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책임감

아이루다 2014. 11. 9. 07:37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방법은 신체적인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 생각과는 달리 육체는 실제로 어른이 된 것과 그다지 큰 연관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예는 발육이 매우 빠른 아이나 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거의 아이와 같은 몸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 증명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성인의 몸매를 갖게 된 여자 아이나, 성인이 되어서 일자 몸과 작은 키를 가진 처녀는 실제로 몸의 상태는 서로 뒤바뀌어 있지만, 대화를 해보면 금새 누가 어른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을 실제로 인식하는 방법은 바로 그 사람의 정신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 세계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쓰는 단어나 어휘가 어른이 쓰는 그런 단어와 말투라고 해서, 정말로 그 사람이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성을 만나 섹스를 하면 어른이 된 것인가? 물론 나이와 외모가 어른이 되었다면, 우린 보통 그 사람을 한 명의 성인으로 대접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성인으로써 책임감을 갖길 바란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을 좀 더 정밀하게 정의한다면, 아이에게 없었던 선택의 자유를 가진 것과 그것과 함께 찰떡처럼 붙어 있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바로 이 두 가지 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중에서 자유는 좋아하고 책임은 싫어하는 보편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자유를 무척 좋아한다. 아이일 때, 우리는 끝없이 부모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해서는 안될 것과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능력에 따라 상대적으로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갖게 된다. 물론 범죄 행위나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준의 행동은 안 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능력과 상황에 의해 제약될 뿐, 그 이외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반면에 우리는 책임을 싫어한다. 책임은 무거운 것이며, 우리를 무척 힘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것의 가장 큰 단점인 이 책임감은, 도대체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가 어른이 된 후,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행복함에 부러움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비록 자유는 제약되어 있지만 그래도 책임감이 없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 때라도 놀이처럼 느끼기에 어른에 비해 훨씬 재미있고 행복한 것이다.
 
성인이 된 아이는 돈을 벌어야 하고, 작은 사회의 소속원으로써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거나 못했을 때, 어릴 시절에 겪었던 부모님에게 혼나는 수준이 아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생계가 위협을 받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성인이 된 인간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겠지만,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가정을 지키거나, 가정을 행복하게 유지시켜야 하는 책임을 갖게 된다. 만약 이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아이와 배우자로부터 원망을 들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장기화되면 결국 그 가정을 깨지고 만다.
 
우리는 돈을 버는 시기에 상황에 따라서는 부모님을 부양하기도 해야 하며, 각종 사회적으로 계약된 내용의 행동을 하고 다녀야 한다. 우리는 결혼식장 같은 곳에 참가해야 하며, 장례식장 역시도 가야 한다. 우리는 끝없이 가고 싶어서 가는 곳이 아닌, 그런 장소들을 가야 한다. 물론 반대로 능력에 따라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성인이 된 인간은 자유로운 행동과 책임져야 하는 행동의 끝없는 반복을 통해서 살아간다. 하지만 언뜻 생각하면 이 둘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자유는 우리에게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듯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한한 행동력을 가져다 준다. 반대로 책임은 자유를 억제한다. 우리는 날라가고 싶어도 책임이라는 육중한 무게를 지닌 추를 통해 발목이 묶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와는 완전히 반대인, 이 책임이란 것은 진정한 의미의 '악' 인가?
 
우리는 책임감을 보통 짐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감이 무거울수록 한 걸음 한 걸음 걷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기르려고 한다. 즉,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능력은 대부분 타고 난다. 이것을 노력으로 극복하는 일은 강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능력 개발을 포기 한다. 그러다 보니 어깨에 진 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우연히 옆을 보면, 누군가가 진 짐은 작고 가벼워 보여서 부러움을 느낀다. 심하면 질투심도 느껴진다. 왜 이렇게 세상이 불공평해서 자신은 거대한 산만한 크기의 짐을 지고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은 겨우 한 줌이나 될 것 같은 짐을 지고 있냐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미 짐으로 인해 힘든 상태인데 더욱 더 힘들어 진다.
 
결국 사람들은 짐을 내려놓고 싶어한다. 가능하다면, 짐을 줄여서 좀 더 편해지고 싶다. 거기에 더해서 남들은 좀처럼 가지고 있지 않는 짐의 경우엔 더 그렇다. 치매 부모를 모셔야 하는 처지나, 타고난 병으로 인해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를 가진 부모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모나 형제의 잘못으로 인해 집안에 큰 우환이 들었는데 이것을 공동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놓인 사람이나, 배우자의 실수로 인해서 큰 돈을 사기 당한 사람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것들이 너무 힘들면 내려 놓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해준다. 그렇게 살면 수렁에 같이 빠지게 된다고 말이다. 또한 심한 경우 그렇게 같이 책임을 나눠지어 봤자, 나중에 고마운 줄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해준다.
 
실제로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꽤나 냉정하게 이 짐을 내려 놓는다. 그 거대한 공동 짐에 눌려서 모두가 압사 당하기 전에, 탈출하여 어떻게든 살아 남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그들이 완전히 깔렸을 때 옆에서 밥이라도 떠 먹여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책임감은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 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책임을 지는 일에는 묘한 반전이 있다. 그 어떤 책임이든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등에 지고 있으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 이것은 매우 긴 시간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매 순간마다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작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놀랍게도, 오래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료된 책임은 우리들 각자에게 귀중한 가치로 변화된다.
 
