자체가 사상적으로 발휘되는 지배욕이다. 그리고 이런 지배욕은 행복의 이유가 된다.
 
실제로 모든 종류의 욕구는 행복의 원천이다. 우리가 식욕, 성용, 지배욕, 성취욕, 재물욕 등을 갖는 모든 이유엔 바로 행복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실제로 배가 고파서 먹을 때도 행복하니까 먹는다. 만약 우리가 먹을 때마다 엄청나게 아프다면 그 사람은 그 불행으로 인해 먹기를 그만 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자살에 대한 생각은 행복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불행한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한다. 더해서 불행함에 더해서 참혹한 미래로 인해 아무런 희망이 없거나 닥친 고난을 이겨낼 자신이 없을 때 실제로 자살한다. 이때는 지배욕이고 성욕이고 식욕이고 아무것도 없다. 그냥 불행하면 죽는다.
 
결국 우리 인간의 본성은 오직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뿐이다. 그것이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이젠 두 번째 질문이 나온다. 우린 왜 행복 하려고 할까? 행복은 그냥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본질 같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것 역시도 우리의 최종 본질이 아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질문의 심오함과 달리 우리는 왜 행복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답은 지극히 단순하고 쉽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서 행복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죽지 않을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언제나 죽을 가능성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때 행복함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나 고양이나 바퀴벌레나 모두 같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좀 더 뛰어난 머리로 행복에 대한 계산을 더 많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먹지만, 기분이 좋기 위해서도 먹는다. 우리는 먹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는 먹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먹는다. 이것이 인간의 지적인 역량이다. 우리는 먹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기억으로 안다. 그래서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 좀 더 맛있는 것을 먹는다. 따라서 우리가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에 대한 질문은 모두 정답이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한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 행복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플 땐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배가 부를 땐 맛있는 것을 먹을 때가 행복 하다. 그래서 우린 이 둘을 합친다. 배가 고플 때 맛있는 것을 먹음으로써 가장 큰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먹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서 먹는다. 이것은 본질이다. 우리가 먹는 가장 원천적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한정적 삶을 산다. 그러니까 결국 죽는다. 우리는 그래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계에서 숫컷은 그 자식을 남기는 숫자는 10% 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를 남기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선택 가능하다. 그래서 먹지 않는 인간은 없지만, 자녀를 낳지 않는 인간은 꽤나 존재한다.
 
이것은 아버지 책에서도 나온다. 성욕과 식욕 중에서 뭐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글귀가 있다. 거기에서도 식욕을 더 우선으로 판단하셨다. 그 말은 전적으로 옳다.
 
우리의 삶은 먹고 호흡하는 것으로 유지가 된다. 그래서 이 둘이 삶의 가장 큰 원천이다. 우리는 공기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인간이 육체의 손상을 제외하고는 죽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호흡을 막는 길이다. 우리는 목이 졸리면 단 5분만에 죽는다. 먹지 않아도 50일을 버틸 수 있는 인간이 그렇게 되었다.
 
만약 우리 지구가 가끔 산소가 사라지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지속되는 환경이었다면 아마도 이 지구에서 진화한 모든 생명체는 한 시간 이상의 공기를 담을 공기 주머니를 하나씩 차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공기의 여유분을 담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진화해 온 것이다.
 
하지만 먹을 것을 그렇지 않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도 우리는 언제나 먹고 싶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 사회조차도 그렇게 된 지가 몇 백 년도 안되었고, 지금도 먹지 못해서 죽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기본적으로 지방을 축적시켜 놓고 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도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을 버티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고 그 행복의 원천은 죽음이란 말을 처음 들으면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다는 말을 스스로 납득하기란 우리 스스로의 자부심과 인간 특유의 자존감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오랫동안 탁월한 일인자 자리를 지켜왔다. 당장 문명에서 멀어져서 낯선 밀림에 놓이게 되면 초라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총과 칼로 무장한 문명 속에서는 스스로에 대해 금칠을 해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이라서 추구하는 그 모든 가치는 생명의 위협이 심각한 공간에 있으면 금새 무력화 된다. 우리가 양보를 하고 배려를 하며 남을 돌보고 좋은 선행이나 혹은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그런 행동은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안전한 장소와 부족하지 않는 먹을 것을 최 우선으로 챙기려 할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전해지고 먹을 것이 풍부해진 우리 인간은 이젠 수 많은 인간다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성이란 말이 만들어지고 각종 제도와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실제로 허상이다. 핵전쟁이 나서 문명이 무너지고 지식이 전승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우린 언제라도 원시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거기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다. 거기엔 그 어떤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생존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버지 책에서 나온 지배욕의 본질은 행복의 추구이다. 그런데 왜 지배욕이 행복이 될까? 우리는 왜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행복을 느낄까?
 
