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자기 기준점

아이루다 2014. 12. 27. 01:00

 
최근에 텔레그램이란 프로그램이 꽤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국내는 원래 카카오톡이라는 절대 다수의 사용자 수를 자랑하는 모바일 메신저가 있는데, 국내 경찰의 메시지 감찰 문제가 부각되면서 시작된 안정성에 대한 문제로 인해서 반사적으로 이득을 얻은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메신저이다.
 
개인간에 주고 받은 대화 내용에 대한 국가 기관의 감청이라는 문제점 때문에 대화 내용이 암호화도 되고 또한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관련된 기록을 요청하기도 힘들어 보이는지라 많은 이들이 호기심 반, 써볼 생각 반으로 설치를 한 듯 하다.
 
내 기억으로는 마지막으로 알려진 통계가 당시 약 300만명의 사람이 설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로 몇달이 지났고 호기심에 설치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다시 카카오톡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카카오톡을 쓰는 사람들이 하는 하소연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지인 중에서 텔레그램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사용하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또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변 이들이 거의 텔레그램을 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폰도 상황이 비슷하다. 어떤 사람들 주변엔 아이폰 사용자가 다수가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 주변엔 단 한 명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 휴대폰 보급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치가 발표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을 기준으로 어떤 휴대폰이 더 잘 팔리고 있는지를 착각하기 쉽다.
 
사자성어 중에서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다. 비난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곤 해서 그다지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자성어인데, 원래 이 말은 그리 나쁜 뜻은 아니다. 그냥 비슷한 존재들끼리 모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은 비슷한 존재를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을 만나려고 한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화가 통하기 쉽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관심사가 너무 다르거나 분야와 접하는 사람들의 계층이 다르면 같은 한국말을 써도 대화의 내용 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경우 까지도 생긴다. 그리고 그럴 경우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된다. 누가 흥미 있지 않는 주제로 대화를 나눌 것이며, 누가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 못하는 사람과 어울리려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 인간은 결국 모두 유유상종한다. 하지 않는 경우라면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 만나는, 직업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리고 설령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해도 서로 잘 맞지 않으면 이것보다 큰 스트레스가 없다. 그래서 직장 내 인간관계가 회사 스트레스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가능하다면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과 어울리게 되어 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우리는 결국 무작위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란 뜻이 된다. 또한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결국 우리가 편중된 의견이나 생각을 가진 무리들과 어울리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란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 기준을 자신의 주변으로 삼는다. 물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객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여고생들에게 연예인의 인기 도를 조사한 후 그것을 전 국민의 선호도인 냥 발표하는 것과 같다.
 
이미 객관적 자료를 뽑아낼 모집단 자체가 편중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어떤 공통 정보를 뽑아내도 결국 그것은 태생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 자신과 같은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텔레그램의 경우, 자신의 주변에 텔레그램을 쓰는 사람이 없을 경우라면, 텔레그램은 잠시 흥했다가 망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반대로 자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텔레그램을 쓰면 텔레그램의 인기는 쭉 계속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서로 이것에 대해 언쟁이 붙었을 때, 자신의 주변을 기준으로 객관적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것은 명확해서 싸움이 덜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정말로 우물 안 개구리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객관성을 부여해주는 행동을 한다.
 
우물 속 개구리들은 같이 개굴거리면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개굴거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참새가 들어오면, 참새에게도 짹짹거리지 말고 개굴개굴 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우린 어떤 경우에도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 앞에서 말했든, 우리가 그것의 기준점을 자신의 주변을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을 책이나 방송 등을 통해서 무작위 하게 얻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결국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애플이 만든 아이폰이 좋은 사람은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아이폰에 관한 기사를 보면 다른 기사보다 좀 더 흥미를 가지고 그 내용을 본다. 반대로 삼성폰을 쓰는 사람은 삼성폰에 대한 기사가 뜨면 그것을 관심 있게 본다. 우리는 누구나 현재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을 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누적된 정보는 결국엔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서 편중되게 쌓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시간을 뉴스와 같은 객관적 자료를 통해서 누적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이 객관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상식과 비상식을 결정한다.
 
이런 우리들의 태도는 실제로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특히나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정치나 종교 분야일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교육이나 결혼 문화와 같은 것들에서도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다.
 
정치의 경우엔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로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고, 종교의 경우엔 자신의 종교가 옳고 그 나머지 종교는 모두 거짓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타인의 가진 종교관을 무시하여 결국 갈등을 일으킨다.
 
교육 제도나 결혼 문화의 경우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정해 놓은 상식과 상식이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래서 강남의 학부모의 상식과 어느 시골 마을 사람의 상식은 완전히 다른데도 결국 무상 급식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것을 상식이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혼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두 집안의 결합이 되기도 하기에, 결국 두 집안의 각자 다른 상식이 충돌을 일으키는데, 심지어 문화적 충격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각 집마다 고유의 가정 예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집은 장성한 아들이 홀딱 벗고 집안을 활보하는 집도 있을 것이고, 어떤 집은 속옷도 보여주지 않는 집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심한 차이가 나는 두 집안이 결혼을 하게 되면 서로가 익숙하지 않는 문화로 인해서 기겁을 하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서 '남들만큼' 이란 것이 있다. 참 많이 쓰는 말이어서 들었을 때 거의 이질감이나 거부감이 없는 구문인데, 실제로 잘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애매한 말이 없다.
 
왜냐하면 이 남들만큼이란 말에서 남이란 대상의 정의가 너무도 편협적이기 때문이다. 이 '남'은 원래 의미로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 즉 모든 타인을 호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남'은 자신과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들, 즉 동창, 친구, 회사의 사람들, 각종 모임에서 접하는 사람들, 자신이 TV 속에서 본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로 그 범위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런데 이렇게나 남을 작은 범위로 좁혀놓고는 그것을 전체의 평균치로 환산시켜서 그것을 상식이라고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만큼 대접받고, 남들만큼 잘살고, 남들만큼 즐기고, 남들만큼 키우고, 남들만큼 해주고, 남들만큼 행복하길 바란다. 우리가 느끼는 상대적 행복의 결정체라고도 볼 수 있는 구문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말 그대로 끼리끼리 모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이것까지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떤 어울림이든지 그 안에서 정해진 상식 기준은 오직 그 안에서만 통용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자기 기준에 주변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안 하는 것이고, 자기 주변 사람들이 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하고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이 지인들이 하고 사는 것이라면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믿고, 자신 주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이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의 상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단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상식도 상대적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늘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이 믿는 상식을 강제로 남들에게도 적용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수 많은 갈등과 싸움이 벌어진다.
 
70억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기껏해야 수백 명의 사람만을 알고 지낼 수 있는 우리는, 그 좁은 범위 조차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이미 선별적으로 선택해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기준으로 상식을 규정한 후,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런 식으로 삶을 사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 그 누구도 완벽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편중되거나 편협 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인지하고 살아갈 때, 다른 이들이 주장하는 상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또한 그 자신이 믿고 있는 상식에 대해서도 고정시키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늘 변하는데, 특정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로부터 판단한 상식을 평생 유지시키고 살아가는 것은 일관성이 아닌 똥 고집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것을 일관성 내지 신념으로 믿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아집과 똥 고집이다. 설령 듣기 좋게 신념이라고 불러주더라도 결국 고정된 것은 고인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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