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의 기초

아이루다 2014. 7. 19. 08:23

 
우리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한다. 이 정의는 거의 절대적으로 맞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일상과 그것의 총합인 삶은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라는 목표를 향해 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걸어간 길은 그 사람의 타고난 능력, 환경, 운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차이는 어떤 이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부할 만큼 살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삶이 저주스럽게 여기기도 하게 만든다.
 
이렇게 삶에 있어서 중요한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원리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꽤나 무식한 편이다. 즉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것을 생각하고 살면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 온 경험 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왜 그런 것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고, 그 덕분에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똥이 많이 마려울 때 똥을 싸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물론 조금 억지로라도 설명한다고 치면, 우리는 어떤 고통이나 불행한 것을 없앨 때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행복이란 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이미 행복한 상태에서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나온 발자취를 기반으로 하여 이 부분에 대한 간단히 힌트를 얻어보면, 우리는 원래 먹고 살면 행복한 존재란 점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조상인 원시인들은 커다란 삶의 목표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시대에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의 행복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잘 먹고, 안전한 쉼터에서 잘 자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기르고.. 이것이 아마도 그 시대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감들이었다.
 
물론 그 시절의 느낀 행복은 요즘에도 고스란히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도 맛있는 먹거리를 먹고, 안락하고 편한 집에서 자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아이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을 매우 큰 행복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뀐 것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그 기초적인 행복감만으로 우리를 살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의 이름은 바로 존재의 가치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간이 동물과는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고픈 거의 유일한 증거가 된다.
 
원래 동물들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들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존재의 가치는 적어도 존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 각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인식조차 못하면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물리적 모습에도 깜짝 놀랠 수 있다.
 
하지만 지구 상에서 가장 발전된 두뇌 능력을 갖게 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각성했으며 그 결과로 우리가 동물들과는 다른 존재와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그것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발견하기도 했다. 또한 그런 증거들은 다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우월성과 다른 생명체와의 분리된 존재라는 우리들이 주장하는 사실을 충분히 객관화 된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해주어서, 모든 인간이 스스로 각성을 했는지에 대한 영부에 상관없이 동물과 분리된 소위 말하는 '만물의 영장' 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을 배경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그 자신들에 대한 존재 가치에 대한 욕구는 존재감, 자존감, 존재의 의미, 필요성, 존재의 필연성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많은 이들이 우리가 원래 가졌던 유전자 속의 행복보다 이런 사고된 정신적 가치에 더욱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채 살아가게 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원래 가진 행복 방정식은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데 새로 추가된 가치추구만큼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도 동물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그 자신의 존재가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행복 방정식에 우리가 너무 매몰이 되어서 정작 우리가 별 노력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원래 가졌던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젠 더 이상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만으로는 행복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종류의 원천적 행복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먹는 것도 가치가 있어야 하니 더 비싸고 더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고, 자는 것도 이미 누군가 우리를 잡아먹을 일이 없으니 집은 단지 위험하지 않은 공간에서 최대한 넓고 안락한 공간으로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확장된 욕구는 우리가 가진 원론적인 행복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쁜 것이라든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추가된 가치추구에 의해서 우리가 원래 느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원리를 왜곡시켜 판단하여 그로 인해서 결국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기에 이 부분에 대하 언급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롭게 추가된 가치 추구에 대한 본능적 태도 때문에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행복의 기초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은 이것에 대해서 글을 써 볼 생각이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일단은 모두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행복 역시도 감각처럼 일종으로 뇌에서 인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낄 때, 실제로 그것은 모두 우리의 손이나 발, 몸통이 아닌 바로 머리 속에서 사고의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생각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과정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육체가 주는 행복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현상이다. 즉 우리는 매일매일 육체적 만족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복이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배경엔 우리가 원천적으로 느꼈던 행복이 모두 육체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육체적인 것으로만 두게 되면 우리 자신이 동물과 다를바 없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동물과 동격이 되는 순간 우리는 동내 개나 바퀴벌레와 같이 왜 존재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생명체와 동급이 되고 만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소위 말해서 컨디션이 좋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을 생각해보자. 간 밤에 잠을 잘 자서 몸이 매우 개운한 날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보통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게 보낼 수 있다. 반대로 잠을 못 자서 몸이 찌뿌둥한 날엔 역시 특별한 호재가 없다면 우울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달라지고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기에 단지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기분 좋음이 하루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차이로 인해서 어떤 새롭게 발생한 문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달리할 수는 있다.
 
기분이 좋은 날엔 어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겨도 어느 정도 것은 완화시켜 받아들인다. 반대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아주 작은 문제도 크게 반응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로 인해서 하루가 완전히 다르게 진행될 가능성도 높다.
 
어떤 일로 인해 몹시 화가 나 연인들이 크게 싸우고 집에 왔을 때는 정말로 화나고 분이 가라앉지 않지만 웃기게도 며칠만 지나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조차 애매한 경우도 흔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기분이 좋다가 화를 내는 경우보다 원래 기분이 좋지 않는 상태에 있다가 추가적인 화를 돋구는 사건이 일어나서 화를 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화를 낸 후 그것을 원래 기분이 좋지 않아서 화를 낸 것이 아닌, 실제로 상대가 잘못을 해서 화가 났다고 정당화 하기 위해서 그날 상대의 태도를 철저하게 분석하여 단 한 점의 문제라도 발견하려고 애쓴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화를 내는 과정이다.
 
