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험의 한계

아이루다 2014. 8. 5. 07:25

 
최근에 읽은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그 책은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이 쓴 책이었는데, 책을 쓴 저자가 왜 종교를 믿어야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아니, 아마도 왜 신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질문자는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데, 왜 신을 믿고 종교를 가져야 하는지' 를 궁금했다고 하는데,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책 저자의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대답이 생각보다 좀 옹색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힘든 일을 당하고 어떤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부딪힐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종교와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식의 대답을 했던 것이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질문자처럼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무신론자로 살아도 되고, 불행한 사람들만이 신을 믿는 것인가?
 
물론 미래에 닥칠 불행에 대비해서 신을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지금 당장 행복하다고 해서 죽기 전까지 행복할 수도 없고 거기에 더해서 죽음은 최대의 불행이면서 누구나 맞이하게 될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대답에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현재의 자신의 불행함이라니.. 이것은 좀 아니다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에 대해 조금 알게 되고, 이 서툰 지식을 이용해서 누군가에게 상담을 해주거나 혹은 좀 더 발전해서 책을 쓰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 받는 멘토가 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살아가는 동안에 참 많은 사람들의 구구절절 한 사연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동안 배운 학문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 이런 형태의 간접적 경험을 통해 삶을 그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패턴의 분류이며, 지식의 심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정보 취득의 편협성이다.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은 늘 누구에게나 고민을 듣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생활을 오래하면 그 스스로 모든 사람은 고민을 하고 살아간다고 믿게 된다. 이것은 마치 병원의 의사가, 모든 사람은 병을 가지고 산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의사 말처럼 모든 사람은 병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맞다. 세상에 아무런 병도 안 걸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사마귀나 티눈일지라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병을 가지고 있으니 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병에는 경,중의 차이가 있다.
 
고민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떤 고민들은 그냥 듣고 넘길 수준이 있는 반면, 어떤 고민은 너무 무거워서 듣는 이들조차도 힘든 것들이 있다.
 
최근에 들었던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다.
 
'사람들과 어느 정도까지 친해지면 모두 다 행복하게 사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 보다 좀 더 친해지면 보이는 것만큼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말이 꽤나 제대로 삶을 꿰뚫어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걱정거리와 남들에게 말 못하는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자신의 불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 중에는 누군가를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기도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는 사람은 자신이 자주 찾는 어디 게시판에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적기도 하여서 타인의 위로나 판단을 받으려고 한다. 우리나라에 이런 종류의 게시판은 꽤나 많으며 매일 수 많은 새로운 글들이 올라온다.
 
다른 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얻든 어느 게시판을 통해서 얻든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타인의 고민들을 듣다 보면 정말로 인생은 고해이고, 불행의 연속이고, 누구나 바람을 피우는 것 같고, 결혼은 미친 짓 같다.
 
이런 비슷한 증상이 하나가 더 있다. 인터넷은 주로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이들이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현재의 야당에 우호적이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수 많은 인터넷 공간은 여당을 견제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곳만 보면 세상은 마치 야당의 전성 시대로 느껴진다.
 
그런데 선거를 치른 결과를 보면 이것과는 정 반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찻잔 속 태풍이라고 하고, 우물 안 개구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민 상담에 대한 경험이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경험 모두 동일하게 정보 취득의 방법이 편향되고 거기에 그 정보를 취득하는 당사자들 역시도 편중된 방식으로 취득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는 심화된다.
 
아주 오래 전, 정신과에 간 적이 한 번 있는데, 그냥 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 놓으니 나에게 잘 왔다고 했다. 나의 주변 상황을 듣고는 내가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던 것이다. 그 의사가 돈을 벌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한 번 가고 말긴 했다.
 
이유는 그냥 좀 웃겨서였다. 당시 내가 말했던 주제는 공부를 잘하는 누나들과 재수생인 나의 처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평소 나는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의사에게 이야기 하니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했다. 물론 심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했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믿는 개인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특징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정말 깊은 고민은 타인에게 털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려면 정말로 대단한 신뢰가 있거나 혹은 자신의 상태가 그 문제로 인해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남들이 털어 놓는 고민들은 그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생각할 만큼 견딜 만 한 것이기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 가에게, 고민 해결사에게, 행복 전도사에게, 멘토에게 전해지면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타인의 불행에 대한 데이터가 매일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서 책을 내고 강연을 하면서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어 낸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모두 남에게 이야기할 만한 내용이라서 알려진 것뿐이다. 정말로 깊은 고민은 숨겨져 있고,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는 다수는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매우 한정적이다. 학교를 다닐 시기는 그렇다고 쳐도, 대학교만 되어도 적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취업이나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경제 생활을 하게 될 때 이것은 더욱 심화 된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은 모두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포진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정보를 전달해주고 이런 이득관계는 그들의 우정을 돈독하게 해준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이기적으로 보이는 관계이지만 훨씬 오래가고 행복에도 큰 도움이 된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뭔가 문제가 있고 심각하고 걱정거리도 많다. 그 자신도 그렇고 남들도 그러니 인생이 아주 그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딘가 바라보고 어딘가 글을 읽다 보면 세상 모든 이들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많은 것을 깨달은 듯 처신하지만 결국 그 사람을 결정한 것은 한정된 인간 관계와 편협 된 지식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남자는 대부분 바람을 피운다고 믿고 어떤 이들은 그 자신의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어떤 부부의 주변은 행복하게 다 잘살고, 어떤 부부의 주변에 온통 이혼한 사람 천지다.
 
