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한 삶, 불행하지 않는 삶

아이루다 2014. 12. 20. 19:25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목표를 하나쯤은 가지게 된다. 물론 어른이 된 후 포기해서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지만,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그 자신의 처지와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이든 아니면 나름대로 합당하든 간에 각자 하나쯤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나름대로의 황당하거나 어처구니 없는 꿈을 갖는 이유는 인식의 한계로 인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느냐 여부보다는 그냥 그 꿈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이리라. 말 그대로 그 한계점을 잘 모르니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냥 꿈인데 무엇을 상상하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우리는 그 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알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꿈을 점차 더 현실적인 것으로 바꾸게 된다. 그래서 20대 초반만 되도 꿈이 대통령에서 공무원으로, 연예인에서 안정적인 월급이 나오는 회사원으로 바뀌게 된다.
 
심지어 30대가 넘어가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꿈이 되는 사람들도 많다.
 
아무튼 어떤 과정을 거쳤든지 간에 상관없이, 우리 인간은 어느 시절이든, 어떤 경우이든, 어떤 종류이든 간에 자신만의 목표를 하나쯤을 가져 본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대부분이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가진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현실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진행된 결과인데, 노력, 열정, 성격, 능력, 상황, 현실, 운 등등이 그 이유로 작용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면 꿈을 이루는 것은 거의 힘들다.
 
그래서 우린 결국 자신의 꿈이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도 모르게 꿈이나 목표를 수정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너무 과하게 변질되는 경우가 생긴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모두 1등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에서 보면 그렇지 않는 듯 보인다. 공부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성적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아이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도 처음에 그렇지 않았다. 이들 역시도 1등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만 것이다.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든 간에 1등이란 등수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잘남을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더 잘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누가 1등을 하고 싶지 않아 할 것인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치열한 경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보통 그렇게까지 해서 일등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과 해도 안 되는 현실로 인해 포기를 한다.
 
아무튼 누구나 1등을 원하지만, 결국 1등은 단 한 명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은 원래 가졌던 목표를 자연스럽게 변형 시킨다. 물론 2등과 3등은 그 목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1등은 그리 큰 차이가 아니다. 하지만 중간쯤 등수까지 내려가면 급격히 변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목표는 이제 중간이라도 가는 것이 된다.
 
이것은 아이 뿐만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수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이기도 하다. 분명히 자신의 아이가 공부에 큰 자질이 없음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마련한 돈을 가지고 아이를 학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이때 부모의 마음은 아이가 1등을 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중간 이상을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또한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 심리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보다는, 아이에게 뭔가 못해 준 것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학원에 보내고,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이라면 능력 범위 내에서 최대한 해주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이 스마트 폰을 사면 자신의 아이도 사주고, 다른 아이들이 비싼 패딩을 사면 자신의 아이에게도 사준다.
 
딴 건 몰라도 돈에 관해서는 가능하면 남들만큼 해주려고 무척 노력한다. 이때 부모는 아이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아이에게 후회가 남지 않고 또한 아이가 나중에 키워준 부모를 원망하지 않길 바라는 심정으로 아이를 키운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부모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역할을 다하는 것만으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줬다고 믿는다. 이것이 가진 내면적 의미는 바로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심정이 아니라, 아이가 불행하지 않게 살길 바라는 것과 같다.
 
원래 행복은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 하려고 살지만, 정작 제대로 행복한 사람이 드문 세상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부모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산다. 그리고 자식에게도 그렇게 대한다. 배운 적이 없기에 아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지를 가르치지 못한다. 오직 아는 것이라곤 어떻게 하면 불행을 피할 수 있는 지만을 안다.
 
물론 부모 역시도 원래는 행복 하려고 했다.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는 인간의 공통적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겁이 나서 목표를 변질시켜버렸다. 행복 하려고 살기보다는 불행하지 않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행복 하려고 사는 것과 불행하지 않으려고 사는 것은 비슷하게 들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것은 마치 1등을 하려고 공부를 하는 것과 중간이라도 가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1등을 목표로 한 아이는, 1등이 될 때까지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말로 명확한 목표이다. 하지만 중간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인 아이는 40명 중 15등을 했거나 25등을 했거나 큰 상관이 없다. 실제로 30등을 해도 꼴등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꼴등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까지 생겨난다.
 
행복 하려고 사는 것은 확실한 목표이다. 즉, 스스로 끝없이 행복한지에 대해서 되묻게 된다. 그래서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행복을 찾아 과감히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현재 자신이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가늠하기가 너무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땐 행복하기도 하고 어떤 땐 불행하기도 하니 더하고 빼고 나면 도대체 정말로 자신이 결론적으로 행복한지를 판단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역시 진정한 목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행복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들이 행복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단지,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상황들로 인해서 자신의 행복 목표를 낮춘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안전하게 사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역시도 최종적으로는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신도 스스로는 불행하지 않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행복함을 위해서 자신이 불행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으려고 사는 삶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 각각은 모두 꽤나 큰 문제이다.
 
일단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행복 하려는 삶은 단지 행복한 것만 쳐다보고 살면 된다. 그리고 행복 하려고 나아가다가 걸리적거리는 불행의 요소들은 헤쳐나가든지 돌아가든지 한다. 그래서 목표가 단순하다. 아이들의 경우, 1등을 하는 아이는 머리 속이 단순하다. 왜냐하면 공부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는 머리 속이 복잡해지게 된다.
 
