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숨겨진 것들

아이루다 2014. 10. 22. 11:17

 
집 한 채가 있다. 2층 집으로 지어진 이 집은 동화에서 나오는 것 마냥 예쁘고, 앞에 가꿔진 아름다운 조경은 운치를 더해줬다. 그곳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데 이 집을 실제 살고 있는 사람은 하루에 몇 시간 가량을 이 집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그는 잡초를 뽑고, 정원수를 관리하고, 집 주변을 청소했다. 또한 매일매일 먼지가 쌓이는 집안 청소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집이 큰 만큼 청소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집 주인은 자신의 집이 너무도 좋았다. 그는 행복했다.
 
정확히 일치되지는 않지만, 만약 집 자체를 우리 인간의 육체에 비유한다면, 그 집주인이 집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그 모든 시간은 마치 우리의 정신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원래 물리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것의 내면을 보는 것은 다른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경험일수도 있고, 공감일수도 있으며, 감성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적 경험이나 혹은 간접적 경험을 통해서만 알 뿐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집을 볼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름다운 집만 본다. 하지만 혹시나 이런 집을 직접 소유한 적이 있거나, 지인이 그런 집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집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주인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감성을 통해 그것을 명시적이지는 못해도 자연스럽게 공감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사람의 외모와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해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우린 외모에 혹해서 사람에 대한 판단을 실수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어떤 이들은 그런 실수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것과 같은 원리로,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이렇게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실질적인 외부로 드러나는 면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 오감에 잡히지 않는 숨겨진 면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감각 기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쉽게 감지하지만, 숨겨진 것을 인식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직접 보거나 혹은 믿을만한 사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잘 믿지도 않고 또한 이해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책에서 책을 구성하는 종이와 거기에 인쇄된 글씨가 책의 외부적 모습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글자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책이다. 그래서 우린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책을 처음 볼 땐 제일 먼저 책의 외관을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책의 외관을 보고 책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린 책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이미 알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스마트 폰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하드웨어를 만드는 제조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이 훨씬 중요하다. 단지 책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자신이 선택한다. 그래서 스마트 폰은 사람들 선택에 따라 책이 되고, 신문이 되고, 게임기가 되고, 채팅 툴이 된다.
 
그럼에도 우린 그 내용엔 별로 신경을 안 쓴다. 어떤 용도로 스마트 폰을 쓰느냐 보다는 어떤 회사 제품을 구매하며 또한 얼만 가격을 괜찮게 구매하느냐에 거의 모든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스마트 폰은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고 단지 그 중에서 자신의 선택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택의 기준이 되기가 힘들다. 책처럼 명확히 내용이 물질적인 면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비중이 비슷비슷 할 때 우리는 외관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가방이나 옷은 모두 우리가 몸을 보호하거나 무엇인가를 담기 위한 도구로써 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기능성보다는 훨씬 더 외관에 중심을 둔다. 그나마 기능성에 중점을 둘 경우는 등산복과 같은 명확히 목적성을 가졌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패션이란 이름으로 어떤 옷의 외관에 중심을 두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단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는 그 기능이 비슷해 보인다 치면, 보통 외관 차이가 훨씬 더 크게 느낀다.
 
어제 읽은 기사 한 토막에서 우리나라 대학들의 인문학(문학, 철학, 역사 등등) 관련 학과가 계속 줄어들고 심지어 폐지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회사에서는 이공계를 선호하고 그 이유로 인해서 인문학 관련 전공자들이 좁은 취업 문을 뚫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짐으로써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된 예비 대학생들이 그것과 관련된 학과를 지원하지 않는 탓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문학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인문학이라고 알려진 문학, 철학, 역사를 배울까?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것 역시도 지금까지 설명했던 어떤 대상을 외적인 부분과 내면적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이해가 간다. 우리는 분명히 외적인 물리적으로 구성된 사회에 살아간다. 우리들의 육체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 있다.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나 책상, 의자 등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물리적으로 먹고 마시고 싸고 성장한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란 여정에서 정신적인 것은 무엇이 될까?
 
이것에 대한 질문을 하는 역할을 맡은 분야가 바로 인문학이다.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삶에 대한 정신적인 영역을 접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육체와 정신으로 나눈 개인적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영역이 아닌, 전체의 영역이다. 이것은 우리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과정이 줄어들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 상황을 보면, 우리 사회의 슬픈 미래가 예측된다. 우리는 지금 명확히 보이는 가치에 매몰되어서 숨겨진 가치가 가진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즉, 세상은 점점 물리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발전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무서운 퇴보이다.
 
최신 스마트 폰을 샀는데, 기능이 전화 걸고 문자 보내기 밖에 안 되는 상황이다. 책을 샀는데, 그 안에 단어는 빼곡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이다. 육체는 살아서 숨쉬는데 정신은 멈춘 식물인간의 상태이다. 집은 너무도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인은 매일 그 집 관리로 인해서 힘들고 스트레스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지 못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서로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내면을 보는 법을 잃어 버리고 있다. 우리는 기술 발전에 의해서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경험이 가능해졌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감성으로 느끼고 공감으로 이해하는 법을 잊어 버리고 있다. 이런 능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교육에 의해 개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런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다.
 
모든 개념은 권위 있는 이들에 의해서 정의되고, 모든 가치는 돈으로 집중되고 있다.
 
