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

아이루다 2014. 11. 17. 15:20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각자가 그리는 삶의 궤적은 참으로 놀랄 만큼 다양하다. 그리고 우리가 단 하나의 자신만의 궤적 이외에 다양한 다른 궤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수 많은 정보들 덕분이다. 우리는 TV, 신문, 책, 영화, 연극, 사람들의 이야기, 어느 게시판, 페북과 같은 SNS 툴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삶에 대한 간접 체험 하게 된다. 그래서 TV에 나오는,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의 다큐를 보고는 그런 삶도 존재할 수 있구나를 알게 되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서 정말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는 그런 힘든 삶을 살고 있구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재미로 보는 소설 책이나 영화 등에서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간접적으로 소개된다. 그 안엔 첩보원, 건달, 경찰, 공무원, 백수, 재벌, 악당, 영웅, 아빠, 엄마, 아이, 여자, 남자 등의 삶이 그려져 있다. 이것에 더해서 소설이나 영화엔 단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계 각국에 살아가는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소개 된다.
 
실제로 책이나 영화가 다른 것들에 비해서 유난히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TV나 뉴스 등을 통해서 접하는 정보는 언어라는 장벽 때문에 한국이란 문화적 공간에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소설과 영화만큼은 다른 이들의 해석을 통해 전 세계에서 살아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살아 오면서 사귄 친구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그 친구들이 살아가면서 겪은 일들과 그들이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을 선택했고, 어떤 것들을 이뤘으며,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했었는지를 듣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듣고는 공감하고, 기뻐해주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부러워하고, 비난하고, 비웃고, 질투한다.
 
아무튼 어떤 종류의 정보 수단을 통해서이든지, 그것이 얼마나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는지 아니면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는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든지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비교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엔 비교 대상이 없을 경우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도 인지 못 할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서 빛이란 존재를 이해할 때, 모든 공간이 같은 밝기로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빛이란 것이 있다는 것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에 빠져봐야 공기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과 같다.
 
또한 다양한 비교 대상은 그 원래 대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훨씬 더 깊고 넓게 해준다. 우리는 빛의 다채로운 색과 명암의 강도를 보면서 빛의 여러 가지 성질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다른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보면서 우리는 그 자신의 삶의 궤적에 이해를 할 수 있다. 만약 모두들 곧은 궤적을 그린다고 느꼈다면 자신은 굽어진 궤적이라고 느낄 것이고, 모두 굽어진 궤적이라고 느꼈다면 자신은 곧은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이들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이 그다지 잘못된 길을 가기 있지 않다고 안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성, 유효성, 안정성, 의미성, 가치성을 판단하게 된다. 우리가 혼자 사는 삶만 생각해서는 도대체 이것이 옳은지, 제대로 된 것인지, 안전한지, 의미가 있는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 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그 어떤 궤적도 절대적 기준점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최대한의 다수가 선택한 길의 평균치를 이용한다. 이것은 나름 현명한 방법이긴 한데, 이 역시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수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라고 말할 순 없다는 점이다.
 
단지, 이런 경우라면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나름대로의 확신은 가질 수 있다. 비록 그것이 100% 확신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설령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평균치 궤적을 그리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데, 모든 표준 분포 곡선에는 양 끝으로 그 수는 적지만, 평균점과 많이 벌어진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평균치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마냥 어색함을 느낄 수도 있다. 결국 이것은 그 사람의 삶에 대한 만족도 및 자신이 뭔가 잘못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정상적으로 평균치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는 사람 역시도 조금 다르지만 역시나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평균치의 삶을 원하지만 상황이나 여건 혹은 운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어떤 삶은 정말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젊은 시절 암에 걸린 어떤 불운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전개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한다고 해서 안정화 되지가 못한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혹은 다른 이들의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서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는 계속 흔들리게 된다.
 
