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스로 만든 벽

아이루다 2014. 12. 6. 09:32

 
인간이 집을 지을 때, 대부분 벽을 만든다. 아마도 열대 우림 지역처럼 일년 내내 춥지 않은 곳은, 그 벽을 단단히 만들 필요도 없고 공기가 잘 통하는 것이 더 낫기에 얼기설기 한 형태의 벽을 만들지 모르겠지만, 보통 인간이 사는 집의 벽은 단단하고 외부로부터 막혀있다.
 
동화 속 이야기 중 하나인 아기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 세 마리의 형제 돼지가 지은 집의 차이도 이 벽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막내가 벽돌로 지은 집만이 유일하게 늑대에 의해 부서지지 않아서 그들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아기 돼지 형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시피, 벽은 우리를 지켜주는 경계선이다. 벽은 우리 각자가 사는 곳이라는 공간을 규정해주는 존재이고, 그 존재로 인해서 우린 안과 밖에 구분되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능이 적절하게 작동할 때, 벽은 안전함을 약속해준다. 결국 벽은 우리가 외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또한 우리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심리적인 분야에서도 벽이 존재한다. 우리는 외부와 벽을 쌓고, 벽을 허물고, 가끔은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때 이 벽은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힘이 되어 준다.
 
그런데 이런 벽들은 두 가지의 관점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일단 첫 번째로 벽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벽은 앞에서 말한 우리를 지켜주는 구조물이다. 벽은 우리가 사는 공간을 외부에 존재하는 위험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내부에 있는 정보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해준다. 벽은 시각, 촉각, 미각, 청각, 후각을 차단한다.
 
이것은 비단 물리적 벽의 역할만이 아니다. 심리적 벽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서 타인과 자신을 경계 짓고 자신의 존재적 본질을 보호한다. 보통 인간은 자신만의 삶의 궤적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벽을 가지고 외부 사람에 대한 접근을 차단 하거나, 경계 하거나, 열어 주기도 한다.
 
벽의 두 번째 본질은 외부와의 단절이다. 하지만 이것은 원하지 않는 효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린 원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벽을 만들었는데, 그 벽이 뜻밖에도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켜 버리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벽을 만들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원한 기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벽은 의도하지 않게 벽안에 있는 존재를 외부로부터 분리시킨다. 우리는 벽을 통해서 다른 이와의 접촉을 막을 수 있지만, 거꾸로 이 현상은 벽안에 있는 '나'의 존재와 외부에 있는 존재와의 연결 가능성을 현저하게 낮춘다.
 
심리적 벽은 더욱 더 이런 역할을 심하게 한다. 그나마 일반적으로 물리적 벽은 보통은 어딘가에 외부와 통하는 문을 만들어 둔다. 그래서 적어도 누군가가 와서 초인종을 누르면 얼굴을 대면하고 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심리적 벽은 그런 명확한 구조물로써 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설령 그 문이 있다고 해도 그 스스로도 그 문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접근을 자동으로 막아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열어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너무도 견고하게 만들어 진 벽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열 방법을 몰라서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벽 앞에 서 있던 누군가는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다가, 상대가 자신을 들여보낼 마음이 없다고 지레짐작하고는 떠나버리고 만다. 그렇게 해서 상처 받은 사람은 원래는 벽을 좀 허물어야 하지만, 상처는 나아가면서 벽을 더욱 높고 두껍게 만들 뿐이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서 벽은 물리적 벽과 심리적 벽 두 가지가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 두 개의 벽 이외에 하나의 벽을 더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말하고 싶은 벽은 물리적 벽도 아니고 심리적 벽도 아닌, 세 번째로 존재하는 삶의 벽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세 번째 벽은 삶을 살아가는 패턴과 관련이 된다. 그것은 집의 벽처럼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만들어진 심리적인 것도 아니지만, 오랜 삶을 통해 길들여진 버릇과 자신도 모르게 고집스럽게 변한 생각들이 마구 혼합되어서 만들어 진다.
 
이 벽은 그 존재를 알아채기도 힘들만큼 미묘하고 또한 의도한 것들이 아니라서 대부분이 그 벽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사람들은 이 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인식되지 않는 특징으로 인해서 우린 그 벽이 가진 장점만을 이해할 뿐, 단점을 살펴보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매일 보는 하늘과 같다. 하늘은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를 우주로부터 보호한다. 하늘은 실제로 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벽과 같다. 하지만 하늘은 그냥 늘 존재했기에 우리는 그것의 단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이 말은 실제로 웃긴다. 어떻게 하늘에 대한 단점을 언급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삶의 벽이 그렇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은 매일 일어나는 현상이다. 매일 아침 해가 떠서 하늘이 보이듯,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하루의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우린 그것이 명백한 벽이지만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그것이 견고해질수록 그 자신이 고집불통이 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일단 자신의 삶을 두터운 벽으로 둘러 싼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힘들여 쌓은 벽 안에 들어간 채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세상과의 교류를 해야 하기에 조금만 창을 만들어 둔다.

 

그리고는 두껍게 만든 벽을 사방에 둘러 치고 언제나 그 안에 앉아 스스로 만든 조그만 창을 통해서만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심지어는 그 창문에 온갖 종류의 색을 칠해 놓고는 자신이 칠한 색으로만 세상이 보인다고 깊이 한탄하기도 한다.
 
