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진지함에 대한 이해

아이루다 2014. 9. 27. 08:07

 
흔히 '아무 걱정 없는 삶' 이란 말은 가장 이상적인 삶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 말은 '행복한 삶' 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말이지만, 거의 같은 의미로 취급되기도 한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 중에서, 현재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자신의 가장 큰 고민이나 걱정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면 된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자신의 생사를 오가는 병처럼 커다란 것이라면 크게 불행한 것이고, 이와는 다르게 어제 새로 한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행복한 것이란 의미이다.
 
물론 이것이 얼만큼 행복하냐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인간은 걱정 없이 세상을 살 순 없다. 크고 작은 걱정은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걱정거리라고 해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걱정 그 자체로 그것의 크기를 가늠할 순 없다. 정확한 것은 그 걱정이 당사자에게 얼만큼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의 여부가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삐끗한 다리는 보통 사람에겐 조금 불편한 수준이겠지만, 늘 서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겐 나름 심각한 걱정이 될 수 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경우는 수 일 이내에 세계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운동선수 일 것이다. 그는 그 삐끗한 다리로 인해 인생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렇듯 걱정의 절대적 수치는 계산 할 수 없지만, 평균적으로 별 걱정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보통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마음 속에 걸리는 것이 없기에 밝게 살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성격과 많이 연결된다. 어떤 사람은 그럴 경우 많이 행복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무덤덤할 수 있다.
 
개인적인 걱정 말고 어떤 공동체, 주로 가족 단위로 생겨난 걱정은 그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 걱정은 당연히 각 구성원마다 모두 다르게 적용된다. 만약 그것이 돈 문제라면 집의 경제를 책임진 주체가 가장 큰 걱정을 느낄 것이고, 아이의 공부 문제라면 아이와 아이의 육아를 주로 담당한 부모 중 한 명이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걱정은 이렇듯 분산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꽤나 자주 같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땐 어떤 식으로든 협동을 해서 이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걱정거리를 갖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비록 그 문제가 자신과도 관련 있는 공동의 문제라고 해도 애써 그것을 외면하려고 한다.
 
그것의 이유는 바로 어떤 식으로든 갖게 된 걱정이 자신의 행복감을 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른 입장에서 공동의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이로 인해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난다.
 
아무튼 글의 제목은 진지함이라고 적었는데, 왜 이렇게 한참을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는지 궁금할 지 모르겠다. 이렇듯 장황하게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바로 우리가 걱정과 이 글에서 말하려고 하는 진지함을 별 생각 없이 혼합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 오용은 매우 자연스럽다. 걱정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으로만 보면 진지함과 매우 비슷하다. 실제로 우리는 걱정이 생기면 진지해졌다고 느낀다. 그리고 걱정이 생겨서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새겨진 것을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 여기기도 한다. 둘 모두 웃지 않는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같은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실생활에서도 걱정이 많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걱정이 많은 것인지 진지한 것인지 가늠할 방법이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진지한 사람에게 걱정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반대로 걱정이 많은 사람에게 진지함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한다.
 
몇 차례의 취업 시도에 실패한 어떤 구직자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삶에 대해 수 많은 걱정거리를 안은 채 한숨을 내쉴 때, 어떤 이가 이런 조언을 해준다. 행복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취업준비 생에게는 차라리 최신 회사 채용공고가 더 값지다. 여기에서 삶에 대한 진지함은 화를 불러낼 수도 있다.
 
반대로 빈부 격차가 심한 부당한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청년에게 취직해서 열심히 돈 벌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 해주는 어떤 어른들의 모습은, 바로 진지함을 걱정으로 착각한 조언인 셈이다. 이 청년의 모습은 자신이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진지한 태도였는데 그것을 가난하게 살까 봐 걱정하는 모습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런 식의 착각에 의한 조언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둘을 구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쉬운 구분법은 다음과 같다.
 
걱정은 행복과 양립할 수 없다. 반대로 진지함은 행복과 함께 할 수 있다.
 
걱정은 해결되어야만 행복으로 간다. 하지만 진지함은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상태를 뜻한다. 진지함은 상황에 따라서 오래 지속 되거나, 혹은 나이를 먹거나 주변 상황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아예 없어져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될 순 없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실 돈이 없는 것은 걱정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돈을 구하거나 벌면 바로 해결이 된다. 하지만 커피 재배 농가의 불편한 진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해결이 안 된다. 하지만 이 둘 모두 그 커피는 마실 때 동안 만큼은 행복해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돈이 없어 커피를 못 마셨던 사람은 마심과 동시에 해결이 되서 행복해지는 것이고, 반대로 커피의 진실에 대한 진지함이 있었던 사람은 그 순간 커피의 행복은 누릴 수 있으나 마음 한 구석엔 없앨 수 없는 진지함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이럴 경우 진지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커피를 마실 것이면서 뭐 하러 그런 고민을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엔 그것을 연극이나 혹은 가식적인 태도로 오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껏 커피를 마시느냐 못 마시느냐 만을 가지고 걱정을 했는데, 누군가는 이미 커피를 마실 돈이 충분히 있으면서 사치스럽게 커피 재배 농가의 부당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가식적인 사람들도 세상엔 흔하다. 단 한번의 제대로 된 진지함도 경험하지 못한 이가 마치 진지한 척 하는 일은 많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늘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그렇고,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써 놓은 수 많은 서점에 있는 책들이 그렇다. 서민의 삶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그렇고 중소기업과 상생을 말하는 대기업들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말로만 관용, 정의, 공존, 가치 등을 외치다가 정작 자신이 더 이득을 얻게 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꾼다. 그래서 그 동안 속았던 많은 이들은 진지함을 의심스럽게 바라 본다.
 