어린 시절이나 혹은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외모적 문제, 집안 문제, 성격 문제 등에 대한 타인의 날 선 비판이나 혹은 근거 없는 비난에 의해서 상처 받아 결국 그것을 평생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좀 잘 생각해보자. 그 사람에게 상처 준 사람의 숫자와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의 숫자를 비교해보자. 과연 상처 준 사람은 몇 명이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은 몇 명일까? 이게 비교나 되는 숫자일까?
 
장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경험을 한다. 대다수의 손님은 그냥 그렇다. 좋은 손님도 가끔 있고. 그런데 정말로 일년에 몇 번 경험하게 되는 진상 손님을 경험하게 되면 그 순간 장사를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전에 친절했던 손님이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다수의 손님에 대한 인식은 모두 사라지고 머리 속에는 오직 이 진상에 대한 기억만 남는다.
 
이런 사람이 친구가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말리게 된다. 99%의 손님을 대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1%의 진상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장사를 하지 말라고 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99%로 법을 지키고 살다가도 단지 단 한 번의 실수로 범법 행위를 하면 감방에 간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확률로만 계산할 수는 없다.
 
감옥에 가면 모두 억울한 누명에 씌었고, 병원에 가면 모두 죽을 병에 걸렸고, 이혼 법정에 가면 온통 문제 있는 가정 투성이다. 유흥가에 가면 모든 여자들이 돈에 환장하여 몸을 파는 것으로 보이고, 포르노를 보면 모든 여자들은 섹스 중 오르가즘을 느끼고 신음소리를 낸다고 믿게 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해외 여행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여자들은 명품 하나쯤은 모두 가진 것 같다. 또 그런 이야기를 듣는 남자들은 여자는 모두 명품을 좋아하는 허영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자신의 취미를 위해 카메라를 하고 오디오를 사고 차를 튜닝하면서 수천 만원이 넘는 돈을 쉽게 쓴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쓴다. 하지만 시간은 낭비로 계산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가 경제력만 밝힌다고 믿고 여자는 남자가 외모만 밝힌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이 모두 날씬하고 가슴 큰 여자만 좋아한다고 믿고 자신의 몸에 칼을 댄다. 남자들 역시 능력만 갖추면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데, 그 근거는 TV 속에서 본 드라마와 친구들이 한 이야기이다.
 
고민 상담을 주로 하는 스님의 눈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문제가 있고 행복하지 않으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가짜라고 말한다. 이미 자리를 잡은 기성 세대는 이제 사회에 막 진출하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지고 도전하고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자신의 20대는 기억하지 못한다.

 

20대가 느끼는 책임감과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과 40대, 50대가 되었을 때 느끼는 것은 비교가 안될 만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누구나 현재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한다. 그래도 혹시나 20대나 50대나 마찬가지라면 둘 중 하나이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현실적이거나 혹은 30년 동안 아무 것도 못 배운 사람이다.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비슷하기에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각종 문제들은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것을 풀어내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경험과 편중된 인간 관계를 통해 얻은 공통의 해결책을 기반으로 또 다른 이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어리석음을 늘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좋은 해결책이 다른 이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부부 중 한 명이 바람을 피울 경우, 이혼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덮고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직 한가지 방법, 신뢰를 잃었으니 절대 같이 살지 못한다라는 말만 한다. 물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늘 맞지는 않는다.
 
젊은이가 취업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일단 작은 기업과 작은 연봉이라도 들어가서 경험을 쌓으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경력을 쌓고 난 후 대기업을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사례를 들었거나.
 
하지만 그럴 확률이 1%도 안 된다면 정말로 그런 조언을 하는 것이 옳을까? 그리고 그렇게라도 눈을 낮춰서 회사를 들어간 사람이 그것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란 얼마나 될까?
 
도대체 우리는 그 코딱지 만한 경험과 그 만큼이 또 작은 사고의 범위를 통해 얻은 대책 없는 결론을 어떻게 그리 자신하면서 타인에게 조언을 하고 주장하고 신념화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의 좁은 경험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하는 한계점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에게 고민을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그 스스로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힘든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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