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현대물리학과 동양철학

아이루다 2013. 6. 2. 07:58

 

지난 글들의 목록을 보니.. 내가 책에 대한 글을 쓴지가 정말 꽤 오래되었다. 심지어 올해는 단 하나의 글도 적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요즘 책 읽기에 꽤나 게으름을 핀것 같다. 뭐 늘 그렇지만 핑게꺼리는 있다. 보통 나는 이동 중 책을 많이 보는 편인데(지하철) 요즘은 지하철 탈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또하나 요즘 읽고 있는 두 권의 책이 참 어렵다는 점도 어느정도 작용했다.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선집' 과 오늘 독후감을 쓸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이란 책이다. 전자는 물론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사람이 살아 생전 했던 말들을 모은 책이고 오늘 쓸 이 책은 '프르초프 카프라' 라는 이름을 가진 물리학자가 쓴 책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점은 선집 같은 경우는 어떤면에서는 정통 인도식 정신문화를(카프라는 이것을 신비주의라고 표현했다) 벗어난, 어쩌면 더 넓은 범위의 사유를 말하는 반면, 카프라의 책은 물리학자로서 바라 본 동양의 신비주의 이기 때문에 조금 겉핥기 식인 느낌이 있다. 즉 카프라가 매우 중요한 것들로 꼽는 어떤 내용들을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두 종류의 책을 같이 읽으면서 느끼는 조금 아이러니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아무튼 이제 이 책에 대해 써보겠다.

 

먼저 이 책을 알게 된 과정을 적어보겠다. 이 책은 내가 자주 접속하고 있는 네이버 천문카페에서 누군가 적은 한줄기 글귀로 시작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내용을 얼마전 기록한 것 같기도 해도 대충 넘어간다. 아무튼 나는 끌리듯 이 책을 주문을 했고 그 후 한동안 이 책을 집에서 틈나는 대로 읽었다.

 

이 책의 저자인 프로초프 카프라라는 분은 이름 느낌은 러시아 사람 같은데 아무튼 물리학자이다. 그냥 물리학자 정도가 아니가 유럽에서 교수를 하고 미국에서 소립자 연구까지 한 20세기의 중후반 역사를 함께 한 분이다. 그러던 중 이 분은 어떤 계기로 인해 동양사상에 접하게 되고 그 후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미립자의 세계, 즉 상대론적 혹은 양자역학적 세계가 주는 인식의 변화와 아주 오래 된 동양의(중국, 인도, 일본 - 왜 한국은 빠졌을까?) 불교, 도교, 선교, 힌두교에서 말하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거대한 서사시가 매우 유사한 개념을 말하고 있음을 깨닳고 1975년 결국 이 책의 1쇄본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 후로도 이 분은 이 분야에 꽤나 심취해 물리학자로서 보다는 실제로는 일종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나보다. 뭐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배경때문에 이 책은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바로 아주 먼것으로 인식되던 양자역학과 불교가 한자리에서 모인 것이다. 도대체 최 첨단의 과학 이론과 수천년이 된 부처가 창시한 한 종교가 왜 한자리에 모여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을까?

 

이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나는 이런 내용들을 따로 따로 읽긴 했다. 개인적으로 우주의 기원을 알고 싶어서 나름 다양한 교양 물리학서적을 읽어왔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정신적 단계가 있겠나 싶어서 동양철학에 대한 책도 쪼금 읽었다. 물론 매우 겉핧기이다. 그런데 나 역시 이 두가지 전혀 다른 개념의 책을 읽으면서 내 스스로가 알고자 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생겨난 존재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 우주는 또 어떤 근본 원리에 의해 생성되고 존재해가고 있는가에 대한 조금은 근본적인 것들이다.

 

물론 내가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절대로 그것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 인간은 참 아무것도 아니란 것과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인식의 방법, 그것의 결과 등등이 실제로는 거의 내가 만든 착각이란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위해 다양한 생각과 거기에서 정리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의 생각은 물론 매우 미약하고 극소적이고 한계가 분명하지만, 확실히 전문가의 눈으로 본 내용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내용이 바로 그랬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책의 독후감은 쓰기가 매우 어렵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저자 역시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동양철학 쪽에는 그저 어떤 책에 기록된 내용을 나열하고 그것이 현대물리학의 이론과 어떻게 매치가 되는지 정도를 설명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책의 내용의 2/3는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중 어느정도는 오래된 물리학 이야기였다.

