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양심과 두려움

아이루다 2014. 8. 16. 08:01

 
어제 잠들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본 영화 한 편에서 우연히 무엇인가 머리 속을 뚫고 들어온 듯한 대사 하나를 발견했다.
 
이 영화는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어떤 악당과 그 밑에서 일하게 된 똑똑하지만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줄거리 전개 상 영화 중반부쯤에 젊은이는 일종의 시험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계약이 성사되면 큰 인센티브를 받기로 한 약속이었는데, 처음으로 그런 협상의 자리에 나간 젊은이는 상대의 추가적인 요구에 응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악당인 자신의 보스에게 되돌아 오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협상을 다시 하기 위해서 어느 선까지 협상이 가능한지에 대해 보스에게 묻는다.
 
하지만 보스는 단순하게 말한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하지만 계약은 맺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가 돈 말고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게 되면 계약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상대 계약자가 자신이 얼마 전 얻은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과 함께 납치나 협박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은 순수한 이 영화 속 젊은이가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묵직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보스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런 대사를 이어 간다.
 
"지금 너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을 것야. 그런데 그건 너의 양심이 아니야. 두려움일 뿐이지"
 
이 대사는 영화가 끝날 무렵에 다시 한번 의도적으로 반복이 된다. 그러니 아마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꽤나 비중을 두고 만든 대사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이 대사는 그 순간 나에게 순간적으로 충격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아마도 이 젊은이가 상대와 협상을 맺기 위해서 쓸 수 있는 할 카드는 많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매우 비인간적이기도 할 것이고 어떤 것은 재치 넘치는 것일 수 있다. 아무튼 어떤 종류의 협상 대책이라고 해도 그것이 상대의 약점을 찔러서 얻어 낸 것이라면 협박임은 틀림 없다.
 
아무튼 여기에서 내가 느낀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비양심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해온 것이고 예전에 이 블로그에 글로도 썼었다.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이유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닌 범죄를 저지른 후 그것이 걸려서 자신의 삶이 망가지게 될까 봐 두려워 하는 것이란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나쁜 쪽, 즉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일 경우에 한한다는 적용 범위적 한계가 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런 나쁜 짓을 할 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굶어 죽지도 않고, 생명의 위협을 크게 느끼면서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러니 약간의 상황 판단력만 있다면 필요도 없는 나쁜 짓을 하여 법적 처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
 
물론 어느 정도 필요가 있는 경우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오래 동안 배운 도덕의 힘이며, 타인의 시선이며, 남은 삶에 대한 걱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직 자신에게 한정되는 경우가 흔하다. 자신이 굶는 것이 아닌, 가족이 굶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한가롭게 도덕심을 발휘하고 있을 사람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죽는 그 순간까지 양심을 지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들로 인해서 양심과 두려움에 대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문제는 내 자신이 이런 사람이 아니라서 정말로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내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유추를 한다면 그들 역시도 강력한 자신의 신념과 살아온 생애에 대한 일관성 그리고 줄일 수 있는 욕망으로 인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양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란 말은 정확히 맞는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우리는 딱히 그것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그로 인해 자신이 무너질까 봐, 주변 사람들이 알면 실망할까 봐, 법적 처벌을 받을까 봐, 미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 하여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나쁜 행동에 대한 양심의 역할은 이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양심 선언이나 타인의 곤란함에 적극적으로 껴드는 선한 의도의 행동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보통 사람들은 나쁜 행동에 저항력은 어느 정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선한 행동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는 선하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일반적인 경우엔 타인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나쁜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선한 행동은 선택 가능한 것이다.
 
물론 선한 행동은 다른 이들의 좋은 평가를 이끌어낼 수는 있다는 좋은 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행동을 통해 사회적 평판을 올릴 순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 쉽게 받아드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 인간 사회에 선한 사람들은 드물다.
 
우리의 양심은 나쁜 일에도 사용되지만 이 좋은 일을 할 때 더욱 크게 부각된다. 불의를 보고 참거나 옳지 않은 행동에 동참하지 않는 결단의 근원엔 보통 이런 양심에 대한 고백이 함께한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자신이 믿는 양심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선한 의도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자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존재이지만 또한 우리는 타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내 놓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과거 우리 인간의 발달된 역사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후자의 상황에 대한 것은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발달 시켜온 일종의 종족이나 사회 혹은 무리에 대한 충성심일 수 있다.
 