진지한 척 하는 이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그리 분노 하다가 결국 자신이 남들보다 잘 살 기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에게 있어서 부조리는 진지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잘 살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워 그것을 진지함으로 치장해서 불만을 털어 놓은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다른 이들의 호응을 더 잘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걱정을 경험하는 이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 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진지함을 경험하는 사람은 소수만이 가능하다.
 
앞에서 설명했듯, 걱정과 진지함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당사자가 걱정을 그럴 듯 하게 설명을 하여 진지함으로 치장하면 그것을 구분해내기 어렵지만, 실제로 진지함은 그 후 그것에 대한 꾸준한 행동이 따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만약 커피의 숨은 진실에 대한 진지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그것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적어도 계속 커피를 마시더라도 조금은 다른 노력을 통해서 커피를 접하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커피 원두 중에서 '공정 무역 커피' 라는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을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커피를 선택하는 것이 커피를 좋아하는 당사자로서는 커피 재배 농가를 배려하는 일종의 실천적 행동이 되는 셈이다.
 
이런 진지함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은 왜 그런 일에 진지한 지에 대해서 그다지 우호적인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동물의 생존권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너의 자식이 호랑이한테 물려도 그렇게 주장할 것이냐고 되 묻는다. 이것은 진지함을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지만, 말하는 당사자는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그 경험이 없어서 결국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진지함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 대부분은 실제로는 정말로 진지해져야 하는 행동 자체에서도 그것을 놓치게 된다.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결혼은 원래는 그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진지해져야 할 일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걱정을 해소하는 방향으로만 진행이 된다. 그것은 경제적 걱정, 제 때 짝을 만나지 못해서 몸 값이 떨어질 것 같은 걱정, 혹시나 자신이 상대를 잘못 선택했을 까봐 걱정, 서로 집안과 잘 지낼 수 있을 지를 걱정을 하면서 결혼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결혼은 삶의 동반자로서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물론 죽을 만큼 사랑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감정 역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기본이다. 만약 그것조차 없는데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 것은 시작부터 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우리는 동반자로써의 진지함을 들여다 봐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매우 일부의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론 중 하나로 인식을 한다. 즉, 걱정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인 셈이다. 그리고 운 좋게 선택을 잘한 이들은 평생 잘 산다. 하지만 반대로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었던 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나마 부부관계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연스럽게 진지해진다. 제대로 된 부부는 노후로 갈수록 점점 더 진지해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진지함은 성격과도 연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지해지지 못한다. 어떤 개인에게 진지함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할 경우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될 뿐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평생을 진지함에서 최대한 멀어져 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삶의 끝에는 죽음이란 최고의 진지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평생을 도망 다녀도 결국 최후의 순간엔 그 진지함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
 
너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만 여기고 뭐든 다 진지하게만 살려는 태도로 사는 것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칫하면 자신을 속이거나 연극이 되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자신을 삶을 가볍게만 여기고 쉽게만 살려고 하는 태도 역시도 문제가 있다. 이것은 결국엔 끝없는 도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가장 현명한 삶은 진지함을 늘 가진 채 최대한 밝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행복하면서도 신중하고 또한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걱정이 많은 사람은 결국 신경질적으로 변하거나 혹은 늘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것은 그 자신이 가진 걱정을 해결하지 못해서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 하지만 같은 걱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삶에 대해 조금만 더 진지해질 수 있다면, 그 많은 걱정은 어떤 면에서 삶의 깊은 단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걱정을 맞닥뜨릴 때 진지해진다. 즉 그것은 고칠 수 없는 병이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조차도 진지해지지 않을 방법이 있긴 하다. 그것은 철저히 그 걱정거리를 외면하고 사는 일이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란 해결 불가능한 걱정거리가 있으나 절대로 그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피를 보거나 시체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면서 불안해 한다. 하지만 또한 금새 또 잊는다.
 
하지만 이렇게 해결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최대한 진지해질 수 있다면, 이것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받아들임이다.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 최대한의 걱정인 죽음조차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오랜 시간을 생각하면 받아드릴 수도 있다. 물론 힘들지만.
 
그것이 바로 진지함이 가진 진정한 힘이기도 하다.
 
현재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큰 걱정이 없다면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그 행복 조건을 어떻게든 뺏기거나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평생을 거기에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 삶의 가장 흔한 패턴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욕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조건부이다. 언제라도 자신을 유지했던 돈이 부족하게 되는 순간 그 사람들은 깊은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하여 어떻게든 자신과 자기가 속한 가족의 이득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살지만 실제로는 단 한번의 진지함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조건만 유지된다면 죽는 순간까지 그 행복은 유효하게 된다. 이것 또한 대부분의 행복한 사람들이 그렇다.
 
단지 그들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행복한 순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행복만큼이나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아서도 안되고, 안다고 해도 기억해서는 안 된다. 또한 가끔 그것이 미안하다 싶으면 매달 몇 만원 정도를 기부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진지하다고 믿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의 양심을 세탁 하는 태도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꼭 기억해야 한다. 커피 노동자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 들인다고 해서 커피를 마냥 마시지 않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문제에 모두 진지해져서 어느 날부터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게 되면 커피 농사를 짓던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나은 노동 환경에서 그들이 일할 수 있게끔 해주는 쪽으로 고민을 해야지 단지 단순히 현재의 자신의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쪽으로만 결정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지함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걱정하면서 커피는 넘어가냐고 비웃기 마련이다. 이것이 진지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는 가장 잘못된 대접이기도 하다.
 
이 서로 잘못된 대접과 우리의 어리석은 존재적 한계는 결국 우리 전체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걱정 역시도 '인생무상' 이란 진지한 한마디면 모두 해결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 평생을 걸쳐 생각하고 살아야 할 문제가 된다. 진지함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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