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 - 셸리 케이건

아이루다 2014. 3. 21. 17:10

 

글을 쓰기 위해 카테고리를 선택했더니 마지막으로 책에 관한 글을 쓴 것이 작년 9월이다. 책 안 읽은지가 벌써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나버린 셈이다. 그렇다고 아예 안본 건 아니지만 보다가 말거나 흥미 삼아 소설책  정도나 읽은 기억뿐이다.뭐 이래저래 이런 사태에 대해서 스스로 핑계는 많지만 결론은 책 읽기에 매우 게을러졌다는 점이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괜찮은 책 중에 하나였다. 셸리 케이건이란 분이 쓴 이 죽음에 대한 책. 워낙 죽음을 다룬 책들이 희소한 탓에 우연히 접하게 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이 책은 좀 어렵다. 일단 이론과 논리로만 거의 글을 풀어가는 형태라서 - 물론 예도 많이 들긴 했다 - 이해하는데 논리적 추론과 사고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헷갈리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거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정리해서 글을 쓸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더욱 더 그것이 심하다.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함께 해서 그렇다.


후기를 쓸 계획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 같다. 일단 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렇고 또한 자꾸 내 생각이 책을 읽는 중 중첩된다. 이것은 책을 읽는데 있어서 모두 잡생각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사설이 길었는데 아무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의 시작과 함께 한 절반 분량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논리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좀 지루한 부분이었는데, 이 저자인 분이 예일대 교수이고 또한 이 책의 내용 자체가 그 분이 강의시간에 한 강의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이해는 한다. 학생들에게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 란 식으로 동양식 선문답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죽은 후에 나는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죽음이란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마무리 한다. 물론 이 교수님은 종교나 혹은 우리가 흔히 믿는 귀신이나 영혼의 상태를 부정하기 때문에 죽음은 그냥 그 자체로 끝이다 라고 결론 낸다. 이 부분은 나의 개인적인 의견과 완전히 일치한다. 단지 나처럼 혼자서 생각하고 블로그 글을 쓰는 분이 아니니 매우 복잡한 이론과 단계별 설명을 통해 이것을 이해시키려고 애쓰는데, 결국 나에겐 별 필요 없는 내용이긴 했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이원론과 같은 이론에서 우리가 정신과 육체로 분리되어 있다고 하고 이 정신이 육체와는 완전히 분리된 영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지만 않는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혼란이 올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육체론자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영혼은 빼 놓고 생각하더라도 정신과 육체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버릇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우리의 정신은 육체 활동의 결과이지 결코 육체를 통제하거나 혹은 분리된 일종의 별도의 존재란 증거는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추가적인 의견을 더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신적으로 의식 세계의 주체로서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인식하는 의식 세계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거대한 무의식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운전을 하는 과정을 보면 눈, 귀로 들어오는 각종 정보를 의식 세계 내에서 판단하려고 하면 정말로 뇌가 터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순간마다 정말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그것을 판단해 내야 하는데 그렇게 계산된 반응속도란 너무도 느려서 만약 정말로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면 차 사고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이런 무의식의 영역이 있기에 우린 걸으면서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뇌의 무의식에 의해 거의 완벽히 통제를 받는데 그 통제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생존인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뇌의 무의식 세계가 내린 결정을 효과적으로 해결해내려는 우리의 노력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라고 믿는 그 모든 것은 실제로는 거대한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은 무의식 세계에서 내려진 결정을 의식 세계에서 경험과 지식을 근거로 계산하여 그것의 목표를 도달하는 과정이다. 이때 스스로 잘 했다고 판단이 되면 뇌는 우리에게 행복 호르몬을 선물로 내려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린 평생 이것을 받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행복을 느끼는 주체가 그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그 자신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정신 세계라고 느끼는 그 자신이 아닌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조절도 불가능한 무의식 세계의 손에 달려 있다.

