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의 최소 조건

아이루다 2014. 8. 3. 12:22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가 사는 이유라고 알고 있는 행복이란 단어가 생겨난 것이 겨우 19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조선 후기인 개화기에 영어로 된 문서를 해석 하는 중  'happiness' 란 단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데, 이후로 100년 조금 넘은 시간이 지난 뒤 지금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단어로 알려져 있다.
 
또한 happiness 라는 영어 단어 역시도 서양 역사에서 만들어진 지가 200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 신조어는 그 전까지는 일종의 운이 매우 좋다는 뜻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단 한 권의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이니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행복은 생각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과거엔 명확하게 표현할 단어가 없었을 뿐, 누구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싫어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 용어는 몰라도 현대의 행복의 개념을 향해 살아갔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원래 행복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믿고 사는 것과 가끔 행복하면 좋은 것은 차원이 다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행복하지 못한 삶은 나쁜 것이며, 악이며,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고 해서 모든 이가 행복할 수는 없다. 특히 이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 그 자신으로부터 온전히 나온 절대적 행복이라면 그나마 누구나 행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지만, 다른 이와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상대적 행복이라면 아예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등산이 너무 좋은 사람은 그냥 등산을 하면 행복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등산을 좋아하면, 물론 산은 사람으로 메어 터지겠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있다. 그런데 등산을 가는 것도 좋지만, 등산을 가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산을 오르는 것이 좋은 사람은, 1등을 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이가 1등을 하는 즐거움을 얻으려고 노력하게 되었을 때, 결국엔 순위가 갈리고 상위 50%는 승리를, 하위 50%는 패배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체의 반만 행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 행복과 상대적 행복의 차이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행복은 상당히 상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부를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공부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그 결과인 성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는, 상대적 행복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라란 아이들은 스스로 행복한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늘 누군가와 비교하여 얻는 행복 방식으로 발달하게 된다. 물론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이것에 대한 문제점을 깨닫고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혹은 타고난 성향에 의해 자연스럽게 남과 비교하기 보다는 스스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들조차도 살아가면서 끝없는 주변의 간섭을 받게 된다. 배우는 일, 일하고 돈을 버는 일, 결혼, 출산과 육아 등등 우리 인간이 하는 보통의 삶에서 주어지는 큰 숙제들을 풀어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생각 보다는 남의 의견과 참견이 더욱 심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는 이것을 충고, 현실 반영, 철듦 등으로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적 행복의 세계에 적응하라는 암묵적 강요에 가깝다. 그래서 평범하게 살아야 하고, 남들처럼 살아야 하고, 모난 돌은 정 맞는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것은 현재 우리의 현실이고 이미 고정되어 있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목 터지게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단지 상대적 행복론이 자라 잡은 세상에서 누군가 좀 더 행복해졌다는 것의 의미는 또 다른 누군가 좀 더 불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인식은 해봐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매일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상대적 행복이 주요 행복인 사회에서 행복이 좀 더 늘었다면 그 자신은 분명히 행복해졌겠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곳에서 행복을 원하는 다른 이는 행복이 줄게 됨이 명확하다.
 
30등이었든 사람이 29등이 되면 1등의 순위가 올라서 행복하지만 누군가는 29등에서 30등이 되어 불행해졌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아서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온전한 행복에 집중하지 못한 채, 자신이 얼마나 남보다 잘 되었는지, 아니면 남이 얼마나 자신보다 잘 되었는지 만 신경 쓴다.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했을 때, 우리가 그나마 선택 가능한 행복에 대한 길은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알아야만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비교하라는 것과 가능하면 참여자가 적은 곳에서 경쟁하라는 것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공부를 통해 이뤄낸 결과로 승부를 내고 그 순위를 통해 행복을 얻는 분야로 가면 이것은 불행을 스스로 찾아가는 길이다.
 
돈을 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로 승부를 내는 분야에 머무르면 평생을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했어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사는 분야에서 경쟁하게 되면 패배자가 된다.
 
권력을 얻을 능력이 안 되는 이가 권력을 얻어야 승리한 존재가 되는 분야에 가면 죽는 순간까지 자괴감과 열등감에 시달릴 수 있다.
 
못 생긴 사람이 외모를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면 늘 패배자가 되어서 성격 파탄자가 되기 쉽다. 그리고 외모는 돈과 함께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행복 분야이다.
 
누구나 하는 결혼과 출산을 통해 얻는 행복은 많은 이들이 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성공한 사람이 눈에 자주 띄게 된다. 돈이나 권력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추구하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이 끝없이 노출이 되어 자극으로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 것일수록 자주 더 방송이나 기타 모든 대화 주제에 자주 노출이 되고 그럴 때 우리는 타인의 불행과 행복에 대해 끝없이 정보를 얻게 됨으로써 더욱 불행함이 심화된다.
 
