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착한 사람들

아이루다 2014. 8. 25. 08:16

 
아마도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당신은 착하게 사는 사람 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아니오.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 라는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겉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착할 때도 있고 나쁠 때도 간혹 있죠' 혹은 '저는 그래도 나쁜 짓을 하고 살지 않아요. 적어도 주변에 피해는 안주죠' 라고 말을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는 많은 표현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대답의 대부분은 자신은 천사와 같은 착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 아니란 뜻을 표현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이 적어도 착한 쪽이라고 믿는 생각을 외부에 표현할 때, 가장 완곡하게 표현 하는 어휘이리라.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 속에 물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 나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기득권 층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나쁜 존재라고 믿는 사람은 자기 비하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도덕과 정의에 대해 끝없이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이란 개념이 만들어지고 가능하면 옳은 방향으로 살려고 한다. 그리고 사회 역시도 그렇게 사는 사람을 더 선호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아 결국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다른 하나는 계속 자기 비하를 하다가 인생을 망치거나 혹은 자살 하는 법이다.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냐고 물으면 고민할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앞의 해결책을 선택한다. 누가 자신의 삶을 양심의 가책에 눌려서 스스로 자학하거나 자살을 하길 바라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보편적 착함 증후군은(이제 이렇게 표현하겠다)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것의 기준을 바로 법으로 두고 있을 것이다. 법이 바로 우리 인간이 나쁜 것에 대한 기준점을 가지고 있으니 법을 잘 지키는 사람, 물론 사소한 법은 어기겠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준법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니 결국 착한 쪽이 되는 것이다.
 
또한 법을 조금 어기더라도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라고 해도 보통 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불법임을 알아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불법적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희석시키려고도 한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 양심적 가책을 받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해서 이미 벌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저지른 불법에 대한 스스로 처벌을 하고 있다고 자신도 모르게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이미 양심의 고통을 충분히 받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쁜 짓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리 철석같이 믿고 있는 법은 그리 명확한 선악의 구분 점이 아니다. 물론 종교적으로 규정된 기독교의 십계명과 같은 것들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구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또한 미래로 전달될 신이 말씀이지만 인간의 법은 시대에 따라 상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오늘의 합법이 내일의 불법이고 어제의 불법이 오늘의 합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의 여부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착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삼지는 못한다. 즉 착한 사람은 법을 잘 지킬 가능성이 높지만 반대로 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착함 증후군은 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착함에 대한 집착은 바로 착한 존재에게 허락된 사회적 생존 가능성에서 나온다. 우리 인간은 가능하면 착한 존재를 더 잘 도와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그것을 사회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사회는 개개인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우리를 위협하는 각종 문제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준다. 그것은 법과 공권력을 통해 공통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주변의 친구나 이웃을 통해서 사람마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종류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나쁜 사람을 정의하면, '현재나 미래에 나의 이득을 뺏어갈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둑, 강도, 살인마, 폭력배, 남편의 애인, 아내의 정부 는 모두 나쁜 사람이 된다. 반대로 좋은 사람의 의미는 '현재나 미래에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친구, 가족, 착한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 된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많이 사귀어야 인생이 행복해진다. 그것의 이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 자체가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 수록 이득을 잃기 보다는 얻을 가능성이 높으니 당연히 더 행복해진다. 반대로 주변에 나쁜 사람이 많으면 불행해지고 만다. 늘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작용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원리는 바로 우리가 그 자신은 이득이라고 느끼는 것을 상대는 손해로 여기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나는 별 손해 없이 해주는 일을 상대는 큰 이득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물론 돈과 같은 가치는 주고 받을 때 손해와 이득이 명확하지만 일손을 돕거나 힘든 일을 당했을 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들은 도움을 주는 사람에겐 큰 일이 아니지만 받는 이에겐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이득에 대한 주고 받음이 가능한 것이다.
 
도움을 줄 땐 작은 손해를 입으면서 주지만 받는 사람은 크게 받는다. 물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지인 중에 아픈 이들이 있으면 병원을 소개시켜 주거나, 어떤 좋은 정보를 알려 주거나, 남녀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거나, 자신이 쓰지 않는 어떤 물건들을 그것이 고가라고 해도 필요한 지인들에게 무상으로 주는 등의 노력의 예에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작은데 비해서 그 당사자들이 받는 느낌은 매우 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돈과 같이 명확히 가치가 결정되어 있는 것은 매우 직접적인 손해와 이득으로 이어진다. 물론 지인들끼리 작은 돈은 주고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큰 돈은 지인들이라고 해도 주고 받는 것이 아닌, 단지 빌려주고 돌려 받는 것 조차 꺼려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돈은 나의 손해가 상대의 이득이고 상대의 손해가 바로 나의 이득으로 온전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직접적인 것을 제외하고 나서는 많은 것들을 주변 사람들과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주는 것에는 옹색하고 받기만을 원하고, 어떤 이들은 주는 것을 좋아하고 받는 것에 그리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후자를 착한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사람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그 착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 물론 감당할 만큼 - 도와주려고 한다. 그러면 나중에 혹시라도 나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나쁜 사람들은 도와주더라도 도움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돈을 준다면 도울 수도 있지만.
 
