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개는 미소 짓지 않는다

아이루다 2014. 11. 15. 08:36

 
홈 비디오가 한참 유행했을 무렵, 그 당시 영상에 찍힌 대상은 주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각 집에서 키우던 귀여운 애완동물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 개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동물들을 모두 통틀어도 그것을 훌쩍 뛰어 넘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유튜브 같은 종류의 인터넷을 통한 영상 공유 서비스가 활성화 되면서 우리는 참 많은 종류의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빠지지 않는 대상이 바로 동물들이다.
 
거기엔 개, 강아지, 고양이, 쥐, 다람쥐, 너구리, 팬더, 곰, 사자, 호랑이, 코끼리, 기린, 캥거루를 비롯하여 각종 새, 곤충, 파충류 등등까지 우리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그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 찍힌 다양한 동작을 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인간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는 모습이나 혹은 마치 인간의 표정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동물들의 얼굴을 보면서 마치 그들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표현하는 존재인 냥 상상하곤 했다.
 
물론 동물들이 하품을 하거나 조는 모습은 인간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는 점은 맞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 표현은 인간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개가 이빨을 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그 동물이 화가 났거나 뭔가 심하게 경계를 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대다수의 육식동물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화를 낼 때마다 이를 들어낸다면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혹시라도 궁금하다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를 들어내면서 어떤 상태인지 맞춰보라고 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보통 이를 들어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뭔가가 끼었는지 보려 하거나 웃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참 단순한 설명인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동물에게 느끼는 자의적 해석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동물의 얼굴이나 행동에서 오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의 것을 기준으로 상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개는 결코 미소 짓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마치 웃는 것처럼 보이는 개의 모습을 보고는 정말로 그 개가 기분이 좋아서 웃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개가 기분 좋아하는 모습은 보통 열심히 꼬리를 흔들 때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보통 개나 고양이가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웃는 것처럼 보이는 개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개가 웃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고양이의 각종 표정을 보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장난으로 혹은 재미로 동물들의 표정을 상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런 식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가을 바람이 쓸쓸하다든가, 산이 웅장하다고 느끼거나 노을의 화려함에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해석은 모두 우리 인간의 내면적 해석이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현재의 감정적 상태와 감성적 느낌을 통해 자의적으로 해석한 후, 그것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린다.
 
즉, 우리는 마치 필름이 들어오는 빛을 자신만의 색이나 모양으로 바꾸어 벽면에 투사 시키는 것 마냥,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내부적 장치를 통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어느 정도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감정은 별개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의 죽음을 보게 될 때, 특히나 자신이 키우던 사랑스러운 존재의 죽음을 보게 될 때, 가슴 한 구석이 찢어지는 듯 한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던 개를 잃은 사람에게는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정말로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조차도 돼지와 소와 닭은 먹는다.
 
이런 이중성을 보이게 되는 것이 바로 대상 사물이나 사건을 모두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렇기에 마치 우리가 눈이 두 개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은 모두 눈이 두 개 있기 때문에, 눈이 두 개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눈이 왜 두 개가 있어야 할까? 우리는 눈이 10개 달린 외계인을 보면 그들을 징그럽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 이상하지 않는 우리의 속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갈등의 기반엔 바로 자의적 해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자의적 해석을 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각자가 모두 다른 해석 과정을 통해서 결론 낸 것들을 말과 글과 표정을 통해 끄집어 낸 후, 서로가 다른 차이점으로 인해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떤 개의 표정을 보고 누군가는 웃고 있다고 하고, 누군가는 화를 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 그것으로 끝내야 할 것을 가지고 서로 누가 맞는지를 놓고 다툼이나 갈등이 벌어지게 되면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본질적인 관점에서 보면 개는 웃지 못한다. 물론 개가 이빨을 들어내면 그것을 화를 내고 있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화가 아닌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공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이 사냥을 할 때 화를 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우리는 개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개가 되 보지 못하기에 그것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개가 어떤 상태인지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우리는 그것을 두고 갈등을 느낀다. 이것은 단지 개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코 100%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어느 정도만 공감하고 상상할 뿐이다. 기쁨이나 고통과 같은 느낌은 워낙 강해서 어느 정도는 일치가 되지만, 그 외의 미세한 감정들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반론도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존재에 대한 판단이 100% 맞지 않다고 해서 모든 것을 부정확한 정보로만 보고 아무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과연 괜찮은가 라고 말이다. 당연히 이 말도 틀림이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외부에 표현할 때 지켜야 하는 경계지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고 있는 판단들은 모두 어림잡아서 내린 것들이다. 설령 그 대상이 우리 자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 역시도 상상하고 있다. 마치 나는 기분이 현재 좋을 것이라고 느끼거나 기분이 나쁠 것이라고 느낀다.
 
우리 인간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인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 왜 좋은지, 기분이 나쁘면 왜 나쁜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이유만을 상상한다.
 
가방을 새로 산 친구와 만났을 때, 새로 산 가방을 한번 매보려고 했다가 친구의 거절로 인해 기분이 나빠진 사람은 그 기분이 나빠진 이유가 친구의 거절하는 태도라고만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친구가 산 가방이 너무 예뻐서 자신도 갖고 싶으나 너무 비싸서 못하는 상황이거나 혹은 친구가 그 가방을 남자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나빠졌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사고 패턴은 늘 부정확한 결론을 만들어 내지만, 스스로는 그것에 대해서 매우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 결국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도박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도박에 빠진 이들은 자신이 돈을 잃은 상황에 대해서 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고 언젠가 돈을 따게 될 것이기에 도박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결코 도박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제로 도박은 그냥 도박이 주는 과도한 흥분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돈을 따고 잃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마약처럼 끝없는 강한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도박을 하는 사람은 도박을 하는 과정에서 정말로 큰 행복감을 느낀다. 물론 끝이 난 후에는 처절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삶이 완전히 망쳐지는 것조차 불사한 채 더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박을 하는 이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따도 결국 다시 도박을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정말로 도박을 하다가 크게 돈을 따고 난 후, 도박 판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잘못된 해석, 타인에 대한 잘못된 해석, 개의 표정에 대한 잘못된 해석,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결코 단지 잘못된 해석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위대한 종족이라고 믿었던 독일은 결국 2차 세계대전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야만적인 행동을 했고, 우리 인간이 믿는 수 많은 신념과 종교 역시도 이런 해석들이 공감되고 전파되고 설득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 가장 큰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위대한 신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종교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도 사진 속 강아지의 표정을 보면서, 그들이 웃고 있다고 믿으면서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과 우리 사회가 가진 수 많은 문제점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이 연결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더 웃겨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떤 잘못된 해석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만, 어떤 잘못된 해석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준다. 과연 그렇다면 잘못된 해석은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할까? 또한 어떻게 해야 이 잘못된 해석이 가진 큰 단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뭐 답은 단순하긴 하다. 그것은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느낌이든, 판단이든, 신념이든, 종교든, 과학적 사실이든, 우리가 믿는 보편적 상식이든,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 우정, 믿음 등과 상관없이 우리의 모든 사고의 결과는 바로 개개인의 내부에서만 절대성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밖으로 나올 땐, 오직 그 사람만의 확신이어야 하며, 결코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결코 불가능 하지만, 가끔 어떤 갈등을 느낄 때마다 자신의 확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봄으로써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래야 우리는 개가 웃는 모습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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