그 색이 파란 색이면 세상은 늘 파랗고, 그 색이 빨간 색이면 세상은 늘 빨갛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본 다른 이들이 이제는 그만 그런 창으로만 세상을 보려 하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진짜 세상을 보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에 걸쳐 만든 자신만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그 자리를 절대적으로 고수하면서 이 자리야말로 최고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리라고 우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가끔 세상의 소식지가 전달되어 온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이 작은 창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시선을 본 또다른 이가 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래서 그는 가끔 다른 이들의 조언 때문에 약간이라도 흔들렸던 마음을 다시 다잡고 그 자리를 더욱 더 견고하게 고수하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벽을 우리는 사상이라고 부르고, 신념이라고 부르며, 종교라고 칭한다.
 
어떤 이들은 운 좋게 투명하고 큰 유리 창을 가진 자리를 잡은 채, 앞 집 사람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어서 자신의 모습을 제 삼자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어떤 사람은 겨우 손바닥 만한 창문에 짙은 회색의 색이 발라져 있어서 세상이 늘 칙칙한 회색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그 자리가 세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옳게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결코 우리는 세상을 '객관적' 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젊은 시절엔 바빠서 그 자리가 있어도 자주 앉지를 못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돌아다니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가 자라면서 봐왔던 부모들의 삶처럼 그 자신도 부모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점점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단순해지고 명료해져서 갈등과 고민이 사라짐을 느낀다.
 
이것이 이 벽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긴 하다. 또한 그렇게 고정되고 명확해진 벽을 통해서 우리는 흔들림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추진하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고정화 시키는 사람들도, 그 고정된 세상을 깨뜨리는 것도 모두 그 창을 통해 보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벽에 편견, 아집, 상식, 관념, 믿음, 추종, 우월감, 열등감, 정의로움, 선입견 등이 달라 붙이면 붙을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지저분해지고 스스로 믿고 있는 일관성조차도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그 벽은 더욱 견고해져 간다. 그것의 효과로 인해 우리는 그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마치 그 자신이 이타적 사고 방식을 가진 존재이냥 착각한다.
 
이 벽은 삶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자신만의 철학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항상성을 보장해주지만 또한 이 벽은 삶을 견고하고 무겁게 만들어서 좀처럼 다른 이들의 생각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어떤 생각지 못한 변화가 생겼을 때, 그것을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해보지도 않고 거부한다. 또한 모든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한다.
 
그러다가 자신처럼 강하고 두꺼운 벽을 가졌지만, 전혀 다른 모습의 창으로 밖을 보고 있는 사람을 만날라 치면,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서 도저히 그 자리에서 폭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 우리는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게 되고 그때 입은 상처는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모두 끌어다가 치유를 하게 됨으로써 더욱 벽만을 두껍게 하고 작은 창은 더욱 좁아지는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는 다음 전투를 대비해서 더욱 강하고 견고한 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이젠 그 벽의 노예가 되어서 남은 삶을 모두 그 벽을 견고하게 만다는 것에 바친다.
 
그리고 그것을 삶의 목적, 의지, 결말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결국 죽는 순간이 오면, 그 벽이 결국 자신을 망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벽이 삶에서 그 자신이 느끼고 이해하고 행복했어야 할 그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고 죽음은 목전에 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떠나게 된다. 물론 마지막까지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많은 이들은 자신은 그런 벽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현재의 자신만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데 힘을 쓴다. 벽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결심하고 하는 일이 바로 죽음을 목격한 이들의 벽과는 차원이 다르고 그 종류가 다르다고 믿는, 하지만 결국 같은 종류의 벽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벽을 다른 이름으로 칭하면서 그것이 그들의 벽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그 이름은 사상, 신념, 종교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의 벽이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런 것들을 상식, 이성, 현실 등의 관념을 통해 투영한다.
 
즉,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나, 어떤 식으로든 정의된 삶의 고유한 패턴에 대해서 인지하면서 그것에 맞춰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며, 집을 사고, 여행을 가며, 캠핑을 가고, 운동을 하고, 등산을 한다.
 
이런 우리들 대부분이 하는 삶의 패턴은 모두 정형화 되고 고정화되어 있어서 마치 이것이 벽이 아닌 듯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기에 그것이 사상, 신념, 종교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어떻게 결혼이 신념이 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사상이 되며, 집을 사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것들은 선택 가능한 것들이 아닌, 반드시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인 것이지, 결코 머리 속에서만 정의된 고정 관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모두 사람이 비슷한 형태의 벽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벽이 아닌, 원래 우리의 일부인 냥 믿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이가 옷을 입고 거리를 걷기 때문에 우리는 옷을 입고 밖에 나가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가 입은 옷도 일종의 물리적 벽이다. 하지만 옷을 벽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과정과 변화와 충격을 통해 만들어진 만들어진 벽이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가진 벽은 견고해질수록 더욱 안정화되지만, 반면에 아집에 커지고 고집만 세지는 현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심해져서 결국엔 더욱 더 견고해지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이것을 경계하지 않고 살게 되면, 우리가 흔히 보는 거의 모든 노인들의 모습이 바로 젊은이들의 미래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을 경계한다는 것은 이 벽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실제로 그 인식부터 그리 쉽지가 않다.
 
그나마 많은 실제적 경험과 책을 통한 간접적 경험은 이 벽의 유연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기회조차도 점점 더 멀리하고 있다.
 
이것이 이 땅에 현명 하다는 뜻을 지닌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들 보다 그냥 나이만 많이 먹은 노인의 존재가 점점 더 늘어나는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노인들의 존재는 그 후대의 삶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삶에 대한 확신  (0) 2014.12.16
행복을 찾아 떠난다  (0) 2014.12.07
완벽한 여자  (0) 2014.11.30
인터스텔라, 상대성이론, 감상문  (1) 2014.11.29
정보의 역설  (0) 201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