가장 단순한 이유는 바로 가장 윗사람은 자신이 하고픈 것을 할 수 있다. 회사에서 마찬가지다. 사장이 당구를 좋아하면 그 회사 직원들은 모두 당구를 친다. 사장이 책을 좋아하면 다들 독후감을 쓴다. 사장이 스키를 좋아하면 그 직원들은 겨울마다 스키장에 자주 방문한다.
 
지배자는 그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하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배자가 가진 장점의 일부일 뿐이다.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것을 위해서 지배자가 되진 않는다.
 
누가 당구를 치고 싶어서 회사의 사장이 되려고 하겠는가?
 
본질을 따로 있다. 우리가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은 바로 보장받는 안전함에 있다. 어떤 존재든 가장 위에 있는 존재는 모두가 차례로 희생되어야 할 때 가장 뒷 줄에 설 수 있다.
 
회사가 권고 사직을 시킬 때 회장을 권고 사직 시키지 않는다. 회장은 마지막까지 남는다. 그래서 누구나 안전한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가려고 한다. 이것은 부회장의 자리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회장 역시 회장이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해서 우리는 어떤 조직에 몸을 담든지 상관없이 그 조직내의 영향력을 갖고자 한다. 이것도 일종의 지배욕인데,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자릴 때 뒷줄에 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향력은 일을 잘하는 능력이나 사람들과 맺어 놓은 친분 관계나 혹은 대체 불가능한 일을 맡아서 하는 경우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람간의 관계를 잘할 때 행복함을 느낀다. 혹은 남들은 못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갖길 바란다.
 
다행히 회사는 직장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만, 과거 원시 부족일 때는, 종족간의 전쟁에서 재물이 되어 상대편에게 팔려가 노예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원리는 우리가 어디에서든 자신이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가 되게 하고픈 욕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욕구가 충족될 때마다 우리는 큰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배욕의 본질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생존을 보장 받는 것들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관계, 능력, 가진 재산 모두가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열쇠이지만 이 모두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굳게 잠그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결국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이상한 존재이다. 왜 이것이 이상하냐면, 결국 죽는 존재인데 죽지 않기 위해서 살기 때문이다. 줄에 매달린 사람이 언젠간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최선을 다해 잡고 있는 것이다. 만약 5분 후 그 줄이 끊어질 것을 안다면, 누가 힘들게 그 줄을 5분간 잡고 있을까?
 
아니, 실제로 인간은 잡고 있는다. 5분이라도 해도 그 시간만큼을 더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만큼이나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우리의 생존에 대한 욕구는 정말로 대단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수 많은 중간 단계의 본성이 나타나고 또한 그 위로 더 나타나, 결국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성향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지배욕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은 생존욕구이다.
 
아버지는 책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지배욕에 대한 우리들의 본성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같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역시도 인간의 일부이다. 즉, 아버지도 어떤 의미에서 강한 지배욕을 가진 분이다. 아마도 그래서 지배욕에 대해 더 크게 느끼신 듯 하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책에서 예를 든 철학자들 중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은 관념적이라고 폄하하셨지만, 실제로 이 세상은 그것을 느끼는 존재인 '내' 가 존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말은 맞다. 이것이 물리적으로는 아니지만, 내가 없다면 어떻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말이 바로 아버지가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다. 아버지는 스스로 지배욕에 많이 사로잡혀 있어서 지배욕에 너무 과도한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배욕은 행복으로 가는 여러 가지 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의 주장은 오직 인간의 범위에서 머무른다. 인간이 존재해야만 설명 가능한 본성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순간 아버지의 주장은 허공에 떠 버린다. 아버지의 책은 그래서 사람의 본성이 아닌, 인간 사회의 본질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실제로 내용도 그렇다.
 
아버지는 책에서 노자나 장자를 꽤나 비판적으로 다뤘는데, 이것이 아버지가 가진, 드러나는 명백한 한계점이다. 아버지는 절대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들의 말이 어떻게 아버지에게 이해가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존재감이 너무도 강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란 점을 인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역시 칼 세이건의 말을 빌러 우리가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라는 표현도 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모두 티끌만도 못하다.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나 우리가 가진 본성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배욕 조차도 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냥 태어났기에 산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절대적 1등을 했기에 인간이 뭔가 다른 존재 이길 바란다.
 
