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의견 주장

아이루다 2014. 8. 31. 08:49

 
우리 인간은 그것을 인식을 하든 못하든 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특별한 어떤 것들은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건과 이런 사건의 차이는 이 사건의 주체가 유명인인(연예인, 프로 스포츠 선수, 정치인 등등) 경우나 그런 사건 자체가 매우 드물게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거나 혹은 너무도 잔인한 범죄이거나 해서 발생한다.
 
그래서 사건의 주인공이 유명인인 경우엔 보통 흔하게 지나갈 것들도 크게 부각이 된다. 우리가 매일 흔하게 접하는 연예인 스캔들이나 가십 기사들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정말로 그 사건 자체가 사람의 이목을 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건을 접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흔하지는 않지만 직접 보거나 경험하는 방법, 뉴스나 신문을 통해 기자가 전하는 소식을 듣는 방법,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듣는 방법 등이다. 특히 이 중에서 누군가로부터 그 현상에 대해 들을 땐, 우리는 한가지 더 추가로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그 개인의 생각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사건 자체는 상관없이 그 추가된 설명에 대한 반박이 일어날 때도 있다. 예를 들어서, 최근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싱크홀 문제를 언급한 한 명이 자신의 의견으로 이것이 요즘 건설 중인 초고층 빌딩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 놓았는데, 듣는 상대는 그것을 그것이 원인이 아닌 지하철 공사 때문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경우이다.
 
어떤 경우엔 이것이 그냥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생각은 다르더라도 그냥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반박하는 사람이 태도가 마치 '너는 그 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냐' 라는 식으로 대꾸를 하게 된다면 생각을 반박 당한 사람은 기분이 상해서 이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된다. 즉, 이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의견으로 변경시킨다.
 
그리고 생각이 의견으로 변하는 순간 이젠 서로가 자신의 의견이 왜 맞는지를 필사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 서로가 마찬가지기에 일단 한번 충돌이 나기 시작하면 이것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질주한다.
 
물론 어떨 땐 한쪽 사람의 주장이 좀 더 명백해서 그 의견을 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동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반대편 의견을 내던 이는 조금씩 코너에 몰린다. 그럼에도 몰린 사람은 이것은 쉽게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의견 역시도 어떤 식으로든 옳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앞의 싱크홀 예를 들어보면 실제로 싱크홀의 문제가 지하철이 90%이고 고층 빌딩의 영향이 10%라면(알 방법은 없다. 가정이다) 대충 지하철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맞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층 빌딩의 영향이 0%는 아니니 무조건 그 사람의 의견이 틀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그 사람은 원인을 크게 부풀려서 말한 문제는 있지만 틀린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의견 충돌이 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기고 지는 것을 명백히 한다. 즉, 우리는 그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한 여부보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가 자신이 가졌던 의견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이 주장한 의견이 맞는다고 명확하게 인정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의 처음 의견 제시는 보통 아주 단순하게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시 설명하면, 우리가 처음 어떤 사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때는 큰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통 어떤 사건에 대한 초기의 생각은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얻어낸 이론이 아닌, 그냥 경험을 통해 아주 쉽게 얻어진 것일 뿐이었다. 혹은 그것조차도 아니고 어디선가 스쳐 지나듯 본 기사나 누군가의 댓글 등을 통해 알게 된 남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누군가 그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는 순간 이 생각은 자신의 의견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생각에 도전한 이의 생각을 고쳐 놓기 위해서 증거와 논리를 앞세운다. 이런 태도는 상대 역시도 마찬가지다. 둘은 더 이상 생각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닌 의견의 대립이 되었고, 더 진행되면 이젠 토론과 전쟁으로 진화한다.
 
그럼에도 그 시작은 단순한 생각의 표현이었을 뿐이다.
 
컵에 물이 반이 있다. 이것에 대한 생각은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 와 '컵에 물이 반밖에 없네'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물론 '관심 없다'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처음에 그냥 느낌이었을 것이다. 목이 마른 자는 컵에 물이 반 밖에 없겠고 이미 충분히 물을 마신 자는 컵에 물이 반이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것을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의 예로써, 그 상황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컵에 담긴 물에 대해 생각을 했던 사람이 그 자신은 단지 목이 말라서 한 얘기인데, 왜 당신은 그것을 통해 그런 심리학적 문제로 파고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부당함을 말한다. 그러자 사람의 긍정적 사고 방식에 대한 생각을 말한 사람은 이젠 제대로 된 심리학적 의견을 내 놓아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이 후 그 둘간의 대화 속에는 수 많은 예시와 논증이 펼쳐질 수 있다. 그것은 각 의견을 낸 당사자들의 지식적 깊이에 따라 달라 질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평범한 수준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 받았겠지만 그들이 심리 전문가나 물리 전문가였다면 상황은 달라 졌을 것이다.
 
