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완벽한 믿음

아이루다 2014. 9. 24. 13:24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 있다. 꽤나 전문적인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보통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이 단어의 쓰임이 보편화 되어 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역시도 대부분 들어 봤을 것이며, 그 뜻도 제대로 알고 있을 것이다.
 
플라시보 효과는 일종의 위약 효과를 의미한다. 실제로 진짜 효과가 있는 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내린 처방에 따라서 그 약을 복용했을 때, 환자는 몸이 정말로 치료가 되는 것을 경험한다. 즉, 이것은 심리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실제로 육체의 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은 일종의 작은 기적이다. 아니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정신이라고 불리는 것과 육체라고 불리는 것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주는 끈은 바로 우리가 '믿음' 이라고 부르는 단어이다.
 
만약 환자가 자신에게 처방된 약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플라시보 효과는 끝이 난다. 즉, 원래 환자는 의사의 전문 지식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 약의 효능을 믿고, 그래서 플라시보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꼭 그 신뢰는 주는 사람이 의사일 필요는 없지만, 보통은 의사가 하는 말이 가장 신빙성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믿음이 실제적인 물리적 효과를 갖는 경우는 비단 플라시보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더욱 강력한 현상이 존재한다.
 
종교적인 믿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효과 중 하나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부정하겠지만, 어떤 신을 믿든지 상관없이,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실제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성모 마리아 상이나, 손에 성흔이 나타난 경우나, 귀신을 쫓는다는 스님이나, 우리가 미신이라고 무시하는 무당의 굿까지 모두 하나같이 동일한 원리가 작동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 원리가 바로 '믿음의 효과' 이다.
 
이런 종교적 믿음은 약을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약보다는 신을 더 믿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픈데 신에게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보통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는 신보다는 병원이 더 효율적이라서 그렇지 병원을 신보다 더 신뢰해서는 아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어떤 병원에 가서 어떤 치료를 받게 되는 것조차도 신의 의지라고 믿기도 한다.
 
아무튼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믿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이다. 그나마 어떤 고난이나 불행을 경험할 때, 자신이 믿는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할 만한데 대다수의 종교들은 개인들에게 닥친 고난과 고통을 그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써 설명하기도 한다. 즉, 개인에게 닥친 불행은 신이 개인에게 내린 시험의 일종으로 인식하는 것이니, 도대체 한 번 믿기 시작하면 그 믿음을 의심할 근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걔중에 불교는 종교는 특정 신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처는 자신들이 가야 할 목표이지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는 유일 신의 존재는 아니다. 혹시나 부처를 신으로써 믿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불교는 이렇듯 신에 대한 관점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와는 현저하게 다르지만, 여기에서도 당연히 신뢰는 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간 길, 즉 구도의 길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대로 가게 되면 그것은 피안의 길이며, 깨달음의 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믿고, 또한 그들이 믿는 부처님이 그 길을 갔다고 믿는다.
 
개인적인 입장으로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기타 수 많은 종교들이 가진 각자의 믿음에 대해서 특별히 딴지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종교는 바로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더해서 이 모든 믿음은 결국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이런 생각을 해보자.
 
만약 그 무엇이든 간에 단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무엇인가를 믿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어떨 것 같은가?
 
