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두려움에 대한 잡설

아이루다 2014. 9. 4. 09:23

 
최근에 본 영화, 해무에서 그 배에 탄 선원들은 원래 심각한 인격 파괴자들은 아니었다. 설령 그들이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도,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역시도 어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 장시간 노출이 되면 평소엔 하지 못할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험은 흔히 전쟁터에 참가 했었던 군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데, 그것이 심각한 병증으로 나타나는 것을 '트라우마' 라고 부르기도 한다.
 
꼭 트라우마가 아니라도 어떤 장시간의 고통에 노출된 사람은 그 여파로 인해 정신이 파괴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문을 심하게 당한 사람은 헛것을 보는 증상이 나타나거나 불안 증에 떨며 평생 그 후유증 속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미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고문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신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몸 자체도 망가지는 것도 있지만,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정신의 파괴이다.
 
인간의 성장 과정을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갓난아이 시절을 거의 대부분 기억 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시기에 우리가 느꼈을 공포심을 지금 감당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는 어른에 비해 기본적으로 더 두려워한다. 그들은 어른보다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결국 그래서 아이는 같은 상황이라도 어른보다 훨씬 두려움을 크게 느낀다. 그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이 두려움에 대해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면 아이의 성격은 크게 엇나갈 수 있다. 부모의 사랑은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언제 어디서이건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때, 달려와 안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이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든 상황에서 선택 일 순위가 될 수 있음을 보장받게 해준다. 실제로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있어서 아이는 늘 일 순위가 된다. 물론 형제가 많은 아이들은 그들끼리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해결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평균적으로 첫째보다는 둘째, 셋째 아이가 더 정서적으로 안정적으로 자란다. 그것은 첫째가 의도하지 않게 해낸 성과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잘 키우고 싶어 한다. 그런데 또한 다들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은 이론적으로는 정말 쉽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면 아이를 두려움 속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깊이 사랑해줘야 한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에게 두려움을 없애준다. 그리고 이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토양을 만든 셈이 된다.
 
반대로 부모가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되어 아이를 사랑 하긴 하지만, 부모의 성격적 결함에 의해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아이는 결국 부모를 신뢰 하지 못하여 결국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된다. 이런 가정에 자란 아이는 그 부모처럼 비슷하게 자란다. 그래서 이것은 유전되는 형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물림 된다.
 
이것은 아이를 냉정하게 키우는 것만도 못하다. 부모의 일관성 없음은 자녀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모들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잘해준다고 노력해서 한 행위 중 일종인,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아이의 미래의 삶을 더욱 권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두려움에 대해서는 어른들도 역시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여자는 남자보다 더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신체적 문제로 인해 나타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세상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늘 안정적인 것을 찾는다. 남자는 여자들보다 두려움을 덜 느끼기 때문에 여자에 비해서 훨씬 더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은 남자라서가 아니라 육체적 능력으로 인해 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 우린 보통 남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아무리 두려움을 느껴도 성폭력과 같은 폭력엔 보통 노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로서는 몸이 가진 한계로 인해 오는 두려움이 된다.
 
물론 여자가 남자보다 더 안정적 이길 원하는 것에는 단지 육체적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본능이기도 하다. 육아의 주도적 책임감을 갖는 여자는 어떤 식으로든 아이가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것은 아이를 쉽게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는 좀 더 두려움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해보자.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다양한 경로를 통한다. 높은 곳, 튀어나온 못,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생긴 폐가, 어두운 밤, 정체 불명의 소리, 시험을 망친 후, 회사에서 큰 실수를 한 것이 알려졌을 때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도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실수로 사람을 치게 되었다면, 그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보통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하기에, 그 사람을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이 정말로 그 사람의 목숨인지, 아니면 자신이 살인죄인지 아닌지를 걱정하게 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내 경우라면 나는 후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꼭 전쟁이나 고문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정신적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이것을 경험하고 이럴 경우 꽤나 심각한 후유증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죄를 지었을 때 받는 타격은 꽤나 강력하다.
 