착한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도와줄 때가 아닌 도움을 받을 때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이들이 어떤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를 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
 
이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사람을 선호하고, 모두들 착한 사람을 선호하니 그 자신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결국엔 우리는 자신이 착할지도 모른다는 착함 증후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 우리는 마음 한구석이 믿음직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즉, 우리는 실제로 미래에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낯선 이들에게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면 친절을 베풀어서 착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이런 선행은 우연하게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돌아 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미담이 되어 우리가 신문이나 책을 통해 접하기도 한다.

 

이것은 원래 착해야 하는 이유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단지 착한 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서를 안정시키는데 상당한 기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착하지 않게 살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아무도 도와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평생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 말을 잘 해석하면 이미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은 문제가 생겨도 돈을 이용해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되기에 딱히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성격에 따라 그런 환경에서도 착하게 사는 사람은 분명히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일수록 딱히 착하게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설령 그것을 느끼더라도 자신과 실제적인 이득을 공유할 사람들에게만 착하게 굴지 딱히 그런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낀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뭐 하러 착하게 굴려고 하겠는가? 물론 이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혹시나 자신에게 커다란 어려움이 닥치거나, 자신이 믿는 종교적 믿음에 의해 사후 천국에 가기 위해서 보험 삼아 착하게 구는 사람들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래도 보험이다. 큰 비용을 지불할 수는 없다.

 

이것이 부자들이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는 가장 이유가 된다.
 
그런데 가난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착하지 못함을 비난하고, 그렇게 혼자만 잘 살다간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도 있다. 자신은 착하게 살았으니 복을 받아야 하고, 부자들은 착하지 않게 살았으니 벌을 받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부자들은 그들 생각과 상관없이 그 자신들 역시도 착하게 산다고 믿고 산다. 단지 그 착함의 기준이 일반인과 차이가 날 뿐이다.
 
또한 그들을 비난하는 이들 조차도 자신보다 훨씬 못 사는 사람들, 즉 자신에게 어떤 이득도 주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에겐 그 착함을 잘 적용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착함은 앞에서 말했듯, 자신과 이득과 손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100억이 생기면 50억은 기부하고 10억은 친구들 주겠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100억을 가진 채 1년만 돈 많은 삶에 빠져서 살아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비를 현재의 삶에 맞추니 남은 40억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살겠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별로 높아진 생존 가능성은 사회 전체의 건강함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는 선한 존재라서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생존해야 하기에 착하게 산다. 우리는 사회에 속하지 않고 혼자 살게 되면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오래 사회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류 문명이 짧다고는 하나 벌써 수천 년이 지났고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명 안에서 태어나 문명 안에서 죽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상황이 되니 우리는 우리의 착함이 마치 우리가 가진 무엇인가 매우 좋은 인간의 좋은 면으로까지 평가하는 본질적 가치로 착각을 하고 산다. 말 그대로 착하게 사는 것이 절대적 가치인 냥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착함의 여부를 매우 중시해서 판단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착하게 살지 못하면 마치 자신이 삶을 매우 잘못 사는 것처럼 느끼는 착함병에 걸리기도 한다. 착한 것에 대해 너무 심한 믿음이 만들어 낸 증상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도 알게 된다. 자신에게 부탁한 많은 이들은 결국 자기를 이용해 먹은 것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당연히 착하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자신의 착함에 대한 본질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착하게 산다는 커다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또한 남을 비난할 때도 그 착함을 근거로 한다. 그 자신이 누구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할 거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 변질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명백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면,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자신이 믿고 있는 착함에 대한 큰 흔들림 없이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별 다른 생각 없이 자신은 적어도 착하게 살아간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되면 자기 상황이 변하고 환경이 변함에 따라 착함의 기준이 쉼 없이 변하게 된다.
 
우리는 착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야 좀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은 사회 속에서 소속되어 자신은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란 믿음과 함께 살아간다. 또한 살아가는 동안 다른 이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자신이 가진 착함을 증명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후 현재 자신의 환경 하에서 적용되는 착함의 기준점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착함을 평가하고 비난하거나 칭찬을 한다.
 
하지만 우린 나이를 먹음에 따라, 가진 재산이 많아짐에 따라, 자신의 자녀들이 선택하는 삶의 경로에 따라 착함의 기준을 끊임없이 변경한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 당시에 가지는 착함 기준점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비난하는 일은 절대로 그만 두지 않는다.
 
왜 착하게 사는지에 대한 이유에 상관없이 우리 인간이 착하게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믿는만큼 그리 착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사랑하지만 그 동물이 인간을 물면 바로 그 동물을 죽인다. 우리는 이렇듯 조건부로 착하다. 우리에게 큰 해가 없을 때만 착하게 대하고, 우리에게 큰 손해가 없을 때만 착하게 군다.

 

결국 우리의 착함은 위기의 순간이나 큰 이득이 걸린 상황에 놓이는 즉시 사라진다. 전 인류적인 위기가 닥쳐 문명이 무너지고 개인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도덕과 인간적이란 말은 거의 무의미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수 천년 동안 인류 문명을 만들어 온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문명이 무너지면서 없어질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덕과 인간적 이란 표현을 참으로 많이 쓰지만 실제로 우리의 이런 믿음은 거의 환상과도 다름 없다. 어쩌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우리가 믿을 수준의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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