이것은 삶이라는 항해를 하고 있는 자신을 심하게 흔들어서 배 멀미가 나게 하거나 심하면 배가 전복되어 난파되기도 한다고 표현 할 수도 있다. 거기에서 어떤 이들은 참으로 안정적으로 잘 운항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배가 박살이 나서 바다를 떠돌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혼란스러움에 빠진 우리들은 좀 더 뛰어난 존재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한 선택을 귀담아 듣거나 혹은 절대성을 주장하는 종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것은 개인적 선택이지만, 어떤 경로를 거치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 대한 완벽한 판단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의 궤적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사람은 이젠, 다른 궤적을 그릴 방법이 없는지를 찾게 된다. 현재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 않거나 뭔가 자신과 잘 안 맞거나 불안하거나 하다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늘 실패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현재 가고 있는 길이나 혹은 이미 어느 정도 예정된 길을 포기하고 간 새로운 길에서 실패하게 되면, 그나마 있던 것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선택에 대한 후회가 훨씬 더 심각하게 나타날까 봐 걱정스럽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대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계속 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뛰쳐나가서 새로운 길을 갈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또한 이미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기반으로 해서 엮인 수 많은 관계와 책임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그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결정된 궤적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길이, 자신이 선택 가능한 모든 길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을 자기 합리화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효과는 대단하여서 결국 나중에 나이를 먹은 후에는 자신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이런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 조차도 삶의 궤적을 바꾸는 것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거나 혹은 못 다닌 대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은 궤적을 바꾸기 보다는 궤적을 그리는 속도를 늦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 원래 가는 길을 좀 더 안정적으로 가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좀 더 안 좋은 길로 늦게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주 과감한 결정을 하기도 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하여 농사를 짓거나, 세계 여행을 떠나거나, 음악을 하거나, 작가로 데뷔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과감하게 궤적을 변경시키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성공할 확률도 그리 높지 않다. 단지 어떤 궤적으로 변경시켰든지 상관없이 본인이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긴 하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평범한 범주에서 삶을 거의 다 소모한 사람은 이젠 뭔가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 지키려고 했던 궤적의 정체가 실상은 그리 별 것 아니란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늙으면 후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회의 많은 부분이 바로 자신이 좀 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설령 이들에게 다시 젊음을 되돌려 줘도 그들을 역시나 다시 평범한 삶을 선택할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살아가면서 삶의 궤적을 바꿀 기회를 여러 번 얻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끝없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를 상상할 수 있고 자신이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를 고민도 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런 종류의 고민은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나중에 생각하면 기억이 나질 않아서 마치 자신이 삶을 바꿀 수 있었던 계기나 기회가 없었다고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삶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살 수 없다. 인간 대부분의 삶은 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과 같다. 거기에서 우리는 겨우 속도를 늦추거나 약간 방향 전환만이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특별한 어떤 사람들은 물을 거슬러 오를 수도 있고, 육지에 내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선택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은 선택이 아니고, 살다 보니 다 그렇게 살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그럴법한 것을 고르고 그나마 그것조차도 제대로 못할까 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더해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생긴 사람이라면 더욱 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로 다른 삶의 궤적을 선택하여 그것이 성공하냐 실패하냐를 따질 필요가 없이,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보는 삶은 어떤가 하고 말이다. 그것을 나이를 먹고 후회하거나 하는 것 따위가 아닌, 정말로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 그 길을 가 볼 결심을 하는 것 말이다.
 
젊은 시절 삶에 대한 고뇌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분이나, 뭔가 삶의 다른 면을 보고 싶어서 인도로 떠난 분들이나, 산 속으로 들어가 홀로 살면서 진정한 의미의 자기만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 말이다.
 
혹은 이런 변화는 아니더라도, 진정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자신을 얽어 맨 모든 편견과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과감함을 가진 사람들 역시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와 삶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저하게 되고, 결국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에 비교해서 실패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우리 사회는 어떤 나이만큼을 살았을 때 해둬야 하는 것에 대해 정의해 두는 것을 즐겨 한다. 배우는 것, 결혼, 취직, 아이 낳는 것, 집 구입, 인간 관계, 집 구입 등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능하면 해야 한다고 믿는 것들이다. 우리는 남들이 자는 곳과 비슷한 곳에서는 자야 하고, 우리는 남들이 먹는 것 정도는 먹어야 한다. 우리는 남들이 누리는 것 정도를 누리는 것은 호사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남들만큼은 오래 살아야 하고, 남들만큼은 건강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평균적 삶의 궤적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사회 통계 치로 나온 각종 수치를 기준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한다. 우리는 그래서 평균 수명을 보고 자신이 덜 살았는지, 더 살았는지 판단하고 평균 수입을 보고 자신의 삶이 상위 층인지 하위 층인지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정말로 소중한 자신의 삶의 가치보다도 더 우선시 해야 할 수치들인 것인가?
 
좀 덜 살고, 좀 덜 부유하고, 좀 덜 먹고, 좀 덜 편하고, 좀 덜 돌아다니고, 좀 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삶일까?
 
실제로 이것들은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는 늘 다른 이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즉, 자신이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끝없이 다른 이들의 판단을 참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다른 이의 삶에 별다른 관심 없이 본인의 삶에만 관심 있는 이들의 가벼운 판단에 춤을 추는 격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삶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한 단면만 본 것에 불과한데도 그것을 마음 속에 담아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우리의 어리석은 단면은 너무도 많이 알려진 것들이라서 그것을 모르는 이들도 드물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단지 알고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머리엔 언제나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친구, 이웃 사람, 직장 동료 들의 삶의 평균치가 계산되고 있으며 이들의 삶을 참고 삼아서 자신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진 기억도 희미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지나가듯 들으면서 놀래기도 한다.
 
산다는 것은 정답도 오답도 기준점 없는 과정이다. 그저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는 처절하게, 누군가는 여유롭게, 누군가는 운 좋게, 누군가는 운 나쁘게, 누군가는 길게, 누군가는 짧게, 누군가는 풍요하게, 누군가는 가난하게 산다.
 
이런 수 많은 삶의 궤적에서 내 삶의 궤적이 좀 다른 방향으로 혹은 다른 모양으로 그려지는 것을 실천하기란 너무도 어렵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서 깨끗이 지운 후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궤적만이 옳다고 믿고 사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놓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미약한 노력이라도 하면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냥 바램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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