공부 이외의 것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는 여기에서 목표를 찾지 못한다. 그것을 도와주는 학교 시스템도 없으며 부모들은 오직 공부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불행하지 않으려고 사는 삶은 머리가 아주 복잡하다. 행복 하려고 사는 사람과는 달리 불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무한대의 가지 수이다. 단지 대부분은 가능성이 낮을 뿐이다.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여행지에 가서 뭘 하고 놀지만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경로로 이동을 할지, 숙소는 괜찮을지, 근처에 맛집이라고 알려진 곳은 어딘지 알아서 반드시 식사를 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지, 어디 어디를 봐야 그곳에 놀러 갔다고 말할 정도가 될지, 사진은 또 어디 어디에서 사진을 반드시 찍어야 나중에 그 사진으로 다른 이들에게 자랑을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머리 속에는 자신이 세운 모든 최적의 상황을 그려놓고는 그것을 제대로 해내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안되면 마음 속의 행복함에 상처가 생긴다. 그리고 자신을 자책하거나 같이 간 동료의 무심함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냥 놀러 가는 것 자체가 행복한 사람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상황이 안되면 도중에 돌아오더라도 큰 상관이 없다. 산에 가도 꼭 정상에 갈 필요가 없다. 힘들면 중간에 돌아온다. 또한 어딘가 끝내주는 맛난 식당을 꼭 가지 않아도 좋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맛있으면 그것이 행복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필요도 없다. 아니 찍고 싶지만 까먹고 만다.
 
불행하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에 대한 후회에 대해 늘 걱정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행을 갈 때의 경우라면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A 코스로 운전을 할지, B 코스로 운전을 할지 모두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산이나 바다 중에서 덜 후회 할 곳을 찾는다. 코스 역시도 자신이 후회하지 않을 코스를 찾는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이 늘 맞지는 않는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운이 좋다면 자신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 되어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지 못해서 후회가 생긴다.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불행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자꾸 벌어지니 결국엔 본능적으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선택을 따라 한다. 즉, 대세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유행을 따른다.
 
남들이 산으로 가면 산으로 가고 남들이 A 코스로 가면 자신도 A 코스로 간다. 그래야 설령 그 선택이 잘못되어서 후회가 되더라도 그 자신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합리화를 하기가 쉽다. 또한 잘못 선택한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어떻게든 다른 선택의 단점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실제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그 많은 가치들을 모두 다 무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모든 일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 설령 남을 돕는 착한 일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옛날 이야기에 구두쇠가 자신의 자식에게 밥을 먹인 사람에게 먹여서 위장을 늘어나게 했다고 따지는 이야기도 이것의 예가 된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평생에 걸쳐 단점을 모은다. 이것은 다수의 불행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계속 전파되고 공유된다. 그래서 꽤나 많은 시간을 살아오면 결국엔 자신의 삶 이외의 형태에 대해서 모두 단점을 파악한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할 때 끝없이 견제를 하는 역할로 작동한다. 물론 이들의 태도는 분명히 그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의 형식을 띤다. 하지만 그 내부에 숨겨진 심리는 바로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다급한 질투가 숨겨져 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길로 가서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아버리면, 도대체 자신이 믿고 있는 행복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단 말인가? 그러니까 결국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린다.
 
그래서 40대가 되면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한다고 서로 수근 거리고, 시골에 가서 집을 짓고 살겠다는 사람에게 나중에 그 집이 팔고 싶어도 안 팔릴 것이라고 걱정해준다. 또한 치안이 안되어서 불안할 것이며, 교통이 불편하거나 자녀 교육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자신 일처럼 생각해 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바로 불행하지 않으려고 살아 온 그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는 목적일 뿐이다. 주변의 누구나  불행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면서 자신처럼 그것의 수준에 만족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정말로 행복해 버리게 되면, 그 행복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이 졸지에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찌질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으며 반드시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고,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을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다수의 선택을 따라 한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삶이지만, 그것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그나마 자신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려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합리화 하는 것 까지는 괜찮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는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바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무시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설득하려 드는 태도이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에 가장 크게 만연된 분위기이다.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아이를 낳은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결혼을 한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의 미래에 닥칠 쓸쓸함을 걱정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구속에 대해 지적한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본다. 남을 볼 겨를이 없다. 그리고 선택을 한 후에도 후회가 없다. 만약 선택한 후 행복하지 않다면 다시 자신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른 선택을 하면 된다.
 
그래서 남들의 불행함에 대해 알 필요도 없다.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 들어도 기억할 필요도 없다. 걱정해주지도 않는다. 아예 신경도 안 쓰인다. 그냥 자신의 눈에는 자신의 삶만 보인다. 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간편한 삶이란 말인가.
 
지금 노인 세대는 먹고 사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먹고만 살면 된 세대이다. 지금 40, 50대는 그런 부모들에게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다음 세대를 키울 때 행복하게 사는 삶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다음 세대가 태어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인 20,30대 역시도 또한 행복한 삶이 아닌, 불행하지 않게 사는 삶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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