크게 보면 인간 전체에 대한 이득은 개인의 희생이 있을 때 더욱 커질 수 있다. 금방이라도 폭탄이 터질듯한 긴급한 상황에 용감히 나서서 폭탄을 가지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는 한 개인의 모습은 충분히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용기가 부족할 뿐 누구도 이런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지는 않는다. 설령 자신이 악당이라고 해도.
 
이런 희생은 다른 이들의 칭송과 애도를 얻어낸다. 용감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파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은 말로 구술되고 책에 적혀 후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에고는 이것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 순간 선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순 있지만 가끔은 우리가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시점에 죽는 것이 가장 괜찮은 죽음인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죽음을 선택한 후 당사자는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그의 행동은 그의 가족과 후손에게 큰 이득을 챙져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꽤나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 사업이 망해서 무일푼이 되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사망 후 보험금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서운 유혹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이득을 받는 좁은 범위는 상황에 따라 인류 전체로도 충분히 커질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이 해야 할 희생의 몫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희생이 더욱 값지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 있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꽤나 스스로 만족스러워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개미 집을 지키기 위한 개미들의 맹목적인 희생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한 크게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도 아니다. 개미는 본능적으로 희생하고 우리는 생각하고 만족하고 희생한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이젠 선한 행동에 대한 양심의 역할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우리의 선한 행동은 비록 목숨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원리에 의해서 동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선한 행동을 했을 때 말 그대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우리가 가족에게 돈을 백만원 주는 것은 선한 행동으로 평가 받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지나다가 거지에게 천원을 건내는 것은 선한 행동으로 인정 받는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선한 행동이라고 정의하는 것의 본질적 모습이다.
 
우리는 어떤 이득을 바라지 않고 인간 전체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게 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인정을 받게 된다는 행복감을 얻는다. 즉 이것은 보통 자신이 양심적인 사람이란 착각을 불러일으켜 우리 자신을 좀 더 나은 존재로 인식하게 해준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큰 손해를 입거나 혹은 자신이 그리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그 기준점은 모두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득을 얻지 못하면 손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이것은 교육을 받은 것일 수 있으며 또한 오랜 무리 생활을 한 우리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일 수 있다. 우리는 상처 입은 동료를 도와줘야 언젠가 나 자신이 상처 입었을 경우 치료 받을 수 있음을 안다. 즉, 누군가에 대한 선한 행동은 미래에 내가 받을 수 있는 선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자신이 선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 꽤나 자기 만족이 높은 편이다. 그것은 누군가 우리 자신을 좋은 존재로써 평가해주는 직접적인 보상도 존재하지만 오래된 이야기처럼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 다는 이야기나 혹은 자신이 믿는 신이 언젠가 줄 현생이나 혹은 사후 세계에 받게 될 보상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한 행동에 대한 여러 각도의 분석을 하긴 했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렇게 자질구레하게 많이 적을 필요도 없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한 행동이란 것 자체가 원래 개인별로 판단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말은 누군가에겐 이해 안될 정도의 어떤 이의 선한 행동이 그 당사자에겐 전혀 새롭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모든 판단을 자신의 잣대를 통해 판단하기에 이런 오판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한 행동이 너무나 큰 자기 손해를 감수하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인간의 양심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보일 수는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이 당연하고 또 별 것 아니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매우 쉽게 이해가 된다.
 
정말로 만약 우리가 선한 행동을 했을 때 아무런 마음이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왜 하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쁜 행동과 달리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두려움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를 만큼 순수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선한 행동은 그것이 아주 작더라도 어떤 다양한 계산법이 작동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것마저도 초월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개인의 종교나 신념에 대한 믿음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양심은 우리가 만들어 낸 허구의 개념일 수 있다. 아니, 현실적으로 냉정히 바라보면 우리 인간은 양심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믿는 양심이란 것이 정말로 그리 순수한 의도를 가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도덕적 판단이라면 말이다.
 
당연히 우리의 나쁜 행동이나 선한 행동은 모두 완벽한 순수함으로 근거로 할 수는 없다. 물론 그 결과는 완벽한 순수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단지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내면적 욕구를 표현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고 또한 물어보는 것도 하지 않는다.
 
어떤 위대한 인간의 희생이 알려졌다면 이것은 종족 전체로 전파되어 또 누군가 미래에 그런 존재가 나타날 수 있게끔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존재들이 모인 무리들 보다 이타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무리들의 미래가 훨씬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다. 실제로 어떤 의도였든 간에 이기적 존재로써의 한계를 벗어나는 위대한 희생은 우리들 전체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양심을 가진 존재라는 금칠을 하는 것은 조금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양심이란 단어를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면 이 글 전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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