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론 - 감정 바라보기

아이루다 2014. 8. 22. 08:21

 
인간에게는 감정이란 것이 있지요. 우리를 웃게 해주고, 울게 만들고, 화를 내게도 해줍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쌓인 이 감정의 총합이 바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라면 즐거움과 기쁨은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맡고 슬픔과 노여움은 반대로 행복을 줄여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꿈꾸는 우리는 가능하면 슬프고 노엽기 보다 기쁘고 즐겁길 바랍니다. 이것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느 깊은 산에 홀로 사는 사람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고통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복을 바라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공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바라는 이는 물 속에 빠져 공기가 부족한 사람이나 목을 졸려 숨을 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공기를 바랍니다.
 
행복을 절실하게 바라는 사람일수록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행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을 참고 이겨냈다고 해서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픈 것을 참고 해야 할 일을 하고 났을 때, 고통스럽지만 뿌듯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뿌듯함은 이성이 아닙니다. 말 그대도 느끼는 것입니다. 이성은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성을 감정을 대립의 관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성은 원래 감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이성의 역할은 단지 욕구의 조정입니다. 우리는 놀고 싶어도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면 참고 도서관에 갑니다.
 
당장은 노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행복하겠지만 우리는 압니다. 지금 놀면 미래에 행복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공부한다고 해서 절대로 합격하지 못하는 시험을 위해서는 누구도 이성으로 욕구를 누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다른 것을 하든지 아니면 노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근원이 되는 이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현명할까요?
 
물론 이 질문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을 다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감정은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느꼈다면 이미 만들어진 후이며, 이 후 우리들 대부분은 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감정이 우리 몸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노력합니다. 우리는 말투, 표정, 몸짓을 통해서 감정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오랜 훈련을 하게 되면 우리는 놀라울 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순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감정을 다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감정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해주지만 우리를 나락으로도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반드시 불행과 짝을 이룹니다. 불행함이 있기에 행복이 존재할 수 있고 행복이 있기에 불행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을 다루기 위해서 가장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바로 감정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정이 어떻게 우리에게 느껴지며 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기분이 크게 요동치는 상태가 아니라면, 최근 가장 화가 났던 일 세 개만 떠올려 보세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연인과 싸운 일,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스트레스 받은 일, 지나가다가 재수 없는 사람을 만난 일 등등 있을 것입니다.
 
만약 떠올랐다면 그때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참을 수 없는 분노나 세상이 무너질듯한 절망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 정도까지 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기분과 그것을 비교해보세요. 아마도 그 감정을 다시 생각하는 순간 기분이 조금 나빠졌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감정과 지금 감정은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화가 났을 당시엔 모든 것이 짜증나고 보기 싫고 그 어떤 것도 하기 싫었을 수 있지만 지금은 다르지요.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차분하게 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화가 났던 순간은 정말로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 감정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을 겁니다. 가까스로 화가 났음을 타인에게 표시 안 했을 수도 있지만 마음 속에는 오직 그 감정 하나만이 끓고 있었고 그 후 어떤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그것을 잊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이번엔 반대로 최근에 가장 기분 좋았던 일, 세 개를 떠올려 보세요. 그것이 원하던 대학이나 직장에 합격했거나, 너무도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했거나, 심지어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해도 그때 느낀 행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로 해서 매달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면 그것이 좋은 일이겠지만요.

 

즐거운 일은 화났던 일과 달리 일부로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하고픈 말을 이것 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어떤 특정한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우리는 온통 그 감정에 빠집니다. 기쁠 땐 세상이 모두 기쁘고, 슬플 땐 세상 모두가 슬픕니다. 화가 날 땐 그 어떤 것도 화를 달래주지 못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독점 욕구가 강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우리는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 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정을 이해해야 할 중요한 특징입니다.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 감정은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일 뿐입니다. 그리고 화가 난 기억이 많이 남으면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기쁜 기억이 많다면 그것을 행복한 삶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다면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의 불행을 가져오는 감정을 오래 끌지 마세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빨리 잊고 기억에 남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슬픔에 빠져 수 년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죽은 직후 엄마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은 자책감이나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변합니다. 아이 엄마가 수 년간 가슴에 담아 둔 것은 자신이나 남편에 대한 원망입니다. 엄나는 그것을 매일 매일 스스로 다시 상기시킵니다. 마치 그것이 희미해지면 아이가 정말로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워 합니다. 그때 사랑이나 슬픔은 본질이 아닙니다.

