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물리적 존재를 넘어서

아이루다 2014. 9. 15. 08:57

 
인간 문명은 매일 매일 발전되고 있다. 최신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광고된 어떤 기계들은 단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시장에서 퇴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 최신이란 오늘 하루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만큼이나 발전된 인간 문명은, 우리 자신을 꿰뚫어 보는 방법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인간은 이제 그 자신의 몸이 어떤 원리로 운영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이라고 알려진 과정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것은 알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원자들의 집합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 역시도 모두 원자들의 집합일지도 모르니, 너무 일반적인 정의이긴 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아가 우리의 몸은 화합물, 즉 우리가 분자라고 부르는 다양한 형태의 물질의 집합이다. 특히나 우리의 몸은 고분자 화합물이 많이 존재하는데, 각종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지방 모두가 그런 화합물이다.
 
연구된 것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총 46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각 유전자는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정보를 반만 가진 남녀 양쪽의 반쪽자리 생식 세포가 만나 온전한 하나를 이룬 후 10개월에 걸친 세포 분열을 하여 한 명의 인간으로써 탄생한다.
 
실제로 우리 인간의 몸은 온전히 물리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것은 마치 실제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정신' 이라고 칭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몸과 정신은 각각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 후 정신은 영혼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영혼의 개념이 생겨나면서부터 인간은 오래된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이다. 몸은 물리적 존재라서 죽는 것이 확실하지만, 만약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영혼은 영생한다.
 
그리고 이 개념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영혼이 육체의 삶의 결과에 따라 처벌을 받아 지옥이나 천국을 가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고, 어떤 종교는 영혼이 무한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틀린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두 잘못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 이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지금껏 어떤 인간도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죽음을 경험하고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길이 없다.
 
물질주의자들, 우리가 환원주의 라고 부르는 이들은 인간을 육체적인 존재로 단언한다. 그들은 인간이 물질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정신, 생각, 영혼 등으로 믿는 것은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작용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꽤나 그럴 듯 하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우리는 심각하게 육체에 예속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과정은 그저 몸의 피로도와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이 행복만큼 정신적이라고 믿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행복은 물질과 자주 비교를 당한다. 돈과 행복의 비교가 그런 예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처럼 인간은 오직 물질적일까? 솔직히 말해서 최근까지 나는 그것에 대해 꽤나 단호한 입장이었다. 즉, 나 역시도 확실하게 물질주의자 편을 들었다.
 
그런데 최근 나 자신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끼친 한 사람 때문인데, 딴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의 말에 솔깃한 것은 내가 부정하고 멀리하려고 하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에 대한 거부감이 실제로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정신과 영혼을 부정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가진 대책 없는 선입견에 대한 반발심이었던 듯 하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을 믿고, 마치 육체와 다른 어떤 것이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 모습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을 부정하는 나 자신보다도 훨씬 육체적으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육체와 분리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심지어 영혼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영혼을 주장하는 종교를 믿는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꽤나 염증을 느꼈다. 자신이 느끼는 그 모든 감각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실제로는 거의 그 자신의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가면서 그것에 대해서 단 한 차례의 의심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할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타고난 대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정신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육체가 소멸된 후에 남아서 영혼이 되어 영구히 보존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신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의심할 것도 없이, 그 신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에게 좀 심한 거부감을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내가 이런 거부감을 걷어내고 나면, 즉 종교를 거부하다가 보니 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혼의 존재를 거부하는 결과가 나왔음을 인정하고 나니, 딱히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은 자기 존재, 즉 '나' 의 존재에 대한 영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혼과는 의미가 다르긴 하다.
 
아무튼 이런 의식의 변화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것에 관련된 나 자신의 믿음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가끔 '신념' 이란 이름으로 치장되기도 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신념은 그저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불과하다.
 