 

이 시기적 차이도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조금 떨어뜨려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관련 책들을 읽어 왔기에 현대물리학에 있어서 양자역학 이론의 진화를 어느정도 알고 있는 편인데.. 이 책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너무 오래된 이론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단지 많이 다뤄졌는데도 불구하고 요즘은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 것들을 이야기 해놓아서 그렇다. 특히 부트스트랩에 관한 이론은 난 이 책에서 처음 들어봤다.

 

현대물리학 혹은 물리학을 총칭해서 말할 때 이것의 시작은 서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동양에서도 어느정도 과학적 사고방식이 발전하기 했지만 솔직히 요즘 거의 모든 기계문명의 시초는 서양이 맞다. 그리고 그것의 근간이 된 이론들도 모두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양의 철학은 분석하기에 들어가고 동양의 철학은 전체를 이해하기 방식으로 발전되어 와서 그런 듯 하다.

 

서양 인식론은 과학 영역으로 분화되면서 점차로 우주의 원리를 알고자 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 방향으로 인해 뉴튼이라는 아주 대단한 과학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그 말고도 아주 많은 이들이 흐름에 참여하여 발전을 해 온 것이다. 그 후로도 아인슈타인을 거쳐 수 많은 천재들이 지금껏 우주의 원리와 그 근본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동양의 인식론은 일명 뜬구름 잡기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주의 지배적 원리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오랜시간의 명상이나 사유를 통해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진정한 실체로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 싼 우주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하기가 너무 힘든 일이다.

 

이 책에서 말했던 것 중에 많이 공감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린 언어로서 이런 종류의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달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를 들어 내가 사랑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자 할 때 정말로 내가 느끼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령 설명하더라도 정말로 100% 모두 전달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내가 느끼는 인식과 완전히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그것은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나도 문제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 조차도 모두 자신의 인식체계 안에서 그것을 해석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장자는 '만약 어떤 사람이 도에 대해서 묻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표현을 했다. 이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우주의 원리 즉 '도'에 대한 객관적 정의란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은 '도' 는 인간의 언어로서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을 말한다. 즉 책으로도 쓰여질 수 없다는 뜻이다.

 

19세기 후반에 물리학의 난제중 하나가 바로 빛의 정체였다.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란 것이 결국 결론이었지만 이것은 너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 파동은 연속체이다. 하지만 입자는 단일체이며 부피과 질량을 가진 존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파동은 그 어떤 형상도 없으며 단지 에너지만을 가진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그 유명한 E=MC2 공식을 공표했으며 이를 통해 우린 결국 원자폭탄을 만들고 태양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되돌아가서 어떻게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보자.

 

어떤 의미에서 입자는 매우 서양철학적이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한 구분을 하고 그 경계를 명확히 하며 단일 사물체로서 분석하고 정의하는 방식은 매우 고전 과학적이면서도 서양적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파동은 연속적이고 경계가 모호하다. 즉 파동의 경계는 찾을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천천히 그 영향을 줄어가고 있을 뿐 완전한 존재하는 지점도 완전히 사라진 지점도 애매하다.

 

이런 물질의 근본적 성질과 그것을 이해하는 인식의 차이가 바로 이 입자와 파동을 말하고 있음을 나는 어렴픗이 느끼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인식은 바로 입자적 방식이다. 우리 몸은 그냥 내 몸이고 컴퓨터 자판은 그냥 컴퓨터 자판이다. 이것은 단일 별개의 물체로 키보드가 부숴져도 내가 아픈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에 근거한 인식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 모든 것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키보드를 내가 세계 내려쳐서 부쉈다면 내 손 역시 아픈 것이다. 뭐 이것은 나만의 말도 안되는 예이긴 하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그 모든 것이 마치 수 많은 파동이 연결되어 흔들리는 물처럼 우리를 구성하는 우주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직관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그런 의미가 전달되어 지고 있다.