그것이 사상이든 종교든 우리 사회가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든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생겨난 믿음이든 간에 상관없이 어떤 것을 100% 믿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인 우리는 실제로 이것에 대한 경험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에서도 그것에 대한 정보조차 얻기가 힘들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지식과 생각과 사고와 검증을 통과한 100% 신뢰성을 가진 그 어떤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 당사자는 절대적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일단 그 답의 첫 번째 후보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람을 만나 본 적조차 없다. 하지만 정말로 무엇인가를 100% 믿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마도 그 무한한 신뢰에 숨이 탁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가 반박을 하거나 무시를 해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 비판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변호나 이견을 내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이 믿는 것을 의심하게 할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100% 믿는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 누가 자신의 믿음에 비판하고 의심하고 그 믿음이 틀리다 는 증거를 들이 대도 그것을 보면서 단지 빙그레 웃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만약 혹시나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 반박을 들었을 때 화가 난 경험은 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도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 아직 100%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100% 믿는 사람은 교회에 나갈 필요도 없고 예수가 있다고 증거할 필요도 없다. 절대적으로 믿는 것을 왜 다른 이들에게 증거 받으려고 할 것이며, 남을 왜 설득하려고 할 것인가? 만약 누군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고 있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죽느냐, 죽지 않는다 가지고 싸우질 않아야 한다. 서로 100% 믿으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싸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죽음을 100%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은 자신에게만은 100%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바로 죽음 후의 삶이 있다고 설명하는 종교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만약 절대적으로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사후 천국에 가게 된다든지, 끝없이 되살아 나는 윤회를 한다든지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명백한 믿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 역시도 무신론자들과 비슷하게 죽음을 두려워 한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무엇인가를 100% 믿을 수 있는 것이 실제로 존재 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쉽게 우리가 무엇인가를 완전히 믿고 있다고 흔하게 착각을 한다. 물에 빠지면 숨이 막힐 것이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다칠 것이다. 저것을 먹으면 맛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먹으로 남의 머리를 때리면 그 사람이 화를 낼 것이라 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까지는 발생하기 전까지의 확률이다. 우린 높은 위치에 있는 건물의 바닥이 단지 투명하게 되어 있어서 그 밑이 다 보인다면, 그 위를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느낀다. 시각 정보와 발바닥에서 전해오는 촉각 정보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뇌는 이 전체 상황을 이해를 해도 결국 시각에서 오는 정보로부터 얻어진 공포심은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린 이렇듯 우리의 오감 조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의 오감 자체도 흔하게 틀린다. 또한 그 오감으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해석하는 것 역시도 쉽게 틀린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절대적이지만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믿음' 에 대한 단 한번의 경험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완벽한 믿음이 주는 마음의 평화를 경험해 볼 기회조차도 없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럴 기회가 와서 어떤 것을 100% 믿는다면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흔히 광신도라는 말이 있다. 특정 종교에 완전히 빠져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들 역시도 100% 믿음이 없다. 그래서 자꾸 신이 시켰다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한다. 그 행동 자체가 바로 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믿는다면 신이 시켰다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들은 믿음에 충실한 것이 아닌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이들이다.
 
정말로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이들과 싸울 필요도 없고, 언쟁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으며, 나를 미친놈 취급하지 말라고 울부짖을 필요도 없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저 빙긋 웃을 것이다.
 
특정한 사상이나 신념을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믿는 그 가치가 왜 옳은지를 끊임없이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행동에 대한 당위성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해줄 수 있게끔 그럴듯한 이론들을 만들어 낸다.
 
이 모든 것 역시도 신뢰의 부족에서 나온다.
 
우리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거의 100% 신뢰의 관계로 보지만, 실제로 부모 자식 간에도 관계를 위한 표현이 필요하다. 즉, 이 말이 바로 우리가 그 관계 역시도 100%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 사회가 이런 혈연의 중요성을 그리 강조하는 모습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계속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매일 교육하고 있다면, 이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종교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종교 역시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서 확신이 없을 때 더욱 더 강하게 신의 존재를 증거하려고 한다. 우리는 부족할 때 그것을 강조한다.
 
무엇인가를 완전히 믿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사전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첫 번째는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절대적 가치일 것이다. 누구도 가치 없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머리 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반드시 타인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만 인정할 수 있어도 충분하다.
 
두 번째라면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머리 속에서만 떠오른 생각만으로는 무엇인가를 믿을 수 없다. 그 믿음이 실제로 현실에서 틀림없이 적용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다.
 
세 번째는 비판적 사고 방식일 것이다. 단순히 주입된 대로 받아 들인 생각은 언젠간 틈이 생겨나고 그 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더 벌어지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사고는 오랜 시간의 흔들림이 있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모여서 결국 단단해진 최종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살아 생전에 완벽한 믿음을 경험한 사람은 전체 인류 중 0.0000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그런 모습을 보여 줬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어떤 종교의 창시자로써 그리고 인간의 위대한 정신으로써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추앙 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따르는 존재의 완벽한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그들은 흉내를 냄으로써 자신도 그것과 유사한 경험하고 있다는 착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태도는 스스로를 쉽게 만족시켜서 자신을 보다 더 깊은 지성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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