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자기 삶에 대한 확신

아이루다 2014. 12. 16. 08:39

 
흔히 팔랑귀 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자신의 선택이 자주 바뀌는 사람들을 칭하는 용어인데, 실제로 우리 인간은 대부분 팔랑귀이긴 하다. 그리고 우리가 대부분 팔랑귀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떤 것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와 경험이 없어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잘 알지 못하거나 해보지 않은 일을 할 때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처음 가는 길을 갈 때나 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 할 때,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이런 느낌은 인간이라면 거의 누구나 가진다. 물론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적응력이 남달라서 무엇을 하든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이들은 매우 소수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더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이미 경험한 사람이나 이미 그것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참고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소위 전문가들일 수 있고, 주변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다. 이들은 보통 꽤나 강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그때마다 정보와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제대로 된 판단 능력이 없기에 이런 사람들의 말에 자주 흔들리게 된다.
 
문제는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인 단 한 명이 아니며 이들 의견이 모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은 거의 대립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각자 확신이 있다. 그러니까 모두 자신이 맞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중 정답은 하나일 뿐이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정말로 오래된 전문가 의견 중에서 하루에 과연 몇 끼를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립이 있다. 어떤 이들은 하루에 두 끼, 어떤 이들은 하루에 세끼, 어떤 이들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어야 한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자주 여러 번 먹는 것이 좋고, 어떤 이들은 규칙적으로 최소한 적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로 옳은지는 알 길이 없다.
 
자연계에서 생명체들은 그냥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는다. 이들은 잘못하면 일주일이나 이주일 이상 굶을 수도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생기면 먹을 수 있을 만큼 먹는다. 그리고 초식동물의 경우엔 매일 12시간 이상을 먹는다. 이들은 이렇게 쉼 없이 먹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왜 유독이 인간만은 하루에 몇 끼를 먹어야 하는 것으로 다툼을 벌일까? 아마도 이 논란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박사 학위 논문일지도 모른다. 영양학이나 식품학 혹은 의학 관련 논문을 발표한 사람들이 자신이 조사한 것을 토대로 그 유효성을 주장한 것이 일반인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출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 인간은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하루에 몇 끼를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쟁을 할 것이고, 사람들은 매번 달라지는 논쟁의 내용을 가지고 혼란스러워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위의 예를 연장하자면, 매일 점심, 저녁 두 끼만을 먹던 사람이 평소 속이 매우 안 좋았는데, 어느 날 TV에 나온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했더니 속이 거북한 것이 사라지고 몸에 활력이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은 하루에 몇 끼를 먹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젠 팔랑귀가 아니다. 그는 두 끼와 세 끼 사이에서 확실하게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의 결과로 인해서 이젠 하루 세 끼 먹는 것에 대한 전도사가 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평생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고, 누군가 하루에 두 끼 먹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만 꺼내면, 마치 자신의 권위와 경험에 도전했다는 듯 화를 내면서 반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특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거나 팔랑귀, 둘 중 하나의 상태로만 존재한다.
 
물론 확신을 가진 사람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스스로만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그나마 확신에 대한 태도는 앞의 것이 낫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확신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정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엔 기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이 나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각자 사람마다, 문화마다, 먹을 것의 종류마다, 체질마다, 체중이나 성별 마다, 하는 일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우린 자신의 경험을 확대시켜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식으로 절대화 시키는데 익숙하다. 특히나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믿을만한 증거로 여기는데, 경험을 통한 믿음은 다른 팔랑귀들을 설득하는데 매우 유효하기 때문에 추가적으로도 좋다.

 

우린 누구나 직접 경험했다는 것을 꽤나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어린 시절에 우연히 접한 어떤 사람의 확신일 수 있고, 어떤 것들은 어른이 된 후, 우연히 겪은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따. 실제로는 대부분이 이것들 중 하나가 된다. 우리는 다른 이의 확신 있는 말과 경험을 통해서 혹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통해 확신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어떤 경로를 통해 확신이 생겼든지 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한 번 확신을 가진 것에 대해서 좀처럼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이것이 확신이 가진 최대의 단점이다.
 
