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찌꺼기

아이루다 2014. 8. 16. 13:41

 
그것이 내가 가진 에고의 특징인지 모를 일이다. 내가 그렇듯 남들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내가 좀 더 중요한 존재 이길 바랬다.
 
지금에 와서 과거를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가 주인공이 되길 바랬다. 아니, 주인공은 조금 부담스러우니 조연배우 정도를 노렸다고 할까? 즉, 나는 책임을 지는 주연의 자리가 아니면서도 단역 배우만큼은 아니길 바랬다. 그렇게 되면 부담도 없고 중요도도 떨어지지 않는 매우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그리 주목 받는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가진 각종 능력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내가 조금 남들과 다른 특징은 키가 좀 크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과 같이 있을 땐 장점이 될 수 있어도, 동성들과 같이 있을 땐 부담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늘 어디선가 친구들을 사귀고 모임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주재하는 역할을 맡곤 했다. 하지만 나의 덜 떨어진 리더쉽은 늘 모임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나는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 혼자 실망하고 상처받곤 했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상은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어서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만 남들의 행동을 판단해 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수 많은 오해와 오판을 불러 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인간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틈에서 끝없는 불만과 불안함을 느끼는 나의 나약함에 대한 근원적 지식에 대한 욕구도 생겨났다. 말 그대로 사람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나의 경험은 미숙했으며 내가 지식을 쌓는 속도는 더디고 거기에 더해서 이해력 부족과 함께 천성적으로 게으르기까지 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대장 노릇을 하려고 했고 나의 말은 다른 이들의 의견보다 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의 말은 누구의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강요된 의도는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했고 나는 강요하는 자의 역할이 되어 버렸다. 결국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조금씩 불편해 했다.
 
이 후 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또한 이것은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는 아주 우연하게 일어났다. 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나는 사람들과의 연결을 하나씩 끊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닌, 나가 선택 가능한 단 하나의 길이었다.
 
분명히 이 행동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행동은 나를 깊은 외로움 속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살아왔지만 막상 혼자가 되니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내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을 지배했다. 그제서야 나는 나를 인정해야 했다. 나는 결국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살아 온 것이다. 그리고 단지 여기에서 더 행복 하려고 노력한 것 뿐이었다.
 
무리의 대장이 되면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안 할 수 있는 약간의 자유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는 싶은데,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 대장 노릇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란 말인가.
 
아무튼 혼자 남게 된 나는 이젠 본격적으로 나를 돌아봐야 했다. 과거의 나는 분명히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다고 느꼈지만 정작 혼자 남게 되어서 내가 누구인가를 봐야 할 상황이 되니 두려움에 빠져서 정신 없이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가끔 나를 돌아보고 남들을 평가하다가 알게 된, 나만이 아닌 모든 인간의 동일한 속성을 느낄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느끼는 나에 대한 실망감이 단지 나만 가진 특징은 아니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의 에고는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여겨질 때 마다 나는 안도감과 함께 자기 합리화에 깊이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 떠오르는 뜬금없는 생각들은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하고 불안하게 했으며 결국엔 나를 불행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남을 끌어내려도 결국 내가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불행함, 이 두 개의 단어는 인간이 가장 피해야 할 단어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쳐 놓은 그물에 갇혀 버둥거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이 그물이 가진 진지함에 대해서도 제대로 다가서지 못했다. 아직도 제대로 버리지 못한 에고의 허영심은 이런 혼란스러움 느끼고 마치 늘 삶을 되돌아 본다고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내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낫다고 위로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한 대면이 가져야 할 진지함을 빼앗아 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사람에 대해 남들보다는 좀 더 많은 지식적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간혹 나누게 되는 대화 속에서 곧잘 터져나오는 나의 일반적이지 않는 시각은 다른 이들에게 하여금 뭔가 깊은 속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제법 만족해 했다.
 
제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얻어낸 지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지식은 단지 지식일 뿐, 본질적으로 나 자신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또 길을 잃은 나는, 이제 나를 알았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찾기로 했다. 물론 이 역시도 어떤 의도가 아닌, 스스로 살 길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찾아진 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제일 남들에게 괜찮아 보이는 삶이 보였다. 정의롭고, 용기가 있으며, 다정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롤 모델이 되었다. 이것은 나와 상관없이 나를 꽤나 멋들어지게 꾸며주는 고급스러운 옷과 같았다.
 
거기에 더해서 딱히 뒤떨어지지 않는 내가 가진 키와 웃으면 착해 보이는 나의 얼굴은 큰 무기가 되어 주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나의 외모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을 매우 경계했지만 나의 외모가 가져다 주는 작은 이득을 챙기는 것은 스스로 용납하고 있었다. 나는 남이 보지 않을 때만 몰래 거울을 보는 남자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괴리감은 아마도 남들과 있을 때의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를 경우일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와 용기를 가졌다고 주장했으며, 거기에 더해서 남들과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기까지 했다. 나는 혼자서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는 순간 부끄러워서 도저히 자신을 바라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심하게 말해서 사람에게 어떤 복잡한 문제가 있다면 마치 그것을 다 한꺼번에 몰아 놓은 듯한 존재였던 것이다.
 
덕분에 나의 마음 속에는 우울, 질투, 정의, 비겁함, 용기, 행복, 불행, 혼란스러움, 단호함, 행동, 게으름, 부지런함, 여유로움, 조바심, 이득 추구, 순수함에 대한 욕구 등이 마구잡이로 혼재되어 있었다.
 
