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을 찾아 떠난다

아이루다 2014. 12. 7. 06:49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다년간 암 치료 분야에서 선두적 연구를 해 왔었던 여자 의사가 어느 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다. 즉, 의사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평범한 주부로써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는 어떤 원인 모를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그러자 그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암 치료 전문의는 워낙 그 분야에서 유명했던 그녀를 알아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진 채 오늘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를 버리고 그렇게 떠나야 했냐고 비난한다. 그러자 전직 여자 의사는 대답한다. 그 일은 해야 하긴 하지만 행복하진 않았다고. 자신은 행복하고 싶다고. 그리고 상대에게도 틀에 갇혀 있지 말라고 조언한다.
 
가끔 보는 미드 하우스에서 나온 이야기 중 하나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식으로 충분히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로 판단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길을 가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선택한 삶이 어쩌면 우리들 자신 역시도 선택했어야 하는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그렇게 해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부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현상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종류의 변화를 선택한 사람들 모두가 원래 있던 곳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고 싶어하는 그 자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왕자나 공주의 자리일 수 있고, 그것은 재벌 2세일 수 있다. 또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충분히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성공이 보장된 사람일 수 있으며, 연봉을 수십 억 받을 수 있는 운동 선수일 수 있다.
 
물론 이런 드라마틱 한 삶은, 원래 변화 후의 모습과 강력하게 대비가 될 때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다른 이들에게 회자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떤 변화든 간에, 그 변화 후의 삶을 그 변화 당사자가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때 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노숙자는 그 자신의 삶을 변화 시킬 수 없다. 미국에는 키아누 리브스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는데, 이 배우는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원래 노숙자라면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원래는 유명한 배우이지만 노숙 생활을 하기에 관심을 받는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은 행복을 찾아 떠날 수 없다. 당장 하루 놀면 배를 굶는데 무슨 행복 놀음이란 말인가? 그저 하루 먹고 사는 것만해도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많은 이들은 오늘도 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자신을 얽고 있는 수 많은 의무와 책임 그리고 불행함과 우울함에서 벗어나 좀 더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행복하게 세상을 살길 원한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바램을 힌트로 얻은 문화 창작자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드라마로 소설로 만화로 만들어서 판다. 그러면 많은 이들은 그런 창작물을 소화 하면서 그 안에 나오는 주인공을 간접 경험으로 공감하면서 자신 역시도 언젠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꾼다.
 
아름다운 공주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몽환적 꿈과 아무 걱정 없는 삶을 상상하고 정의로운 영웅이 악당을 처치하는 것을 보면서 정의롭고 용감하고 존경 받는 영웅이 되길 꿈꾼다. 자신의 꿈을 향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 역시도 꿈을 쫓아 떠나고 싶어하고, 돈이나 권력 따위가 아닌 우정과 사랑의 가치에 한 점 주저함 없이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신 역시도 그럴 수 있는 인연을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 속 우리는 결코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노숙자들에 비해서 좀 더 길게 1년 정도, 2년 정도 연장되어 있을 뿐이다.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변하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타고난 능력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도 충분히 여유롭기에 떠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날까? 왜 보통 사람들은 떠나기가 힘들고,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만이 떠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돈의 차이 때문일까?
 
이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을 인지할 수 있게 되고, 더불어서 자신이 가진 최대 단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행복함을 위해 사는 삶과 불행함을 피하기 위해 사는 삶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살면서 늘 행복한 것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보통은 자신의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산다. 우린 그래서 남들이 가는 대학교에 가고, 남들이 취직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남들이 하는 결혼을 하고, 남들이 하는 아이를 낳는다.


이것들은 모두 마치 자신이 그것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그것을 제 때 하지 못하면 불행해질까 봐 한다. 행복한 것과 불행하지 않는 것은 매우 다르다. 물론 행복하지 않은 것과 불행한 것도 매우 다르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으면 그곳을 떠난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사는 사람은 불행하면 그곳을 떠난다.
 
문제는 행복하기 위해 살아 온 사람은 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선택했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현재 상태가 자신이 가장 행복한 자리가 된다. 즉,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행복하기 위해 살기 때문에, 왠만한 불행이 찾아와도 그것을 이겨낸다. 우리는 보통 살아가면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힘든 절차를 이겨내서라도 하려고 한 경험을 한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반면에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사는 사람은 언제 불행이 닥쳐올 지 모르기에 언제나 불안해 한다. 또한 실제로 불행이 찾아오면, 그 불행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극복해내지만, 불행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은 도망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늘 발 밑이 불안한 상태가 된다.
 
