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

아이루다 2013. 9. 1. 07:52

 

이 책을 언제 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제 이 책을 두 번째로 읽고 난 후 발행된 시기를 보니 2012년 1월쯤 된 듯 하다. 그러니 아마도 작년 이맘때 쯤에서 앞뒤로 몇 달 정도 기간에 사지 않았나 싶다. 뭐 그나저나 이 책을 언제 샀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었던 그 당시, 나는 정말로 별 느낌이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 영월에 갔다가 읽을만한 책을 찾던 중 우연히 눈에 다시 띄어 읽었는데 놀랍게도 과거에 읽었던 기억이 거의 없었던 점이 나 스스로도 웃겼다. 내가 기억으로 남은 것은 책에서 예를 들어서 설명한 작은 이야기 토막이 거의 다 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스스로 풀리지 않는 의문인데 아무래도 나의 건방짐 같다는 생각으로 굳어져 간다.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그렇지만 솔직한 말로 서점에 가면 읽을만한 책을 찾기가 참 힘들다. 아니 그것보다도 제대로 쓴 책을 골라내기가 힘들다는 뜻이 더 맞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여기에서 제대로 된 책이란 의미는 책을 팔고자 책을 쓴 것인지, 쓰고 픈 이야기가 있어서 책을 쓴 것인지에 대한 여부이다. 물론 나는 후자의 책을 고르고 싶어하는데 내가 꼬인 탓인지 아니면 세상이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무튼 요즘 나오는 책들은 왠지 모두 책을 팔기 위한 책으로 보여진다.

 

특히 요즘에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힐링이란 단어는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독버섯같은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막말로 힐링장사를 하고 있는 책들이다. 솔직히 힐링의 목적의 책을 쓰는건 매우 쉽다. 물론 조건이 갖춰줘야 하지만. 남들과 조금 다른 삶, 적당한 공감, 제법 그럴법한 예시,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문체, 절망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적 결론 등이 조합되어서 여기에 출판사의 영업력이 더해지면 날개를 달게 된다.

 

이런 책들의 가장 큰 문제는 책의 내용이 마약처럼 작동하는 점이다. 우리가 살기 힘든건 정말로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힘들지만 우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는데 이런 종류의 책은 마치 진통제처럼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결국 고통을 잊게 만들어 버린다.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치열하듯 우리의 생각도 역시나 그만큼이나 치열해야 하는데 그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결국 내가 주로 책을 보는 분야 역시 이쪽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어서 내 의심은 좀처럼 거두워지지 않는다. 특히 작가가 우리나라 사람인 경우엔 번역이라는 두번째 검증 과정이 없었기에 더욱 더 그렇다. 실제로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은 거의 선택하지 않는 편이다.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 는 내가 고른 책 중에서 드물게 우리나라 사람인 '김선희' 라는 분이 쓴 책이다. 이름으로 봐서는 여성분인듯 싶으나 저자의 이름을 모르고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작가가 남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일단 여자와 철학은 어찌된 듯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 선입견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서 책의 내용 역시 여자의 섬세함보다는 남자의 분석력이 더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솔직히 말해서 아마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분일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몇가지 주제를 정해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거기에서 과거 철학자들의 사유와 태도등을 같이 설명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몇가지 소제목에서 좀 깊은 공감을 했다. 그리고 왜 내가 과거에 이 책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읽고 넘겼는지가 의심스러워졌다.

 

내가 가장 공감한 이야기는 바로 '굴레를 뛰어넘는 삶의 바퀴자국에 대하여' 라는 소제목의 글 내용이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비틀즈의 멤버로 유명한 존 레논과 일본인 요노 요코 사이에 있었던 사랑 이야기와 세계적으로 유며한 존 레논의 아내로서 요노 오코 라는 여인이 어떻게 스스로 유명인의 아내가 아닌 요노 요코 라는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시로 들었다.

 

실제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개개인은 가족의 울타리에 묶이면서 참 많은 안락함도 얻지만 반대로 하나의 인격체로서 혹은 자신의 삶의 주관자로자로서의 역할이 좀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결혼한 나의 친구들의 아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버릇이 있다. 왠지 나는 내가 결혼 전 알던 그 여자분들이 어느날 갑자기 아이를 낳은 후 '누구누구 엄마'로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버릇은 유지되고 있다. 물론 결혼 전 좀 친했을 경우만 그렇게 한다.

