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하나의 현상, 여러 개의 해석

아이루다 2014. 8. 20. 10:24

 
과거로부터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주변의 사건이나 현상 등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즐겨왔다. 그 이유는 호기심일 수도 있고,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욕구였을 수도 있다. 혹은 새롭게 발견된 현상을 분석해서 뭔가 경제적인 목적을 가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란 말로 표현되며,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고, 그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이용 가능하게끔 해주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해는 바로 응용으로 연결되지는 않아도 우리가 사고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힌트를 던져주기도 한다.
 
따져보면 지금까지 문명의 발전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우리는 자연의 현상을 분석하여 그 밑에 감춰진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잘 이용해서 인간의 삶에 응용하고 또한 더 나아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는 것에도 사용하곤 했다.
 
모래를 고온으로 가열하면 유리가 만들어지거나 이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를 잘 조합시키니 멀리 떨어진 물체를 확대 시켜 볼 수 있게 되었거나, 몇 개의 재료를 섞으니 화약이 만들어지거나, 구리에 주석을 섞으니 훨씬 강한 칼을 만들 수 있거나 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지식을 탐구하는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의 대부분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에 대한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추측하는 일을 의미했다.
 
우리가 요즘 많이 하는 미래 예측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것들을 분석하고 현재의 상태를 파악한 후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하다. 물론 자료의 부 정확성으로 인해 가끔은 그 예측이 전혀 안 맞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 예상된 미래는 우리가 어디에 더 집중에서 준비해야 하는 지를 알려준다.
 
만약 그 예측이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힌트로써 작용하고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참고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당 시대엔 어처구니 없는 이론으로 취급되던 어떤 앞서 나간 이들의 상상력은 훗날 기술 발전의 역할로 인해 새롭게 재조명 되기도 했다.
 
아무튼 인간의 역사는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이용해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쌓는 과정엔 단 하나의 현상이지만 아주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의 생태계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현재 지구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종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종이 살게 된 현상을 분석하는 방법에 있어서 크게 신이 만들었다는 설과 진화를 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강한 충돌을 내고 있지만 확실한 결론은 낸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경우로 지구의 움직임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지구는 매일 자전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매일 한 바퀴씩 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관찰 결과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1년 단위로 태양의 높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태양은 동지엔 가장 낮게 뜨고 하지엔 가장 높게 뜬다. 또한 모든 밤 하늘의 별은 매일 4분 정도 일찍 뜬다. 단지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변화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특정 별들은 (지금은 행성이라고 부르는 존재) 다른 별들과 달리 지그재그 식 운동을 했다는 점도 설명될 수 없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기에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절대적 사실을 기반으로 인정하고 나면, 결국 우주가 돌아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가정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지구가 움직여야만 했다.
 
이 두 가지 예에서 보듯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을 할 때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각 해석의 기준이 되는 중요하고 확실한 사실이라고 주장되는 것을 과연 어디까지를 신뢰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다시 설명하면, 대상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연관된 수 많은 다른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다르게 정의되거나 해석되면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창조설의 경우에는 기반이 되는 진리는 바로 신의 존재에 대한 유무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이론은 나름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론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신의 존재가 있다거나 없다 거나를 완전히 결론내지 못했다. 물론 과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격신의 존재를 부정하긴 한다.
 
하지만 인류 전체 중 신을 믿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 되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신의 생명 창조설은 조금 다르다. 이것은 신이 있어야 한다는 절대 명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신이 생명을 창조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으로써 창조설을 믿는다.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신과 생명 창조는 그리 관련이 없다.
 
내 자신이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해서 지구가 자전을 하거나 공전을 하지 않는다고 우길 수는 있다. 그래서 내가 움직이지 않는데 하늘에 별과 해와 달이 움직이니 당연히 그들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구름이 흘러가듯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 사실로써 천동설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논리적 추론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어떤 이론을 주장할 때, 그 근거가 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개인의 경험이나 어디선가 들어 본 근거 없는 이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지구가 돌지 않는 이유가 내가 도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하니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은 정말로 생존에 특화되었을 뿐, 진리를 알아낼 능력은 없다.
 