물리 전문가는 컵에 물이 담겨 있을 때 그것의 실제 높이는 유리로 된 컵이 빛을 굴절시키기에 보기보다 더 낮을 수 있으며, 또한 물의 표면 장력에 의해 외부로 보이는 물의 높이는 실제보다 더 낮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반만 있어 보이는 물은 실제로 반이 안될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심리 전문가는 인간이 어린 아이가 3~4세 정도 되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잘못 받고 크면 그 시기에 생성된 자아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컵의 물의 반이 있을 때 그것을 부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는 심리 연구 결과 논문을 가져다 소개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전문적인 의견 교환에 있어서 끼어들 수 없는 일반인들은 그저 신기해만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나면 그것에 합당한 근거를 100개도 넘게 댈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나면 또한 그것에 합당한 근거를 100개도 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종류의 의견 대립은 끝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바로 우리가 아는 세상 모든 종류의 일에는 반드시 장점과 단점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장점과 단점은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이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즉 우리에게 장점과 단점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토론을 할 때, 찬성하는 이는 그 현상의 장점을 내세우고, 반대하는 이는 그것의 단점을 내세운다. 이것은 이기고 질 수 있는 승부를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냥 서로 지식 범위 내에서 끝없이 자기 의견을 내세우다 끝나는 일이다.
 
거기에 더해서 정말로 웃기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의견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일 때, 실제로는 그 시작이 그냥 순간 느낀 생각이나 남의 생각을 외워서 말한 것 뿐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현상을 보았을 때 그때 느낌에 따라 긍정적 느낌과 부정적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느낌을 표현한 후엔 이젠 그 생각은 의견으로 변경시킨다. 그런데 아무도 그 생각 단계를 부정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생각으로 끝난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부정한 순간부터 이젠 자신이 말한 생각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즉, 이때부터는 자신이 무심코 낸 생각을 지키기 위해 편들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그것에 대한 깊은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처음 든 생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이것의 흔한 예로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전자제품인, 스마트 폰을 들 수 있다. 우리는 거의 어떤 우연함으로 인해 어떤 회사의 제품을 고른다. 그런데 만약 그 제품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는데, 누군가 그것을 비판하면 갑자기 자신이 산 제품의 대변인으로 변화된다. 즉, 그냥 좋았던 생각이 제품의 장점을 주장하는 의견으로 변화된 것이다. 상대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자신이 산 제품이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런 태도를 보일까?
 
우리는 누구나 일관성을 갖길 바란다. 일관성은 신뢰를 의미한다. 우리는 신뢰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한 우리는 경솔하게 말을 내뱉는 사람이길 원하지 않는다. 경솔함은 실수를 의미하며 또한 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한번 편이 정해지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버틴다. 그래서 간혹 술자리처럼 감정이 통제되지 못한 장소일 경우 싸움이 크게 나서 사람이 죽는 일도 생긴다. 그런데 그들이 싸운 이유를 들어보면 초면에 '형씨' 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냐 아니냐를 두고 싸웠다고 한다. 예를 든 것이지만 실제로도 이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우린 살아가면서 정말로 다양한 형태의 사건에 노출되고, 그 많은 것들은 또 수 많은 생각을 양산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개인적인 관점에서 한번 정해진 의견은 그 의견의 옳음을 증명 받기 위해서 노력된 다양한 수고로움을 통해 강해지고 더욱 그럴 듯하게 논리적으로 변하여, 결국 이렇게 서로 명백해진 입장은 만나는 순간 강한 충돌을 일으킨다.
 
이런 것들은 오래된 사상이나 관념일수록 훨씬 자주 명백하게 충돌된다. 종교관, 정치적 성향 등등이 그것의 가장 흔한 예이다.
 
하지만 오래 되었다고 해서, 또한 그 의견에 붙은 셀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증거들이 있다고 해서 그 의견이 맞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의견 반대편의 주장에도 그와 비슷한 오래됨과 증거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처음에 우연히 한쪽 편을 들었다가 이젠 빠져나올 구멍이 없이 외통수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작 그 자신은 신념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떠들지만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사건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유니폼, 즉 제복 문화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평소에도 늘 제복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어린 시절 사탕을 먹다가 누군가에게 이유도 모르고 한 대 맞았는데, 그 사람이 군복을 입고 있어서 제복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면 과연 그의 의견이 정말로 그가 하고픈 말일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제복의 문제점은 명확하다. 사람을 조직적으로 만들고 획일화 시키며 단체에 대한 충성과 강압된 조직문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처럼 제복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은 제복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다. 경찰과 같은 경우도 얼굴이 아닌 제복과 경찰차를 통해 우리는 그들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평생 제복의 단점을 말하고 다닐 것이다. 그가 교수라면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야기 할 것이고, 그가 일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강사라면, 강의 시간마다 이것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더 지나면서 그는 제복과 독재를 연결시키고, 독재는 악이니 제복도 악이다 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실제로 많은 인간들의 생각이나 사고 방식 등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수 많은 사례와 논증을 통해 진실이라고 믿는 그 많은 것들의 배경엔 자신의 조금 특별한 어린 시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인식을 못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꼭 하나만 선택한 후 그쪽으로 자신의 사고 방향을 정한 후 살아가게 될까? 우리는 왜 늘 한쪽 편만을 보고 살아가길 바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너무 익숙해서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그다지 의문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우리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영역이 관여되고 있다.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누구도 시체 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결국 죽는다. 죽음은 회피하고 싶어도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는 것만 본다. 죽음이 두렵기에 사는 것만 본다. 그래서 죽음이 가진 의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 삶이 아닌 죽음을 찬양하면 그렇게 좋으면 빨리 죽으라고 말해준다. 아니 실제로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죽음을 찬양하는 자는 말을 함과 동시에 거의 모든 이들에게 미친 인간으로 취급될 테니까.
 