신념은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실제로 신념은 사람을 견고한 껍질 속에 숨게 만든다. 그래서 사고방식을 경직시키고, 생각의 범위를 축소 시킨다. 즉, 우리는 신념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우리 인간은 정말로 엄청난 분량의 지식 체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최근 단 하루 동안 생성된 지식은 과거 수백 년에 걸쳐 쌓인 지식의 량을 초과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거대한 지식의 크기는 우리 스스로 믿는 것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을 가져다 주고 있다. 즉, 우리는 지식을 통해 자신이 느끼고 받아들이는 모든 경험적 결과를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사고 방식이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더 견고해지고 흔들리지 않게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수 많은 지식 중 일부를 선택한 후, 그것이 옳다는 다른 이들의 주장을 쉼 없이 반복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지식이 절대적 사실일 수 있다면 이런 태도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절대적 사실, 즉 진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다. 우리는 그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잘 맞아 보이는 지식에 한해서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모든 지식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다. 물론 의심이라고 말하니 부정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지식이든 간에 진리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너무도 똑똑하다고 알려진 사람이 말한 것이거나, 아주 오래된 과거부터 믿어진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주 단순한 예로 우리가 직선을 긋고는 두 점 사이의 최단 경로라고 주장해봐야, 우린 결국 결론적으로 곡선을 그은 것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구의 형태를 가진 공간 위에 있고 또한 우리가 보는 모든 공간은 중력에 의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우린 절대적인 직선을 긋는 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구의 한계를 벗어나 태양에서 목성을 잇는 거대한 직선을 그었다고 해도 결국 태양의 중력에서 벗어나 다른 중력 권에 들어가 이 직선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직선은 일그러진 곡선으로 보일 뿐이다.
 
아무튼 지식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고 나면, 비로소 물리적 존재로써 한계 지어진 인간의 존재적 경계가 확장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이것을 희망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은, 실제로 물리적 존재로써 자신의 한계점을 인정하고 나면 그 후엔 도대체 무엇인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없는 절망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영혼은 존재할지도 모르고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것은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영혼을 부정했던 나는 단지, 현 시대의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태도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설령 존재하든 말든 실제로 나와는 관계가 없다.
 
만약 영혼이 존재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없어지고 만다. 아마도 거기엔 내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차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 없다면 그것 역시도 괜찮다. 나 자신에 대한 영속성이란 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욕망인지를 알게 되면 그런 것은 그리 문제가 안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속성을 깨는 죽음의 존재가 그 생명체의 평생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 배경엔 존재의 사멸과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린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느낀다. 우리는 존재감을 통해 그 자신이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을 통해서 얻어진 자기 확신은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 올 때까지 철석같이 그것을 믿고 산다.
 
하지만 이것을 상대적으로 보았을 땐 어떨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오늘 죽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 없는 이들의 죽음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오늘 죽은 나와 관련 없는 이들의 죽음은 그저 죽음이다. 아무런 파장도 남기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만 번 일어난다.
 
우리들 자신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뛰어나든, 뛰어나지 않든 상관없이 신문에 그의 죽음이 기사화 되느냐 마느냐 정도만 차이가 난다. 그저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자신에 대한 믿음은 온전히 착각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에 대해서도 그렇지 못한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낀다. 자신의 아내, 남편, 애인, 아이, 아버지, 어머니, 친구를 소중히 느낀다.
 
그 소중함의 근거는 바로 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아내, 남편, 애인, 아이, 아버지, 어머니, 친구는 소중하지 않다. 즉 우리의 모든 가치는 바로 자신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인간이 누구라도 가진 평생에 걸친 착각이다.
 
물론 이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또한 이것도 좋다. 삶의 옳은 방향을 정의하는 것도 일종의 신념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욕망하고 집착하고 갖고 싶어서 안달하는 그 많은 것들이 실제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평생 동안 추구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작은 희망이 된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물리/화학적 활동의 총합이다. 우리는 육체라는 정밀한 유기체로 만들어진 기계 안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받아 들인 정보에 대한 반응을 통해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어떤 알지 못하는 차원에 존재했던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 영혼은 천국과 지옥을 가는 영혼이 아니다. 이것은 '나' 가 아닌 그 어떤 것이다. 하지만 '나' 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나'가 없어져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어려운 주문인가? 내가 모르는데, 내가 없어져야 알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애매한 설명은 나에겐 작은 희망이 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도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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