이 혼란스러움 중에서 그나마 절재력을 발휘한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두려움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두려움은 나를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나는 상황논리에 뛰어난 논리적 언변을 가진 존재에 불과했다. 쉽게 말해서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 결과는 참담했다. 나는 결국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남들에게 꽤나 그럴 듯 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보여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에고는 꿈틀거렸다. 그리고 가끔 에고가 상처 입을 때 마다 나의 질투심은 명확하게 그 존재를 나타내곤 했다. 결국 이런 나의 본질은 나를 끝없이 바닥으로 잡아 이끌었다.
 
이때 내가 가능한 해결책은 바로 여우의 신 포도 이론이다. 가질 수 없거나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이 너무 힘들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신 포도로 여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가치든지 내가 가지기 힘든 것이 나타나면 그것의 단점부터 파고 들었다. 모든 이들이 그것이 맞는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결국 불행했던 나는 행복의 단점마저도 알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속이 꼬인 노력은 내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고 별 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수 많은 것들에 대한 비판적 판단 능력을 키워주는데 도움을 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단지 나의 시작은 그것에 대한 의심과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그저 내가 갖지 못하거나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단점을 파헤치려는 목적이었던 것뿐인데도 나는 많은 것들에 대해 표면 아래에 숨겨진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비판적이고 시니컬하면서 뭔가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이 되어갔다.
 
지금 시점에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로 좋은 행운이었다. 내가 사람들의 대세의 흐름을 거부하면서 나는 그것들이 가진 문제점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세상은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대세를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삐딱한 시선은 운 좋게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그것들을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TV를 안보기 시작했고 사람들과의 관계의 범위를 좀 더 좁히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사람들이 돈을 쓰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서 인식하고 그것도 역시 서서히 줄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좀 더 좋은 효과를 발휘했는데, 그것이 바로 돈을 모을 수 있으며 또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로움이라고 느꼈던 감정은 점점 심심함으로 바뀌었고 나는 인간의 삶이 흘러가는 그 모든 흐름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냥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TV속 드라마가 재미 있어도 안보는 것이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말해서 나의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를 좀 더 혼자 있게 했고, 나를 좀 더 덜 자극적인 환경에 놓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나를 도서관으로 데리고 갔고, 그 속에서 아주 가끔씩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오래된 현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내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정한 의미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조그만 힌트를 던져주곤 했다.

 

변화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이 묘한 입장 변화의 근본적 원인은 나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젠 서서히 늙어가는 시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여유로움과 그 동안 의도하지 않게 쌓은 내 마음 속의 여러가지 것들이 조합되어 만들어 낸 작은 틈인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다행인 것 중 하나는 이 중간 과정에서 큰 의미 없는 불안한 자극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고 나에게 남은 것들은 이제 꽤나 견고하고 괜찮은 것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아마도 앞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행복들은 꽤나 괜찮은 것들일 것이란 믿음은 있다. 물론 이 역시도 알 수는 없지만.
 
제 삼자의 눈으로 나의 삶을 바라 본 사람은 내가 상당히 의지적으로 살았다고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의 삶은 홍수가 난 강 위에서 터무니 없이 쎈 물살에 쓸려 내려온 꼴일 뿐이다. 나는 단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허우적거렸으며 무엇이라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을 잡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는 무거운 것이나 크기가 작은 것을 잡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남들이 선호하는 것을 잡게 되면 반드시 경쟁이 일어나서 결국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남들이 신경 쓰지 않거나 흔하고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 가능성을 높이고 행운이 좀 더 따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나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하늘을 보고, 누구나 맡을 수 있는 풀 향기를 맡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새 소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맑은 공기를 좋아하고 비가 풀잎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길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힘들게 심은 옥수수가 자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은 우주가 가진 빛을 담길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남들이 모두 하는 카메라로 사진 찍은 것을 거부했으나 지금은 내가 보는 것을 카메라로 담는 것이 몹시 행복하다. 나는 냇물에 살아가가는 오리를 보는 것이 좋고, 참새들이 떼지어 잽싸게 이동하는 모습이 정겹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닥에 기어 다니는 달팽이 모습도 좋고 가끔 보이는 개구리도 좋다.
 
이젠 조금은 내가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나의 삶은 온통 나에게 작용된 운에 따라 진행되어 온, 라마크리슈나의 말처럼 '신의 뜻'대로 살아온 것뿐이다. 거기에 내 의지가 있었다고 믿는 것은 오직 나의 마음 속에 늘 존재하고 있는 나의 에고의 망상이다. 알지만 없애지 못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의 에고를 없애려고 한다. 물론 이 역시도 의지가 아니다. 에고는 없어질 수도 있고 죽는 순간까지 나와 함께할 수도 있다. 나는 단지 방향만 보고 있다. 이제는 그래도 그 혼란스러운 물 속에서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갈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운은 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나만큼 알 수는 없다. 또한 어떤 글과 말을 통해서도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해 낼 수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단지 나는 이런 글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어렴풋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넓은 우주엔 누구의 말처럼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는 단지 유기체이며 별의 잔해로 만들어진 원소로 구성된 운이 좋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살아갈 것이며 운이 따른다면 행복할 것이다. 나의 존재는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기록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존재하기에 살아갈 것이며 때가 된다면 떠날 뿐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말 뿐이다. 하지만 말을 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얻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품고 살아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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