물론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팔랑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하지만 확신을 갖게 된 우리는 이젠 본격적으로 배타적으로 변한다. 즉, 어떤 하나를 옳은 것으로 선택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거짓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그냥 혼자만의 진실이라고 믿고 산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서로 만나서 자신의 확신에 대해 떠든다. 그러다 보니, 늘 서로 다른 확신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확신이 왜 더 옳은지를 경쟁하다가 심하면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주제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로가 다르면 단지 옳고 그름만을 증명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북극곰이 더 세냐 호랑이가 더 세냐 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싸운다. 그것도 심각하게.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싸우는 경우까지는 드물지만, 끝없이 다른 생각을 주고 받는 경우가 많다. 즉, 대 놓고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진 않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은연 중에 상대 의견을 무시하거나 반박하는 일을 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싸움이지만, 각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낀 아직 팔랑귀인 상태로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서로 다른 의견 충돌의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끝없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확장되면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으로 변한다. 이것은 좀 더 심각해지는데, 왜냐하면 삶의 가치에 대한 부분으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목표나 가치를 결정하고 난 후, 그것을 평생 추구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옳다고 강조하면서 살아간다.
 
종교를 결정한 사람은 자신과 중요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자신이 믿는 종교를 추천한다. 운동을 좋아하게 된 사람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특정한 운동을 권유하면서 그것이 너무도 좋은 것이라고 추천한다. 특별한 취미 생활을 하게 된 사람은 그 취미 생활을 통해 얻는 즐거움이 너무 커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추천한다.
 
술을 잘 먹는 사람은 술 자리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강조한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전국의 맛 집을 찾아 다니는 것이야 말고 최고의 행복이라고 강조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로 많은 곳을 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야 말고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강조한다.
 
책을 많이 읽은 이들은 책을, 친구를 많이 사귀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진정한 우정을 나눌 상대를 만난 사람은 우정을, 자신이 믿는 신념이 생긴 사람은 그 신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시작은 팔랑귀였다. 그 누구도 태어남과 동시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것들 대부분은 모두 우연이 자라온 환경을 통해 접하게 된 것들일 뿐이다. 그것은 집안, 교육, 체질, 타고난 능력, 접한 사람들에 의해서 순전히 우연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한번이라도 확신을 갖게 된 것들에 대해서는 무척 강한 신뢰를 보낸다.
 
그렇다고 해서 확신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확신은 우리가 사는 삶을 단순화 시켜준다. 여러 가지에 대해 확신이 많은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뭔가를 선택할 때 거침이 없다. 그래서 빠르고 단순하게 결정을 해낸다. 이것은 큰 장점이 된다. 우리는 결정을 잘 못하는 사람도 싫어한다. 심지어 결정 장애라는 말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확신은 명백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다른 확신과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신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고정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냥 매일 반복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제로 매일 조금씩 바뀐다. 사는 동안 내내 동쪽에서 뜬 태양은 50억년 후가 되면 뜨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거대한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하루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그 변화가 너무 미미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지구도 매일 바뀌고 우리 자신도 매일 바뀐다. 모든 것이 매일 매초마다 바뀐다. 그런데 우린 확신을 통해 어떤 것들을 단단히 고정시킨다. 주변 환경이 매일 바뀌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상황에 얻은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고정시키고는 이젠 그 어떤 변화도 다 거부한다.
 
하루에 한 끼를 먹든, 세 끼를 먹든, 다섯 끼를 먹든 상관없이, 현재 자신의 삶에 가장 알맞게 맞추면 된다. 한 끼를 먹었더니 배가 고프면 두 끼를 먹고 그래도 배고프면 세 끼를 먹으면 된다. 세 끼를 먹었더니 배가 너무 더부룩하면 두 끼 반 정도로 줄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요즘 특히나 육체적 움직임이 많다면 끼니 수를 늘려야 하고, 반대로 정적으로 사는 경우라면 끼니 수를 줄여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제의 진실은 오늘이 오면 거짓이 될 수 있다. 또한 내일도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본질이면서 단 하나의 진실을 찾자면 변화뿐이다.
 
우리가 살면서 팔랑귀인 상태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정보가 부족하면 결국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벗어났을 때, 우린 확신이 아닌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내가 옳을 수 있다면 남도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모두 각자가 옳을 수 있다. 즉, 옳다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옳음을 그 안으로 갈무리 할 수 있다면, 확신은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된다. 즉,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이야기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의 확신이 그리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못 믿으니,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일수록 실제로 그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의견을 만나면 그렇게 강한 충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자신의 불안한 확신이 쉽게 깨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확신이 어떤 단점을 가졌던 간에 상관없이 우린 확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래서 정말로 제대로 된 단 하나의 확신을 가지고 싶다면 이것을 가져야 한다.
 
'어떤 확신도 절대적이지 못하다' 라는 확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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