하지만 화를 낸 당시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기에 우리는 그 당시 상대의 생각과 행동만을 화의 원인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이 모든 문제는 자신이 아닌 상대로 인해 벌어진 결과가 된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기록된다.
 
하지만 최초에 우리가 느끼는 기분 좋음과 나쁨은 보통 육체적 상태로 시작된다. 그래서 여러 전문가들은 부부갈등을 해소하는 큰 도구로써 부부관계를 뽑는다. 실제로도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는 둘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육체적 만족감을 주어서 어떤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처음 문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이라도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면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갈등이 봉합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대화가 갈등을 마무리 시켰다고 믿지만 처음에 문을 열 수 없다면 그것은 영원히 해결 불가능 했을 수도 있다.
 
여자들의 생리 역시도 이런 비슷한 경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몸에 오는 비정상적인 고통은 육체적 컨디션을 망가뜨리고 결국 이로 인해서 하루 종일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소수만 이해하는 척만 할 뿐,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 그런 육체적 변화로 인해서 사람이 달라지는지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운동을 하거나 맑은 공기를 마시거나 잠을 잘 잤거나 오래 괴롭히던 고질병이 나았거나 하는 등의 육체적 행복은 정말로 우리의 결론적인 행복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나타나는 다른 정신적인 만족감 만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육체적인 영역은 일단 무시하고 만다.
 
누가 자신이 오늘 기분 좋고 행복한 것이 간 밤에 잠을 잘자서 그렇다는 것이나 반대로 오늘 힘들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 일이 많은 이유가 단순하게 간밤에 잠을 설쳐서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겠는가?
 
하지만 실상은 행복하고 싶다면, 열심히 매일 운동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잠을 잘자서 결국 건강해지면 행복해진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서 많은 이들이 이 확실한 행복 공식은 외면한 채 다른 자신만의 행복 공식을 평생에 걸쳐 찾아 나선다.
 
맛있는 식사도 육체적 만족감으로 인해 행복을 얻는 과정이다. 물론 우리는 먹을 것만을 밝히는 사람을 돼지와 같은 동물로 취급을 한다. 그리고 거기엔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다. 일단 너무 많이 먹으면 과 체중이 되고 매력이 사라지면서 병에 걸릴 가능성도 급상승하니 당연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정신적 만족으로 착각을 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정말로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는지 혹은 비싸거나 몸에 좋은 것을 맛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귀하거나 고가의 식자재로 만들어진 요리가 그것을 먹고 그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한 만족보다 그런 귀하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를 자신이 즐길 수 있음을 만족하게 된다.
 
커피, 와인 등등 우리가 미각을 통해 느끼는 많은 만족이 바로 이와 비슷한 원리로 얻어진다. 물론 소수의 정말로 타고난 미식가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육체에서 오는 만족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신적인 생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맛있는 것에 많은 이유를 설명한다.
 
같은 이유로 아무리 몸에 좋은 산나물과 된장 찌게라도 본인이 맛이 없으면 거기서 끝이다. 몸에 좋다는 이유로 그 맛이 왜 더 포장이 되고 그것을 먹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육체적 행복 말고도 우리의 행복 요소 중 숨겨진 또 하나는 바로 사람들과의 어울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같이 어울리는 것을 선택이라고 믿는다. 즉 TV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선택적인 것일까? 물론 어떤 이들은 평생을 혼자 살 자신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인간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등지고 산골에 가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사람들과의 어울림 없이도 잘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선택적인 것이 아닌가? 실제로 나 개인적인 경험은 없기에 이것을 뭐라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다.
 
그 사람이 그곳에서 살 수 있는 데는 다른 인간들이 만든 수 많은 제품들이 있다. 즉 그 역시도 인간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가져가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만든 제품을 사용하고 그 자신이 가꾼 농산물을 어딘가에 팔면서 결국 간접적인 어울림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은둔 형 외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 하지만 그 존재는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순간 죽거나 스스로 기어 나와야 한다. 세상엔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좀 더 행복함 쪽으로 와서 바라보면 가족이 보인다. 많은 이들에게 가족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면 나이를 꽤나 먹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즉 스스로 충분히 경험을 해야만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육아의 힘듦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지만 그들이 키우는 아이는 행복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맞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 부모들에게 끝없는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힘든 것이 있지만 누가 그것이 힘들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도 그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면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지만 정상적으로 아이를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매우 큰 잘못으로 비난한다. 친자식을 버린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존재인 것 마냥 취급되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맺고 어울려 사는 일은 절대로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육체적 행복이 다른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관계가 바로 다른 행복으로 발전된다.
 
따라서 관계를 소홀히 하고 주변에 있는 소중한 이들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장 그 자신이 눈앞에서 원하는 행복은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엔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건강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하다가 결국 크게 건강이 상한 어떤 이의 후회처럼 될 수 있다.
 
우리는 동물과 다른 지적인 생명체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행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그래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판단들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어느 날 갑자기 영화처럼 좀비가 창궐해서 숨어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어느 집에서 발견한 참치 캔 하나에 세상을 얻은 듯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행복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고의 출발점 시사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지금은 참치 캔 하나에 행복할 수 없을까?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그 방법은 너무도 단순하다. 매일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좋아하는 음식 먹고 잠 잘자고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에게 잘하면서 살면 된다. 이것 말고 그 어떤 이유가 붙어 있든지 간에 다른 모든 행복들은 이 기본적인 행복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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