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위로의 추억

아이루다 2014. 8. 15. 19:30

 
'굿 윌 헌팅' 이란 제목을 가진 영화가 있다. 멧 데이먼과 로빈 윌리암스가 나왔던 작품인데, 아마도 내 기억상으로 멧 데이먼의 데뷔 작품일 것이다.
 
이 영화는 천재라고 불리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졌으나 불우한 환경에 의해 한없이 삐딱한 수학 천재인 멧 데이먼과 그런 그를 이해하고 살아갈 인생에 대해 가르쳐주지만 또 다른 상처를 가진 선생님으로 나오는 로빈 윌리암스의 갈등과 이해 그리고 공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중에는 정말로 멋진 대사가 하나 나온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끝없이 삐딱하고 부정적인 멧 데이먼은 이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그렇게 반항하던 그는 눈물을 보이고 그런 그를 로빈 윌리암스는 꼭 안아준다. 그리고 이 순간 이 영화를 보던 관객들 역시도 눈물을 흘린다. 그들 역시도 그들의 상처를, 고통을 공감해준다.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이 대사는 참 멋지다. 무엇인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그려온 자신의 삶에 대한 끝없는 불만과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실망, 이런 것들은 분명히 영화 속 윌 뿐만 아니라 현실 속 우리들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삶이란 이 미묘한 여정에서 과연 누가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그 많은 이들에게 현재의 삶이 당신이 생각하고 가고자 했던 길인지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매우 운이 좋은 어떤 이들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남은 나머지 삶에서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한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이 의도된 것일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칼에 베었든, 종이에 베었든 갈라진 틈에서 피는 흘러 나온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쌓여가는 상처와 잘 아물지 못한 흉터는 보기 흉하게 우리 온 몸에 덮여있다. 육체에 받은 상처는 연고를 발라 치료하고 혹시라도 보인다면 옷을 입어 가리고, 화장을 해서 숨길 수 있지만 정신에 받은 상처는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치료를 하기도 힘들다.
 
또한 우리는 오직 타인에게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끝없이 농락해대는 이 운명이란 녀석 앞에서 늘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오른쪽 길을 가고자 했으나 길은 왼쪽으로만 뚫려 있다. 우리는 비가 오길 바랬으나 해가 쨍쨍한 날만 계속된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나 그것들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설령 허락되었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그것인지조차 불분명 하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힘들고 또 그만큼이나 멋진 위로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을 위로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위로는 바로 다른 이들의 공감이다. 아니, 꼭 그것이 다른 이들의 공감일 필요는 없다.
 
동네에 살아가는 고양이가 보여주는 우아한 점프에서, 하얀 구름이 떠가는 하늘에서, 붉게 물든 석양에서, 꽃 비가 날리는 봄의 어느 날 벚꽃 잎에서,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에서, 싱그러운 여름의 어느 날 푸름이 가득 찬 숲 속에서, 밤 하늘 쏟아지는 별 빛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회를 너무 많이 잃어 버렸다. 도시화 된 우리의 터전엔 자연은 그 모습을 거의 감춰버렸다. 여름철 매미의 울음 소리는 소음이 되어 버렸고, 맑은 하늘을 보는 날도 흔하지 않고, 도시의 불빛은 별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한다. 심지어 우린 달의 존재조차 잃어 버리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자신의 상처를 누군가가 봐줄 것이라고 믿고 글을 써서 올린다. 또한 자신도 다른 이들의 상처를 위로 해주러 다닌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의 행복 역시도 볼 수 밖에 없다.
 
상처는 치유되고 있는지, 아픔이 줄어들고 있는지, 진정으로 자신의 감정 앞에서 솔직한지조차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왜 이런 감정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에만 집중한다. 눈물이 떨어진 자국이 보이는 편지지와 그럴듯한 제목을 가진 책 한 권은 자신이 느끼는 감성을 대신해주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나 맛있어 보이는 케익 한 조각은 행복을 표현하기 위한 좋은 데코레이션이 되어 준다.
 
행복하다면 행복한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사물은 배치가 된다.
 
상처도 내가 입고 행복도 내가 행복한데 주목은 글이 받고 사진이 받고 댓글이 받는다.
 
우리는 그냥 말없이 안아주고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 줄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위로를 받기 위해 수 백, 수 천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글로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그것도 있는 그대도 쓰기 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이 조금이라도 피해자가 되도록 써야 한다.
 
우리들에게 로빈 윌리암스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냥 안아주고 한 마디 말만 해줄 그런 사람 말이다. 어린 시절 문턱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까져서 울 때, 그것을 보고는 문턱에게 '때찌' 하면서 혼내 줄 엄마만 있어도 울음을 멈출 텐데 말이다.
 
우리는 지금 울지도 못하고 위로 받고 싶다면 슬픔도 광고를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보고 대꾸하고 언제라도 되돌려 볼 수 있는 기술은 우리를 더욱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졌을까?
 
꾹꾹 눌러쓴 손 편지와 혹시라도 도착 후 비가 맞지 않을까 며칠을 우체통을 바라보던 그 시절의 행복은 이젠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 같다. 그렇다고 지나가 버린 과거를 마냥 추억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과거는 말 그대로 과거일 뿐,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현실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수단에 목을 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는 없다. 그렇지만 수단은 목적이 될 수 없다.
 
가끔은 그냥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서 물끄러미 희미하게 보이는 방안을 멍하게 바라보아도 좋은데 우리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5인치 작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엔 세상으로 가는 문이 있고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젠 만나서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기억을 잃어 버렸다. 다들 외로운데 다를 홀로 있길 바란다. 너무 혼자 있어서 이젠 같이 있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할 뿐이다.
 
이젠 혼자 죽는 것도 익숙해져 가고 있는 세상이다. 가장 큰 두려움을 앞두고도 우리는 다른 이들의 손을 잡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오늘도 더 두꺼운 마음의 벽을 만든다. 그래서 이미 상처 입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인가.
 
*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암스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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