하지만 죽음이 없는 삶이 지금처럼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생각은 해볼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죽음이 두려워서 삶의 편만 든다. 생존만이 옳고 죽음은 불변의 악이 된다.
 
밝음을 추구하는 우리는 어둠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둠이 빛의 부재 상태라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어둠도 빛과 같다. 그것은 단지 빛 량의 차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빛은 선함, 어둠은 악이라고 한다. 
 
빛은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의 기준은 우리의 눈이 받아들이는 가시광선 파장대에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밝은 빛을 만들어 봐야 태양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도대체 밝은 빛의 정의는 무엇인가? 우리 눈이 받아 드릴 때 눈이 부시면 밝은 빛이란 말인가? 그래서 태양이 선이면 상대적으로 어두운 지구는 온통 악의 소굴이 되는 것인가?
 
동전은 앞면만 있을 수 없다. 동전은 뒷면이 있다. 그래서 완전해졌다. 그런데 우리는 동전의 앞면만 옳다고 하고 뒷면은 틀린다고 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동전의 뒷면만이 유일한 정의라고 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배운 것일까? 우리의 언어가 그래서 일까?
 
'방안이 밝다' 라는 말을 할 땐 실제로 우리는 '방안이 밖에 비해서 밝다' 라고 표현해야 옳다. 모든 것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느끼는 우리는 그 상대적이 되는 것은 생략해서 표현한다. 딱히 언급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급하지 않는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도 모르게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가져 왔다.
 
산이 높다는 표현은 산이 다른 주변 산에 비해서 높다고 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지구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해도 산이 최근 지구라는 행성의 지질학적 상태에서 존재하는 산 중에 높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할 때 역시도 다른 모든 아이들에 비해서 가장 널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다. 그것이 아내든, 남편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또한 상대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1등으로 자리 잡으면 마치 그것을 절대적으로 느끼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너를 사랑해' 라는 표현은 상대적이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절대적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생각을 말하고 그것이 의견으로 변하는 순간 상대성은 사라지고 절대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결국 우리는 아이를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한다. 우리는 연인을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 상대적인 개념에 대해서 좀 더 확장해 생각해본다면 우리 세상의 모든 현상은 하나같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세상은 막대 그래프처럼 끊긴 세상이 아니다. 우리는 부드러운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그 선의 중간에 서게 된다면 양쪽 끝을 모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상에 대한 설명과 그것이 증면된 다양한 의견을 갖게 되면서 양쪽 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또한 자신과 반대 방향 끝으로 이동한 사람들과 싸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상대에 비해 극단적인 위치일 뿐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에겐 그냥 양쪽 끝으로 간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중간지점을 자기의 위치와 어떻게든 가깝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 둘 모두 끝으로 가 버티는 상황에서 중간 지점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의 위치와 중간 지점을 가깝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신이 그 중간 지점에 다가가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며 일관성이 깨지는 것을 의미하며 신뢰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양쪽 끝 지점에 선 채 주장하는 의견은 모두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장점은 단점으로 작용하고 단점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세상이 그 어떤 것이 장점만 있겠는가?
 
절대적 단점으로 여겨지는 죽음조차도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많은 가치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나온다. 우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위대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 희생이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용기를 위대한 것으로 칭송하는 것도 용기가 공포와 죽음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서 있는 것은 누구도 용기 있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 미터 위의 가느다란 줄을 딛고 서 있는 것은 용감한 행동이다.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인간답게 느끼게 해주는 많은 가치들은 빛을 잃는다. 그럼에도 죽음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절대 악으로 이미 정의된 채 한쪽 끝으로 가 있다.
 
우리의 사고 방식 패턴은 이 글로 그 문제점을 다 표현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이런 문제는 하나 하나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인식하면서 알아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의견이 없는 상태로 세상을 살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자신이 옳다고 싸우고 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언어 습관은 '다르다'와 '틀리다' 를 잘 구분하지 않는다. 나는 너와 틀려 라는 표현은 잘못되었지만 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맞다, 틀리다’ 와 ‘같다, 다르다’ 를 혼용해서 쓴다. 맞고 틀리고는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너는 나와 틀려 라고 표현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단 한 명도 같지 않다. 그렇지만 너는 틀리고 나는 맞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정말로 깊게 생각해봐야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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