우리는 누군가 책을 엄청나게 소유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신기해하고 어떨 경우엔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존경하기도 한다. 거기엔 부러움은 약간 있을지 몰라도 시기도 질투도 불행함도 없다. 그냥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기에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나갈 수 있다.
 
우리는 외 발 자전거를 타고 10개의 공으로 저글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자신이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또한 그런 사람을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질투하거나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함을 불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재미난 소설을 읽을 때나 재미난 영화를 볼 때 그것을 즐기면서 행복해 하지만, 그 자신이 소설가나 감독일 때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단순히 즐기지 못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문제점을 찾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런 틈을 찾으면 독설을 날리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
 
어떤 분야에 소속되면 그 분야에 있는 다른 잘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열등감이 폭발하여 그로 인해서 고통과 불행함을 맛본다. 독설을 날리는 순간은 짜릿할지 모르지만 그 자신은 자신이 독설을 날린 책이나 영화를 만들어 낸 작가나 감독의 능력에 반도 안되어 평생을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예를 들어 어떤 책을 읽을 일이 평생 한 번뿐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 자기가 쓴 글보다 잘 쓴 글을 보는 것이 반복되면 정말로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불행한 사람의 눈에 다른 아이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버텨내지만 매일 매일 다른 아이들을 키우는 행복한 다른 가정의 모습을 계속 접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분야를 잘 선택하고 또한 그 선택한 것 중에서도 좀처럼 행복하기 어렵다면 최대한 흔하지 않는 분야를 고르는 것이 현명한 짓이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과는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내용은 타인의 평가와 조언을 받을 필요가 없다.
 
중으로 살아가는 삶은 고달플 수 있으나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하지만 노가다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중의 그것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좀 더 나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심각하게 조언을 한다.
 
글 쓸 능력이 안 되는 이가 자꾸 글을 쓰면서, 왜 남들은 나의 글을 읽어주지 않을까 하고 불행해 하겠지만 그것은 그냥 능력이 안 되는 분야를 선택한, 선택자의 잘못이다. 말도 안 되는 영화를 만들어서 개봉하면서 왜 자신이 만드는 영화는 망할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그리 예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자꾸 자신의 아이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서 왜 나의 아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리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사람 역시도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고 싶다면 아주 예쁜 아이 옷, 남들은 절대로 모르는 특이한 장난감 등을 어디선가 찾아서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적어도 그것을 아이에게 입히고 아이가 노는 모습을 찍어서 올리면 사람들은 아이에겐 관심은 없어도 글에는 아이가 그것을 입고, 놀고 있으니 좋아 보인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 행복을 얻는 것은 행복을 얻는 방법 중 가장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것 중에 하나이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을 통해 얻는 행복이 가장 큰 것을. 그렇다면 그것을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해야만 그나마 충족할 수 있다.
 
음식을 못하면서 요리를 통해서, 재미난 글도 못 쓰면서 자꾸 글을 통해서, 사진도 제대로 못 찍으면서 자꾸 사진을 통해서, 제대로 된 지식도 없으면서 자꾸 전문 지식을 말하고, 사람에 대해 잘 모르면서 정치와 사회를 평가하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끌 수 있지만 부정적 관심을 끌게 되고 잘못하면 관심병 환자가 된다.
 
돈 벌 능력이 부족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능력이 안되면 돈을 많이 벌든가 아니면 취미 생활을 개발해야 행복할 수 있다. 남들처럼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지 못할 바에는 그냥 대충 키워야지 누군가 했다고 해서 계속 따라만 하면 결국 아이는 따라쟁이가 되고 만다.
 
남자로써, 여자로써 경쟁력이 부족하면 남들이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배우자 조건에 외모와 경제력을 뺀 나머지를 보고 골라야지 거기에서 꼭 그 조건들을 집어 넣고 보면 매우 운이 좋지 않은 한 결국 남들보다 떨어진 상대를 만나게 되어서 늘 부족함을 느끼고 결국엔 결혼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짓을 해도 남들만큼 행복하지 못하고 그럴 자신도 없다면 행복하기 위해 살지 말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면 된다. 힘들지만 남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든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연보호 운동을 하든지, 우리나라 산이란 산은 다 올라가보든지 하여 할 때는 힘들지 모르지만 하고 나서 남들 앞에서 이야기 할 때 그럴 싸 해 보이는 일을 하고 살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그 순간엔 행복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상대적 행복 밖에 못 얻으면서도 자신이 이기기 힘든 분야에 가서 그리 고생하고 애쓰고 난 후, 결국 승자쪽에 속하는 다른 이의 상대적 행복에 이바지는 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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