 

서양의 학문을 공부한 우리의 인식은 단일체의 집합 방식이고 동양철학은 연속체의 조화라고 나는 감히 정의 내려본다. 이 둘의 차이는 먼저 말한 빛의 입자/파동 성질과 매우 비슷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 느낌은 둘은 그저 같은 원리의 다른 면을 보고 있다는 점도 있고 이와는 조금 다르게 실제로는 우리가 입자로 느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인식 착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내가 파동쪽으로 약간 손을 들어주는 것인데 실제로 입자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근사치라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양자이론에 따르면 특히 그중에 하이덴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우린 어떤 소립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없다고 한다. 즉 우린 원자에 있는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 그것의 진정한 위치는 관찰 후에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예측하기 위한 기법이 바로 '파동함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살아 생전 이 이론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 전환의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고정적이고 객관적인 고전 물리학은 이제 유동적이면서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었다. 그 동안 고전 과학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분명히 구분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구분되어지지 못했다. 즉 전자는 그 위치가 파동함수를 통해서 예측만 되고 있다가 실제로 관측되는 순간에 그 위치가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관찰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참여를 의미했다. 즉 이후로 객관적 관찰이란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을 할 수 없다면.. 실제로 그 관찰이 객관적일 수 없다. 즉 과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모두 주관적인 입장이라면 어떻게 과학적인 사실이나 이론적 근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오래된 동양철학은 이미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애매하긴 하지만 실제로 우린 그렇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결국 우리가 가진 인식은 오감이 주는 잘못된 정보와 편한 삶에 대한 욕구로 인해 지식을 견고하게 쌓아 그것을 통해 근사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 역시도 근사값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지금도 충분히 사용가능 할 만큼 대단한 원리이다. 하지만 그 이론은 약한 중력에서만 통한다. 중력이 엄청 강해지는 곳으로 가면 상대성이론을 적용해야만 한다. 즉 시공간의 뒤틀림이 적은 곳에서는 뉴튼의 공식을 쓸 수 있지만, 그것이 엄청난 중력으로 인해 많이 뒤틀리면 반드시 상대성 이론의 공식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대성 이론조차도 양자의 세계로 가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식으로 과학의 이론은 아직도 근사값을 찾아내는 정도의 수준이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세상은 우리 감각기관이 전달해준 근사값 정보를 통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우린 이것을 거의 절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지어 뇌의 불안한 활동조차도 그리 확실하게 믿어 유령이나 귀신 같은 존재를 믿기도 한다.

 

이쯤해서 조금 이야기 방향을 틀어 공과 형상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자. 그것은 바로 '공즉시색, 색즉시공' 이라고 알려진 오래된 불교 경구이다. 해석하면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진공에 대한 현대 물리학의 해석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책은 말한다. 실제로 현대물리학은 진공상태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해도 순간적으로 '무'로 부터 어마어마한 입자들이 생성되었다가 다시 '무' 상태로 돌아가는 일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비어있다고 느끼는 그 공간에서도 실제로는 가득찬 입자들의 생성과 소멸이 있다는 뜻이다. 즉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한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내용도 역시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의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 착각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즉 우린 사물에 대해 인식을 하지만 실제로 우린 사물이 아닌 사건에 대해 인식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쓰면 우린 '컵', '내 몸' 과 같은 사물을 인식의 주체로 사용하고 그것의 행위를 기술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인식으로 주체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사물들이 만들어 낸 사건들이란 의미가 된다. 즉 내가 무엇을 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 그 사건이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록 이런 인식의 변화는 더 많이 요구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살기엔 역시나 고전적 방법이 좋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 인류는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이시점에 좀 더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책의 내용을 글로 쓸 만큼 이해한 것이 못된다.  이 글 내용이 정말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실제로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아무튼 또 언젠가 좀 더 깊은 이해가 있을 것이란 믿음은 버리지 않는다.

 

PS. 뉴튼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우주의 모든 물체는 상호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증명했지만 그 인력(중력)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개념을 통해 중력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그 전달이 빛의 속도라고 증명했지만, 빛의 속도는 왜 일정한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제 미래의 과학자들은 왜 빛이 초당 30만KM를 이동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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