이 차이를 잘 생각해보면 떠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보인다. 즉, 우리는 행복 하려고 할 때 떠날 수 있다. 반대로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는 것은 몹시 힘들다. 아니,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결국 보통 밑바닥이 불안한 일반 사람들은 떠나기가 힘들다. 반대로 이미 어느 정도 견고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들만이 떠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사람에 한해서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딘가를 향해 높게 뛰고 싶을 때, 우린 가장 먼저 자신이 딛고 있는 바닥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만약 그 바닥이 물이나 모래처럼 불안한 상태라면, 우리는 아무리 높게 뛰고 싶어도 바닥이 그것을 맞춰주지 못하면 단지 헛힘만 빼고 만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이 어디를 향해 뛸지를 파악해야 한다. 목표를 잘못 정하면 엉뚱한 곳으로 뛰고 만다.


이 표현은 바로 우리가 어딘가로 떠나고자 할 때라면, 일단 딛고 있는 바닥이 견고해서 자신이 뛸 수 있어야 할 위치에 있어야 하며, 또한 그것이 불행함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불행함을 피하기 위한 목표는 너무도 많아서 도저히 그것 중 하나를 정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서 현재 자신이 연인과 헤어져 힘들 때,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도 많다. 술을 먹거나,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하거나, 엄청나게 먹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다른 연인을 사귀거나, 운동을 시작하거나 등등.. 이것을 헤아릴 수 없다.
 
반대로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이렇게 다수의 것을 가질 수 없다. 정말로 이 중에서 하나라도 자신을 제대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로 축복 받은 인생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삶에 있어서 단 하나의 제대로 된 행복을 찾지도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운동, 여행, 결혼, 출산 등등 자신이 원하는 단 몇 가지만의 목표를 정하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수 많은 난관은 모두 극복할 수 있다. 단지 이들이 그것을 포기 할 때는 단 한 순간뿐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이다. 그들은 그때 행복을 찾아 떠나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숨겨진 우리의 본질적 차이점으로 인해서 마치 이미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변화 시킬 기회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행복하려고 산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보통 불행하지 않으려고 선택한 길에서 남들보다 우월한 능력으로 인해 성공했기 때문에 행복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어떤 의도였든 간에 행복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보통 사람들은 꿈을 찾아, 희망을 찾아, 가치를 찾아 떠나는 것을 원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의문이 생겨난다. 우린 왜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어할까? 우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정말로 우린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니면 불행함을 피하고 싶어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것은 정말로 자신을 정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떠나는 사람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떠난다고 믿는 순간 삶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먼저, 이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파랑새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파랑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찾아 헤매도 결국 파랑새는 집안에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먼 곳에 있을지도 모를 파랑새를 찾으려 애쓴다. 그리고 가끔 그 파랑새를 찾으러 떠난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떠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행복에 대한 아주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보통 현재 자신의 가진 행복이 어느 정도인지를 스스로 제대로 판단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직을 꿈꾼다. 하지만 실제로 이직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이직을 해서 또 다른 회사를 가게 되더라도, 그 회사 자신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한 이런 저런 스트레스와 불만을 해소할 방법으로 이직을 꿈꾸게 되는 것이란 점을 말해준다. 즉, 우리는 현재의 힘듦을 견디기 위해서 떠나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현실이 너무 힘들 때, '너무 힘들면 죽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진정으로 죽음을 원할 리는 없다.
 
이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회피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란 뜻이다.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전자는 행복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현재의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간에 떠날 수 있지만, 후자는 어디를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기에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허겁지겁 떠났다가 큰 낭패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정말로 운이 좋은 소수만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자신과 아주 잘 맞는 곳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불만과 스트레스가 많이 쌓은 우리들 모두는 어떤 계기를 통해 알게 된 많은 종류의 떠남을 보면서 자신도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 뭔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극되어서 왜 떠나는지, 무엇을 위해 떠날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떠난 이들의 삶을 부러워하기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단지 완전한 욕망일 뿐이다.
 
우리는 한끼 밥을 제대로 먹는 것을 행복하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한끼 밥을 먹을 때 매우 맛있는 것을 먹어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우리는 그리 편하지 않는 집에서 살더라도 그 집이 한 겨울에 따뜻하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해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리 털이나 거위 털로 만들어진 아주 멋진 옷이나 비싼 옷이 아닌 그냥 솜으로 만든 옷이라고 해도 한 겨울에 밖에 나가서 따뜻하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은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냥 단지 머리 속에서 만든 조건의 문제일 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를 자신이 가져야 할 조건인지를 가늠하면서 생겨난 어떤 의미에서 불필요한 욕망이다. 원래 우린 보통 자신은 무엇까지는 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한 많은 기준점을 만들어 두고 산다.
 