우리는 자유를 통해 행복을 얻지만, 이것은 남지 못한다. 자유는 끝없이 소모되는 것이다. 반대로 책임은 불행함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남는다. 어떤 환경에 놓이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 낸 삶은 그 자체로 보석과 같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머리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아니 전 인류가 그 책임감을 칭송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절대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자유는 현재의 행복을 가져다 주고, 책임감은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바로 그 가치를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은 당장 입에 들어가서 맛을 내는 음식을 먹는 것을, 음식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 선호한다. 그렇지만 어떤 책임감들은 생각보다 쉽게 가치로 변환되고 또한 행복으로 변환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부부는 분명히 상대적으로 큰 자유를 느끼고 살게 된다. 그리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부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그 책임감이 주는 행복을 그리 어렵지 않게 느끼게 된다. 그것은 조금 다를 형태의 행복일 뿐, 아마도 책임감 중에서는 가장 행복한 책임감이 될 것이다.
 
반대로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부부는 나이를 먹을수록 가진 자유가 소진되어 이젠 어떤 종류의 자유를 누려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게 된다. 자유로부터 얻는 행복에 대한 권태기가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노쇠해지는 육체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더욱 심화된다.
 
물론 이것은 조금 극단적인 비교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이러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개차반으로 키운 부모나 아이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부모의 경우라면 이것은 차라리 안 키우는 것이 낫다. 반대로 노후까지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을 잘 준비한 부부는 웬만한 아이를 키우는 부부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단, 준비를 철저하게 했을 때 이야기이다.
 
10년 동안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모신 며느리는, 그것을 인해 큰 불행을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그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날, 자신의 마음 속에 쌓였던 분노도 원망도 모두 함께 떠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의 시간이 결코 소모되고 날아가 버린 시간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분들에게는 그 책임감이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가치로 승화된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그 어떤 종류의 고난이 와도 모두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더불어 선물 받게 된다. 이것은 삶의 태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된 어떤 이들을 평생을 책임감만으로 살려고 하기도 한다. 즉, 책임감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가치를 부여 받으며,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도 역시도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짊어진 짐이 미래에 어떤 모습을 변할지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결승점에 가까이 갔을 때만 알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겁게 지고 있는 짐 중에서, 어떤 것은 전혀 쓸모가 없이 지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은 지고 있는 동안은 그리도 싫었는데, 막상 내려 놓고 보니 그것이 그 자신을 살게 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물론 지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고 있기에 기꺼이 지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책임감은 나름대로 다양성과 의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걸쳐 자유를 누리고 책임감을 탈피하려고 살다 보면, 언젠간 내려 놓고 바라볼 짐조차 없어서 허탈해 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마치 등산을 할 때 가방을 가득 채운 맛난 먹거리 같다. 홀가분하게 오르는 산은 편하지만, 정상에 도착해서는 남들이 먹는 모습만을 바라 볼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을 이미 알고 간 사람은 다시 홀가분하게 내려올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모두 누리고, 늙어서 더 이상 할 수 있이 없을 때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된다. 남들은 평생을 지고 온 짐을 그때야 내려 놓고서는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살펴보고 있을 때, 그 짐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자신을 돌아 보게 해줄 아무런 짐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가 마냥 좋고 최고의 것이라고 믿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가치로 발견하지 못한, 그야말로 소모된 인생이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모두 책임감으로만 채울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책임감 중에 일부는 원래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을 착각하고 지고 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내려 놓고 그것으로 인해 얻어진 힘을 자유를 누리는데 써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진 짐의 종류를 감별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이것은 오랜 생각과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하다간 진짜 가치들을 함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아이를 버리고 행복을 찾아 떠난 부모가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이를 먹고 난 후, 늙어서 힘이 없어지면 자신이 젊은 시절에 자신이 귀찮아서 버렸던 짐을 되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짐은 이미 남의 것의 되어 있으며, 그래서 어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을 버리고 간 부모를 거부한다.
 
물론 세상은 그리 공평하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서 억울할 경우도 생긴다. 평생 책임을 졌는데, 결국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 책임이 중간에 의도하지 않게 무너지면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경우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유와 책임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와 책임을 위한 책임은 각자 삶을 매우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등에 올려진 거대한 짐을 바라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것이다. 거기엔 아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신의 불안한 삶도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 짐에 눌려서 힘들고 고달프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얼마가 될지 몰라도 결국 우리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해주는 것들이 들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어느 날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답을 줄 것이고, 또한 살고 난 후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고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좀 더 진지하게 해줄 것이며,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나은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게 될 것이다.
 
뭐 물론 이런 것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 자유를 누리고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 이 길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실패하게 된다는 점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짊어진 짐에 대한 책임은 인생에 있어서 일종의 보험이 된다. 우리는 단지 포기하지 않고 오래 가지고 삶을 완주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내용에 상관없이 삶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이만하면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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