 

이런 원리는 우리가 쓰는 컴퓨터를 통해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엔 수 많은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다. 우선 시스템을 운영하게 해주는 OS라고 불리우는 윈도우즈가 있고 그 위로 오피스, 한글, 포토샵, 계산기, 메모장, 미디어 플레이어, 알집, V3, 각종 게임 등등 사람에 따라 정말로 다른 종류의 많은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할 땐 보통 한가지 프로그램만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수 많은 중요 프로세스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있어야만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기능을 제대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필수 프로그램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일명 '백그라운드' 에서 존재감 없이 실행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에서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도 쉽게 답이 나오는 질문이다. 죽음은 생각의 주체인 뇌로 더 이상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전원이 꺼진 상태와 같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컴퓨터는 얼마든지 전원을 넣었다가 껐다가가 가능하지만 우리가 뇌에게 주는 에너지는 중단되는 순간 세포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그냥 끝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책은 나의 근거 없는 주장에 비해서 훨씬 논리 정연하게 이 부분을 다뤘으니 기회가 되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책의 중반쯤부터는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죽음이 나쁜 것인지 나쁘다면 왜 나쁜지를 또한 자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교수님의 의견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평소에 생각해왔던 많은 것들이 책 내용과 일치함을 느꼈고 특히 죽음의 반대로 여겨지는 영생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읽을 땐 정말로 동지를 만난 듯 기쁘기도 했다. 정말로 누군가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같이 하고 있어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살아 생전에 실제로 볼 일도 그리고 만나봐야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기 힘들겠지만 그냥 이렇게 아는 사람을 만난듯 반가움과 밑도 끝도 없는 친밀도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 책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이 교수님의 한계이기도 한데 결국 삶이란 것은 소중하다는 인간 본질적 한계이다. 사는 것이 좋다는 낙관주의자나 사는 것이 고통이라는 비관주의자나 삶 자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다고 말하는 일명 가치적 그릇 이론 모두 인간이라는 것 자체를 기본적으로 가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수는 자신이 동양에서 태어나 삶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동양철학보다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서양적 사고방식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라고 설명을 하긴 했으나 이 설명도 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는 간다. 왜냐하면 이 교수님이라면 객관적으로 그 삶이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교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의식의 주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반론이 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 중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죽음의 과정이 아프거나 혹은 그냥 죽음이 싫은 사람도 꽤 된다. 물론 나의 경우 이 교수님처럼 의식 주체로써의 내가 사라짐이 두려운 사람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이 둘의 차이는 삶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한다. 그냥 태어났으니 살다가 죽는 사람이라면 동물적인 본능적 죽음 두려움을 갖는 반면 자기 인식을 많이 하고 인간으로써 가치 있는 일을 하고픈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존재의 사라짐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이 가장 극대화 된 사람은 죽음 후 자신의 이름이나 업적이 남겨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이 교수님도 그래서 책의 중간에 스스로 그것에 대한 경계심을 설명해 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순수한 의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나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 본 적도 있고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꽤 된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죽음을 바라보고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욱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남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한계가 드러난다.


결국 이 책엔 '왜' 가 빠져있다. 즉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이 많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연하기도하다. 이 책은 삶을 다룬게 아니고 죽음을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세상은 모두 방법론을 찾는데 만 온통 모든 생각이 집중되고 있어서 정작 그것을 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왜'는 늘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사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사는지 만 백날 고민해봐야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있겠는가? 물론 어떻게 사는지가 결정되면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평생을 걸쳐 배우는 것이 바로 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 덕분인지 세상은 이제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모두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남이 잘하는 듯 보이면 극단의 쏠림이 나타난다. 그래서 누군가 잘 만들어 놓은 노하우는 비싼 값으로 거래되기도 하고 많은 이들의 부러움과 무조건적인 모방을 이끌어 낸다.


개인적으로 바램이 있다면 우리가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다. 서점의 책들은 모두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만 써 놓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떻게 의 목표가 바로 행복이라고 끝없이 주입하고 있다. 하지만 늘 말하듯 행복은 결과이지 이유도 아니고 목표가 될 수도 없다.


혹시 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생각을 안 해본 분이나 혹은 죽음을 마냥 두렵게만 느끼는 분이 있다면 한번쯤 정독을 해도 충분히 좋은 책이다. 읽을만한 책이 거의 없는 요즘의 서점에서 또 이만한 책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좋은 책들은 책을 읽는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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