나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나라면 이 정도는 먹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면 이 정도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라면 그 정도 배우자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환경에서 지내야 하지?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우린 계속 서로를 자극한다. 그래서 현재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음에도 더 나은 것을 바라 보게끔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 불행해지면, 자신과는 다르게 행복하게 사는 이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현재 그들이 사는 모습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조언을 해준다.
 
당신들은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고 더 비싼 물건을 써야 하고 더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조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욕망을 갖도록 자극해, 자신만큼 불행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다. 실제로 우리가 남들에게 하는 대부분이 조언은 그런 목적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가 자극된 사람들은 왜 그것에 대한 욕망을 가졌는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당장 머리 속에서 느껴지는 욕망으로 인해서 자신만의 파랑새는 자신의 현재 위치가 아닌, 비싸고 넓은 집에 있고, 비싼 옷과 가방 속에 있고, 많은 돈에 있고, 희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에 있다고 믿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보편화된 가치들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거기엔 또 다른 욕망이 즐비해 있다. 해외 여행이 기다리고 있고, 비싼 자전거가 기다리고 있고 수십 만원을 하는 등산복과 등산화가 기다리고 있다. 다른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원래 우리가 느낀 욕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이것이다. 자신만 행복하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할 때, 정말로 행복하기 위해서 했는지,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했는지는 판단하긴 힘들다. 또한 본인 역시도 행복하기 위해서 했다고 믿을지는 몰라도 어쩌면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했을 수 있다는 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요즘 행복한 삶의 교과서처럼 알려지고 있는, 시골에 내려와 전원 생활을 꿈꾸는 이들 역시도 정말로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삶인지, 아니면 주변에 누군가에게 자극된 욕망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다. 우연히 어딘가를 지나가가 본 잘 지어진 집 한 채를 보고는, 그냥 나도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한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지금이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불행한 것일까를 판단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 행복하지 않은 것과 불행한 것은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완전히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찾아 떠날 수 있지만, 불행한 사람은 불행을 피해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둘에게 있어서 앞의 사람은 행복을 찾을 수 있지만, 뒤의 사람은 불행을 피하기만 할 수 있다. 하지만 떠나서 도착한 곳에서 자신도 예측 불가능 한 새로운 불행에 노출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스스로 답을 얻은 후, 파랑새가 집 안에 있는지, 아니면 멀리 유럽에 있는지, 시골에 있는 전원 주택 속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서울 도심에 살면서 그 많은 작은 공원들에 있는 가을 단풍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 본 적이 없는 이가, 내장산에 가서 단풍을 본다고 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의 나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할 수 있다.
 
간이 잘 맞게 끓인 콩나물 국과 적당히 잘 익은 김치 하나로만 먹는 밥은 그 어떤 다른 먹거리보다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 수 많은 재료가 들어간 해물 탕이나 특A+ 급이라고 자랑하는 안심 스테이크보다도 더 맛있을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맑은 하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눈을 막고, 귀를 막고, 모든 것을 막고는 머리 속에는 온통 남들이 해준 그럴듯한 행복 찾기로 가득 채우고는 자신의 발 밑에 있는 작은 귀뚜라미가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자신이 왜 행복하지 못한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하지 못한 것들을 왜 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다 고려했을 때, 자신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떠남을 계획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조심스럽게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삶은 단 한번 주어질 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또한 떠난 후에는 원래 있던 자리에 대한 단 한 점의 미련도 갖지 말아야 한다.
 
불행해서 떠나는 이들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가 불행해서 어디론가 떠난 사람은 그곳에서 새로운 불행함을 맛보는 순간, 예전 불행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현재의 불행을 더욱 더 크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은 힘든 순간이 찾아와도 자신이 선택했고, 과거는 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과 힘듦은 모두 극복할 대상이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곳에 도착해 같은 힘듦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결국 그 고통을 대하는 두 사람간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기 전의 자리에 미련을 가질 사람이라면 아예 떠나지 말아야 한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장황하게 썼듯,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보통의 경우라면, 다른 곳을 바라보고 부러워할 시간에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좀 더 집중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태도가 훨씬 더 현명한 것이다.
 
떠남을 꿈꾸는 이들은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현재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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