우리는 의도적이든 실수든 간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마음 속에서 두려움이 발생한다. 그것을 우리는 '양심' 이란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 그래서 평소엔 이 양심의 작동으로 인해 특별한 일이 없다면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양심 말고도 우리의 범죄를 막는 다른 정신작용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그 모두를 양심의 역할로 착각하곤 한다. 도덕심이나 공감능력을 통한 방식과 양심이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게 작동하지만 우리는 흔히 이것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못한다. 아무튼 양심에 꺼려하는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는 보통 답답함, 두려움,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이 양심은 원래 우리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양심을 사회로부터 교육받는다. 그래서 양심적인 것은 문화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살인과 같이 인류 보편적인 죄가 아닐 경우 한국인에게 양심에 찔리는 행동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는 아닌 경우도 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 쪽은 더 심하게 차이가 난다.
 
어떤 나라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며, 어떤 나라에서는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돕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예는 수 많은 나라마다 고유의 양심적 근거를 갖는다.
 
양심이 없는 사람, 즉 죄를 지어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 패스' 라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아마도 제일 유명한 것은 '사이코 패스' 와 '소시오 패스' 가 있다.
 
보통 전문적인 정신 분석 쪽에서는 이런 증상을 지닌 사람들을 공감 능력 부재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이들 중에서는 자신의 가족들에겐 매우 따뜻한 사람들도 흔하다. 이들은 공감 능력 부재가 아닌, 양심의 존재가 없는 사람들이란 설명이 더 맞다.
 
양심은 우리를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게 해준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우리가 양심에 꺼리는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이 양심 때문에 파괴된다. 즉 죄를 지은 사람은 죄가 아닌 양심이 일으킨 두려움의 구멍으로 빠져서, 결국 심하면 자기 파괴가 일어나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과정 중에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행복을 얻어내길 바란다. 행복은 궁극적인 우리들의 공통된 목표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점은 너무 행복 쪽으로 치우쳐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행복하고 싶다면 우리는 행복한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병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은 건강검진을 받을 때 시험을 보는 듯, 또한 그 결과를 받을 땐 마치 시험 성적표를 받는 듯 느껴지게 한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정확히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보통 행복 쪽의 표현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행복은 결과이다. 원인은 두려움이었으며, 운동을 하면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또한 몸에 활력이 생겨서 행복해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경우는 아주 많다. 노후가 늘 걱정인 사람은 매일 천원씩만이라도 자신의 노후를 위해 저축하는 버릇을 들이면 된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미래가 걱정되는 젊은이는 그 미래를 위해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자신의 능력 계발에 투자를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자꾸 행복 쪽으로 간다. 실제로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것을 낭비한다. 남들에게 잘 보여서 칭찬을 받기 위해 돈을 낭비하고, 행복해 보이는 다른 이를 따라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그 결과로 그런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잠재적으로 남게 되는 두려움은 계속 그 자신을 파괴 시킨다.
 
그리고 가끔 혼자 있을 땐, 숨겨 놓은 두려움이 날뛰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것을 위해 우린 TV를 보고 스마트 폰을 보려고 한다. 그 안엔 생각하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런 외면은 두려움을 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술을 먹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것을 잊기 위해 술을 먹는, 소설 어린왕자에 나온 주정꾼과 같을 뿐이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바로 그 두려움의 본질로 다가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높은 곳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쉽게 해결이 가능하다. 높은 곳에 안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어떤 두려움은 회피하고 싶어도 안 된다. 그땐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만 해결 가능하다. 그래서 우린 생각이 아닌 행동을 해야 결국 두려움을 극복해내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지를 알지 못해서 고민한다. 그런데 이럴 땐 어떤 일을 해야 자신이 행복할지를 고민하기 보다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거의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
 
두려움이 사라진 마음은 자연스럽게 행복을 느낀다. 또한 그런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을 해도 즐거울 수 있다. 그리고 두려움이란 단어를 걱정으로 바꾸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것은 원래 우리의 조상들이 행복을 얻는 방법론 이었기 도 했다. 우리가 이런 문명을 만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병과 자연의 위험함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가 일년을 살았음을 축하했고, 60년을 살았음을 축하했다. 우리는 단지 생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행복을 얻는 법을 잃어 버렸다. 우리에게 두려움은 이젠 너무 먼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두려움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존재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마음 속 두려움을 바라보고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혀 보라. 물론 아마도 대부분의 두려움은 당장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또한 많은 두려움은 오랜 시간을 통해 노력한다면 해결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해결책을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면 된다. 혹은 시작하지 않고 계속 행복을 찾아서 두려움을 잊고 사는 삶을 선택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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