 

책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다. 과거부터 아이들을 위해 나온 만화영화 스토리의 흐름, 한국 드라마의 일관적인 이야기들, 자식을 위한 부모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서 우리가 어떻게 가족에 얽메이고 또한 우리는 또 어떻게 가족을 하나의 삶의 도구로서 이용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철학자 니체가 등장한다. '짜라투르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쓴 너무도 유명한 철학자 니체가 말한 인간은 단지 세가지 단계로 분류가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낙타의 단계이다. 낙타는 노동과 순종, 끌려짐을 의미하는 삶이다. 우리가 가족의 품에서 자라서 나이를 먹은 후 또다시 가족을 이루고 그 안에서 돌봐짐을 당한 것에서부터 돌보는 역할로 그 주어진 의무만 바뀐 상태로 평생을 지속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내의 역할을 바로 낙타로 정의한다. 하지만 나는 이 낙타의 단계를 실제로 우리 사회 구성원 거의 모두 라고 확장해 본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누군가 정해 놓은 삶의 정답을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인 것으로 착각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믿고 내가 따르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은 모두 사회가 나에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주입하고 강제한 방식이란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사자이다. 사자는 낙타의 순종과 끌림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개척하는 단계를 말한다. 사자는 자유롭고 용감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사자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종속적인 낙타의 삶에서 벗어 났지만 가야 할 길이 어딘지 모르는 것이다. 즉 가출한 청소년이 자유를 찾아 밖으로 나왔지만 잘 곳이 없어서 친구 집에 가는 꼴이 된다. 젊은 시절 삶에 대한 깊은 회의로 방황하던 젊은 영혼들의 모습도 이 사자에 잘 어울린다. 그들 중 일부는 머리를 깍고 중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잠시간의 방황 후 다시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잠시 사자였던 기억을 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바로 어린아이이다. 이 어린아이 단계는 내 능력으로는 기술하기가 힘들어서 책에서 나온 이야기를 적어보도록 하겠다. 어린아이는 과거의 것으로 현재를 판단하지 않는다. 즉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에게 어떤 전통이나 권위도 의미가 없으며 모든 것은 새롭고 즐거운 놀이감이 된다. 우리가 만약 우리 머리 속을 가득채운 사회가 주입한 선입견을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로울지 상상조차 하기가 힘들다. 돈에 대한 가치, 안정된 삶이란 이유로 감내해야 할 그 많은 불행함, 콘크리트로 층층히 겹 쌓인 건물에 부여 한 가치 등등 우린 사회로부터 강요받은 가치로 세상을 판단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공감은 바로 어린아이의 단계였다.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아니 가진 것이 아니라 주입된 세상에 대한 지극히 단순하고 모순적인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그 많은 성인들의 공통된 말과 나 자신 역시 최근에 많인 느낀 현재의 내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에 대한 답이 모두 결국엔 다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나 자신이 가진 한계지점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해서 들고 다닌 그 무거운 짐을 모두 버리고 최대한 가볍게 몸을 만들어야 나의 앞에 놓은 거대한 갈라진 틈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여기에서 혹시나 해서 가지고 있는 그 무거운 짐을 들고서 뛰었다간 바로 추락하여 다시는 시도를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린 우리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려야만 한다는 진실에 대한 접근 이었다.

 

이 책은 이 부분 말고도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우리 개개인에 대한 열개 남짓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방금 전 소개한 이야기 말고도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은 이야기들로 꽉 채워져 있다. 이것들까지 다 소개를 하면 책 저자분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또 글도 너무 장문이 되기에 나머지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책의 표지 뒷면에 붉게 쓰여진 하나의 문구로 이 책에 대한 마무리를 한다.

 

'철학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 역시 결론을 내어주지 않는다. 내가 블로그에 쓰는 대부분의 글은 결론을 내고 그 방향으로 내 맘대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작은 힌트만을 제시해주고 끝낸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이란 것에 동의를 한다.

 

우리 인간은 정답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정답을 내는 순간 그것은 고정되고 그것에 따르면 바로 낙타의 삶이 된다. 우린 모두 개개인의 다른 정답을 내야하고 그것이 바로 어떤 종류의 삶이든 간에 그 스스로가 결정한 삶이니 최고의 최선의 삶이 된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답을 꼭 찾고자 한다면 그것이 정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삶에서 정답을 찾는 행위는 어리석으면서도 안정적인 행동이다. 그래서 종교를 가진 이들은 삶을 편안하고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겠지만 반대로 그 삶이 고정되고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보면 다른 의미의 불행한 이들이다. 물론 그것조차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세상이니 그나마 그 대상이 잘못되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낙타가 끝없이 흔들리는 낙타보다는 낫겠지만.

 

세상은 의심없는 낙타, 불행한 낙타, 행복한 낙타로 구성되어 있고 불행한 낙타 중 아주 소수는 변화를 꿈꾼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사자를 꿈꾸는 자는 일단 거의 현재가 불행한 것이다. 불행은 우리를 슬프게도도 하지만 기회가 되기도 한다. 누가 따뜻하고 안락하고 배부른 곳을 떠나 불안하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길을 가고 싶어 하겠는가? 결국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린 이들만 새로운 길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래도 그것이 어디랴..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다.

 

9월의 첫날이다. 그리고 9월은 가을이다. 이 책은 이런 정량적으로 정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우리가 시계를 만들어 시계의 지침대로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9월은 가을이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누군가 나에게 주입해놨다. 그리고 이런 주입은 나름 괜찮다.

 

어제 많은 비가 오고 오늘 아침 유난히 신선한 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9월이어서 가을이 아니고 이 차가운 아침 공기가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럴 때 따뜻한 차 한잔과 이런 책 한 권 읽는 정도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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