우리는 매일 TV에서 건강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좋은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고 배우며, 운동을 하는 법도 배운다. 우리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일어난 온갖 사건과 사고를 알게 되고, 생활의 지혜를 배우며, 멋진 장소를 알게 되고, 맛 집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다른 이의 경험과 그 경험을 다시 경험하는 이들을 통해 검증되고 결국엔 보는 이들에게 어떤 믿음과 확신을 주며, 이렇게 형성된 집단 지식은 우리 전체에게 보편적 상식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젠 불필요한 시도나 모르는 것을 향한 모험을 할 필요가 거의 없다. 우리는 어떤 식당에 갔을 때, 그 집의 메뉴 중 어떤 것이 제일 맛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며, 어떤 장소에 갔을 때, 어느 지점에 가야 가장 멋지게 그곳을 볼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어떤 행동 패턴을 가져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는 어떤 직장을 골라야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음을 알고 있고, 우리는 어떤 배우자를 골라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살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이 아이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자신처럼 편안하게 살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은 이미 누군가가 먼저 가서 편안하게 포장해 뒀다. 우린 이젠 그 포장도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조심만 하면 된다.
 
우린 이젠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판단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군가가 충분히 오래 생각한 결과나 혹은 평생을 연구한 결과를 공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스스로 그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젠 그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생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생각이란 단어를, 이미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근거로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인문학은 여전히 그 '생각'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한다. 그 학문들은 오늘도 지나온 역사를 가르치고, 답이 없는 문제를 내고 있으며, 이미 누구나 아는 것을 다시 읽게 한다. 그것들에게 있어서 판단이나 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문제만 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젠 이 오래되고 답도 없는 학문에 관심이 줄어 버렸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알려져 있고 결정되어 있는데, 왜 무슨 심보로 또 다시 그런 문제를 접하고 풀려고 하는가? 그것도 그 풀이가 전문적인 영역에서 일한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연구한 결과인데 말이다.
 
우리는 좀 더 빠르고 제대로 된 결정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서 우리는 모두 지식에 목마르게 된다. 삶을 잘 사는 것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얼마나 빠르게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활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기술은 모두 이 정보의 빠른 소통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린 이 기술을 정보 통신 기술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IT (Information Technology) 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거대한 IT 기업들이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얼마나 편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구글은 정보를 빠르게 검색하는 서비스를 하고, 애플은 이런 정보를 빠르고 쉽게 볼 수 있는 기계를 제공한다. 페이스 북은 지인간에 정보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트윗은 모르는 사람들과 가장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카톡은 여러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렇게나 빨라진 세상에서 오래된 구닥다리 학문인 인문학은 길을 잃고 말았다. 너무 코너에 몰리다 보니 이젠 인문학의 시대니 어쩌니 하면서 책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오직 서점에서만 통용되는 말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젠 인문학조차도 누군가 정의 내리고 판단한 결과를 보고 결정하길 바란다.
 
그래서 이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을 가진 책들이 나오고 있다.
 
우린 내일 아침에 비가 올지 안 올지를 미리 알고 있으며, 자신이 가려는 길이 얼마나 막힐지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알고 있다. 우리는 정보가 많아지고 그것을 습득하는 길이 빨라질수록 미래를 예측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미래 예측능력은 모두 우리들 자신의 작은 이득에 관련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젠 모든 판단 기준점에서 이득을 최우선을 놓게 된다. 손을 뻗으면 만 원짜리가 한 장 손에 쥐어 진다는 것을 알고도 손을 뻗지 않는 사람은 바보다. 손을 뻗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뿐이다.
 
'여기에서 손을 뻗어서 만원을 손에 쥐면 당신은 더 행복해지는가' 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바보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원래 숨겨진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통해 정말 더 행복해졌냐는 이 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단 손에 쥐고 나서 고민하면 된다.
 
그런데 손에 쥐고 나니, 다른 곳에 있는 만 원짜리가 있다는 정보가 또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할 시간이 없이 움직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헛걸음 할 수 있으니 빨리 움직여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이젠 '그것을 얻으면 왜 행복한가' 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것을 얻는 것 자체를 행복해 한다.
 
즉, 우리는 그 내용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물리적 결과물로 인해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것은 무한대로 존재할 수 있지만 물질적인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경쟁에서 밀려서 결국 만 원짜리를 얻지 못해서 불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경쟁에서 밀린 이들은 점점 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스스로 도태되고 만다.
 
그리고 점점 탐욕스러워진 사회는 소수가 고급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그들은 자발적인 계층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미 자발적 피지배층이 된 다수의 사람들은 정해진 프레임으로 인해서 자신의 손에 쥐어진 만 원짜리 한 장이 중요하다고 믿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디선가 소수는 수중에 수백 억 원의 지폐를 이미 가지고 있다.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말로 그것이 중요한가?' 라고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묻는 역할을  그동안 인문학이 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젠 그 질문하는 존재들마저 없애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좀 더 침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반전시킬 수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 모든 것은 극에 달하면 결국 반대 극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세상이 점점 더 물질적으로 변할수록 사람들은 우리가 그 동안 무엇을 잊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생각보다 큰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만, 미래는 결정된 것이 없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매우 암울하지만, 미래엔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그것이 비록 헛된 희망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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