우리는 동물과 달리 두 손을 써서 여러 가지를 만들지만, 우리가 만든 것은 고작 태양계 수준이다. 이 우주엔 끝도 모를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지구가 반으로 쪼개져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이 우주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얼굴에 돋아 난 뾰루지 하나만도 못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 뭔가 되는 냥 으스대야 하기에 그 수 많은 관념들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는 그것에 대한 정확히 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판과는 달리 정작 본질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이다.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 사는 이유가 행복이란 것임을 이해하셨으면 한다. 아버지는 그것조차도 잘 모르신다. 그래서 본인은 스스로 늘 행복하기 위해서 살면서도 행복하기 위해서 살기 보다는 의미 있고, 존재감이 있으며, 남들에게 인정받으려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열한 것들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주기에 아버지가 추구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래야 다른 이들의 다른 형태의 행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가치화 시키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결국 자신이 느낀 행복을 가장 위에 두고 나머지를 그 밑으로 깔아 버리는 행복 서열화를 시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드라마 보고 맛있게 밥을 먹는 것들은 낮은 가치를 가진 행복이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높은 가치를 가진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세상은 그 자신이 잘남을 증명함으로써 행복해 한다는 숨겨진 어리석음을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이 가치라고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이다. 문제는 그 당사자들이 그것에서 깨어나려면 거대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책도 쓰는 것이다.

 

행복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마냥 헛소리는 아니다.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들은 분명히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런 가치 있는 것들이 다른 소비성 행복에 비해 힘들고 이루기도 힘든 것도 맞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서 한 일들이 과연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이 땅에 살던 그 많던 동물들은 지금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우리가 자연의 일부가 아닌 절대적 존재라면 이것은 그리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이 망가지면 같이 종말할 수 밖에 없는 지구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 떠오르는 태양 없이는 단 1년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모든 행복이 다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삶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엄청나게 힘들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때 우린 안식에 들 수 있다. 자신의 것을 내려 놓고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부처의 깨달음이고 예수의 설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면 욕심을 좀 더 내서 우리의 행복이 죽음을 멀리하는 것이란 본질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 할 뿐,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우린 보통 행복에 최종 의미를 둔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한계점이 여기에서 머무른다.
 
이것을 벗어나면 소크라테스라고 되고 노자가 되고 장자가 되고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된다. 그래서 이것은 좀처럼 갈 수 없는 길이다.
 
나 역시 이 길에 대해서는 지식적으로 알고만 있을 뿐이다. 이제 겨우 가치는 삶에서 행복한 삶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 역시 아버지처럼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 흔적이 가득하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그것을 뛰어넘고 싶다.
 
내가 티끌 같은 존재이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다. 내 안에서 날뛰는 에고의 존재를 몰아내고 싶다. 아마도 그것이 나의 남의 생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설명 드리고 싶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까지 심하게 막혀있다. 80년이 넘는 삶을 믿고 산 것을 어찌 몇 마디 말로 깨낼 수 있으랴. 그럼에도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리 많이 남지 않는 생을 갖지 못한 것을 쥐고 사시는 것보다, 가진 것에 고마워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기 때문이다. 내려 놓으며, 그냥 가지고 계신 욕망과 욕심을 내려 놓으면, 자신이 그리 잘나고 싶다는 욕구를 버리면, 실제로 그 잘나 보이는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셨으면, 그것이 한국의 대통령이든 세계의 지도자든 상관없이 결국엔 그들 역시도 인간 세상에서만 유효한 가치라는 점을 아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좀 더 편해지셨으면 한다. 그래서 가족과 책 이야기보다는 그냥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평범한 대화를 했으면 한다.
 
물론 불가능 할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대화법을 교육받으시지도 못했고 잘 하시지도 못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진 가장 큰 불만이 그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고 훨씬 더 똑똑할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하진 못하다. 어머니가 훨씬 더 행복하게 사신다. 그래서 두 분 중에서 어머니의 삶이 더 낫다.
 
아마도 아버지 역시 어느 날 문득 그것을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당신 역시도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고 말이다. 난 그것이 아버지의 말년을 좀 변화시키길 바란다. 또한 이 글이 아버지에게 전달될 때 조그만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아버지가 좀 더 행복해지셨으면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당신의 행복만을 위해 당신의 잘난 과거를 말씀하는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셨으면 한다. 그래서 독백이 아닌, 대화를 하셨으면 한다. 사람과 만난 자리에서 독백은 독배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나와 아버지가 이 글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대화 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시기 위해서 가능하면 여러 번 읽으셨으면 한다. 그리고 이 글에 쓰여진 작은 사실적 실수를 꼬투리 잡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길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주 작은 실수를 크게 부풀리는 침소봉대의 태도를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 위주이며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인간 자부심에 빠져서 살아간다. 아니, 우리는 인간 자부심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 이 글은 책을 쓰신 아버지께 보여 드릴 독후감 형태의 글이라서, 내용이 기존에 썼던 많은 것들과 중복이 많이 된다는 것을 양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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