 

어떤 감정들은 정말 놓기가 힘듭니다. 수 년이 지나도 수 십년이 지나도 잘 안되는 것들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로 많은 것들을 시간과 함께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자책하거나 되새기면서 증폭시키지만 않는 다면 말이죠.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화를 내거나 슬픔을 느끼는 것의 이유는 바로 우리가 가진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떤 것들은 두려움 그 자체이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갓 결혼한 신부가 남편의 도박 취미와 자신이 모르게 진 빚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첫 번째 드는 생각은 바로 그 자신이 남자를 잘못 선택했는지에 모른다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일생에 한 번 하는 결혼에서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은 미래의 행복할 가능성을 많이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드는 감정은 혹시나 이혼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집이나 친구들이 이런 자신의 불행함을 알게 되었을 때 불행한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볼지 두렵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 두려움을 가져오게 한 남편에 대한 거대한 분노입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가능성을 뺏기면 화를 내고 슬퍼합니다. 고도의 정신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보편적 반응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었거나 친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이들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한 뒷담화를 알게 되면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분노는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을 합니다. 그 어떤 분노나 슬픔이 있을 경우에도 그 원인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불행할까 봐 두려워서 화를 내고 슬퍼합니다. 일어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현재를 불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낳았을 때, 우린 이미 장미 빛 미래를 모두 그려 둡니다. 자신이 행복할 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달성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 계획에서 아내는 남편이 가정적이고, 처가에 잘 하며, 명절 스트레스가 없게 해주고, 돈도 잘 벌며, 여자 문제도 없고, 자신만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집안 일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밤 일도 잘 하고, 시댁에도 잘 하면서, 육아도 잘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둘 사이에 낳은 아이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공부도 잘 하고 착하고 말도 잘 들으며, 커서 결혼을 해도 부모에게 효자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에서 작은 틀어짐은 쉽게 무시 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겪는 불행함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큰 일이 터지면 그것이 바로 드라마에서나 보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기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왜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많은 이들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장미 빛 미래를 꿈꿀 수 있지만 누구나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 자신만은 운이 좋아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심지어는 수 백 만분의 1의 확률에서 자신이 복권에 당첨될 것이라고 믿기까지 합니다. 그것엔 자신은 착하게 사는 편이고,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았으며, 가끔은 착한 일도 하고 살았으니 그래야 한다고 합니다.
 
착함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고사하고라도 실제로 착하다고 해도, 착한 사람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사람을 칠 땐 그 사람이 착한지 안 착한지 따지지 않습니다. 어리다고 혹은 나이가 많다고 봐주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불행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인성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능하면 착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하는 말은, 착하게 살면 이런 불행이 닥쳐왔을 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착함이 불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장미 빛 미래를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믿는다면 자기 망상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약속 받지 못했다면 우리가 미래의 우리의 불행에 대해서 그렇게나 심하게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는 아니지만 조금은 덜 힘들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 작은 생각이 바로 감정을 바라보는 가장 첫 번째 변화입니다.
 
운 좋게도 이것은 다시 또 다른 좋은 점을 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 자신이 가진 모든 좋은 것들, 즉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모두 당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물이란 생각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은 정말로 운이 좋아서 가진 것들이 됩니다. 물론 이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 번째 변화가 의미 있게 다가와 있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변화는 첫 번째보다 좀 더 극적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그리도 원했던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런 힘든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진 것으로만 충분히 행복해 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고 갖고 싶은 것이 가장 적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욕망의 숨은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그런 삶을 살고 있나요?' 라고 물으면 저는 부끄러워 집니다. 저 역시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단지 저는 이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겐 기분 좋은 일과 화가 나는 일이 생길 겁니다. 기분 좋은 일은 그냥 기분 좋은 것으로 끝내도 되지만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평소와는 다르게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나는 왜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제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친구가 약속에 늦었다면 '왜 나는 친구가 약속 시간에 정확히 나올 것이라고 믿었을까?' 라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혹시나 친구가 약속에 늦었다고 해도 그 자신이 요즘 즐기는 스마트 폰 게임에 한참 빠져 최고의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면 친구가 늦게 오는 것이 고마웠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그 동안 심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에 대해서 사회적 상식인 약속을 지키는 의무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친구가 미안하다고 말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심심해서 짜증이 났음을 상대에게 말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분노는 생각보다 엉뚱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을 좀 더 돌아보면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착각과 기대를 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조금 진지한 반성도 듭니다. 이것이 바로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감정을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나요?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해무' 감상문  (0) 2014.08.27
착한 사람들  (0) 2014.08.25
하나의 현상, 여러 개의 해석  (0) 2014.08.20
나의 찌꺼기  (0) 2014.08.16
양심과 두려움  (0) 2014.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