그나마 이런 과학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는 체계적으로 또한 세계적으로 수 많은 과학자들이 논리와 수학을 통해 주장을 하고 그것을 반박하며 실험적 결과를 통해 최종 확인까지 진행한다. 거기엔 수 많은 논리적 오류가 있었을 것이고 착오나 잘못된 실험에 의해 엉뚱한 이론이 활개를 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는 다른 것들에 비해서 꽤나 적절하게 균형을 잡고 가는 편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정치 시스템이나 경제 체제 등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다.
 
물론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 역시도 다양한 이론을 내놓고 계속 검증을 받고 각자가 주장하는 이론들을 통해 가장 현실에 들어맞는 것을 찾아나가는 작업은 진행 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이 믿는 몇 가지 근거를 확신하여 자신만의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과학 이론과 같은 것들은 일반인이 이야기 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이해 수준이 높아서 일반 인들 사이에서 대화 주제가 되지 못하지만 경제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인들 역시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매일매일 자신이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것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근거는 매우 초라한 편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런 이야기들은 어디선가 들었거나, 신문의 기사로 본 것이거나, 자신의 경험으로 안 것이거나, 아는 이들이 한 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책을 보거나 교회의 목사에게 들어서 믿거나 혹은 죽을 고비를 맞은 어머니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을 계기로 믿거나,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다는 사실을 가만히 서 있어 보니까 움직이지 않더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과연 그런 개인적인 관점에서 겪은 경험이 왜 그렇게 확신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현재 겪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파악 역시도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우리의 한계라고 하고, 누군가는 어떤 존재들의 음모라고 하고, 누군가는 유태인들 때문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우리나라의 기득권 때문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각자의 욕망 때문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우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개인적 이론들의 근거를 들여다보면, 실제로 근거라고 말할 건더기가 하나도 안 보인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고, 옆집 사람이 말했거나 미국에 사는 친척이 전해준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근간으로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한치의 망설임이나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이 없이 자기가 믿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한다.
 
이런 태도는 자녀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이 어디선가 들어 본 그럴듯한 육아법을 가지고 아이를 가르치면서 그것이 자신의 자녀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어 의심치를 않는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제대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이란 것을 부모가 미리 정해준다.
 
슬프게도 우리가 이런 형태의 강한 아집을 들어내는 것에는 보통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이다.
 
우리는 음료수를 사는 단순한 행위에 대해서 어떤 집에서 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꼭 어떤 집에서 사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가까운 집이나 싸게 파는 집에서 사면 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할 수록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강요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최대한 고정시키려고 한다.
 
물론 흔들리는 배에서 고정되지 못한 사람은 더욱 흔들린다. 하지만 이 배가 침몰할 수 있다면 고정된 것들은 모두 같이 바다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탄 배가 영원히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구는 절대 파괴되지 않을 것이며,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싹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고 비가 오면 맑고, 맑음이 오래 지속되면 비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들은 그나마 자연 현상이라서 신뢰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기엔 너무 많은 변동성과 정답을 가지고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공부를 잘하게 만들려고 학원에 보냈는데, 가는 길에 사고가 나서 죽을 수 있는 것이 그리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 일이 내 자식에게만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 것인가? 아니면 이런 일들은 모두 불운한 자신의 이웃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인가?
 
우리의 삶 중에서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으며 우리들 인간 역시도 단 한 명도 완전히 같은 존재는 없다.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도 단 한 차례도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물에 발을 담근 우리는 바로 1초 전 우리의 모습과 다르다. 변화 량이 작은 이 모든 것은 잘 느껴지지 않을 뿐 끝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은 진리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밑도 끝도 없는 항상성을 믿고 신념과 믿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절대성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부정하는 이들과 크게 싸운다.
 
그렇지만 진리를 꼭 찾아야 한다면 변화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절대적인 근거가 되어 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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