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많음, 적음 그리고 없음

아이루다 2014. 11. 6. 07:18

 
인간은 욕심 - 이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단어로 표현하면 -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욕망은 우리의 본질이기에,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되어서 우리를 가끔 힘들게도 하지만 미래를 꿈꾸며 현실의 고통을 참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바로 욕망을 느끼고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정의 해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욕망을 느낀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엄마의 젖을 먹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한다. 바로 우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 인간은 그런 자신의 욕망을 인지할 수 없다. 어린 아이의 인지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우기가 갖게 되는 욕망을 대부분 인지하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욕망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조차 모른다. 어떤 욕망이 느껴질 때, 그것이 왜 느껴졌는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그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지 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무엇인가를 하고 싶거나 먹고 싶거나 갖고 싶다면, 왜 그런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그것을 하거나 먹으려고 애쓴다.
 
우리가 흔히 가질 수 있는 욕망, 예를 들어서 아침에 5분 더 자기, 저녁에 친구와 술 한잔, 점심시간에 맛있는 것 먹기, 잠자기 전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 보는 것 등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가진 꽤 많은 욕망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성취가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욕망이었다는 것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것을 했을 때, 그것이 욕망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즐겁긴 하지만 그것이 욕망이 충족된 것이란 점을 인지하지 못해서 결국 일종의 권태감을 느끼게 된다. TV가 없던 시절이나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엔 단지 TV를 보는 것 만으로도, 밥을 한 끼 먹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복을 느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이 이해가 간다. 우리는 반복되는 욕망 실현에 대해서는 그것이 욕망이었다는 것보다는 당연한 것이라고 느낀다.
 
욕망이 성취된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고, 욕망을 이루지 못한 상태를 불행이라고 부른다.
 
욕망은 사람마다 크기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다르며 그것을 성취할 운도 다르다. 그래서 욕망은 천차만별이기에, 사람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도 있고, 욕망을 거의 다 성취하여 큰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욕망을 아예 버린 사람도 있다.
 
욕망은 사람에 따라 많거나 적거나 그리고 없을 수 있다.
 
행복이 욕망을 성취한 상태이기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진 욕망은 가능하면 모두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가진 욕망의 숫자가 많을 때 당연히 실패할 확률도 높아진다. 거기에다가 많은 이들이 원하는 보편적 욕망인 경우, 그 대상은 한계가 명확한데,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아져서, 결국 경쟁이 심각하게 일어나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것도 많다.

 

보통 이런 것들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알려진 욕망들을 대상으로 한다. 돈, 입시, 취직, 결혼 등이 그런 욕망의 주요 예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욕망에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이는 착각은 그 욕망의 대상이 매우 경쟁이 심화된 것이기에 그래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행복하고자 욕망을 가졌던 이들은 결국 실패하고 불행함을 느낀다. 그러자 이들을 바라보던 현명한 이들은 이들에게 조언을 한다. 욕망을 줄이면 된다고 말이다. 이 말은 매우 좋은 말이지만, 실제로 각 당사자가 그것을 실천하기란 상당히 힘들다. 그리고 줄였다고 해도 실제로는 줄인 것이 아니라 포기한 상태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성격으로 인해 욕망이 적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 적다 라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런데 욕망이 많은 사람과 이런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쓰는 욕망이 많다와 욕망의 적다의 차이는 진짜로 욕망의 크기에 따라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대상에 대한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욕망이 적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욕망이 보통 자신의 능력으로 대부분 실현 가능하다. 그래서 욕망이 적고, 욕심이 적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욕망의 대상이 남들과 완전히 다르거나 혹은 같다고 해도 그것을 충분히 이뤄낼 능력이 있는 이들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누구나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고 치면, 욕망의 방향이 다른 이들은 돈 버는 것 보다는 등산을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고, 또 욕망의 방향이 같다고 능력이 되는 이들은 참 쉽게 돈을 벌어서 실제로 돈에 대한 욕망이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모두 결과론적으로 돈에 대한 집착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람들의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기 쉬운 욕망을 주로 대상으로 특성으로 인해서 욕망을 이루지 못한 불행함을 경험할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욕망을 자신의 능력만큼만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욕망이 많은 사람이란 뜻에는, '가진 욕망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이 많다는 것' 의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욕망이 적은 사람 역시도 욕망 자체가 적은 것이 아니라, '실현하지 못하는 욕망이 적은 것' 이란 뜻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욕망이 적다고 표현되는 사람이 훨씬 나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처음 글을 시작 할 때, 욕망은 현재의 고통을 참고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욕망을 현재 이룰 수 없을 때, 그것을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이런 삶의 태도는 비록 욕망의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이고, 현재가 불행해서 잘 사는 것 같이 보이진 않지만 실제로 이런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에 발전된 자신의 모습을 꿈꾸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희망, 꿈 등의 용어로 바꿔 부를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이런 용어들 역시도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욕망이 적은 사람들은 현재는 행복하지만 미래의 발전 가능성이 낮고, 욕망이 많은 사람은 현재는 불행하지만 미래엔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만 된다면 욕망이 많든 적든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현재 행복하느냐, 미래에 행복하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 둘의 입장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일어난다.
 
일단 욕망이 많은 사람은 현재의 불행함을 참고 미래를 향해 간다. 하지만 그 욕망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보장도 없고 더해서 실제로 이뤄졌다고 해도 행복할 가능성이 100%인 것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욕망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처음에 왜 자신이 그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사고가 없는 상태에서 노력하고 이뤄낸 욕망의 결과는 기대와는 다르게 그다지 행복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결굴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욕망을 거의 다 이룬 사람도 허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현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욕망을 줄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라고 충고해준다.
 
욕망이 많은 이의 문제는 이렇게 단순히 설명이 되는데, 반대로 욕망이 적은 이들은 어떤 문제를 갖게 될까? 실제로 이들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는데 우리 사회는 보통 욕망이 많은 이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욕망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나는 운이 따르지 않을 때이다. 우리는 보통 능력이 되면 어떤 일을 잘 해낸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성공의 열쇠는 오직 실력만이 아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운이다. 그런데 만약 삶이 조금 꼬여서 운이 따르지 않을 경우 삶의 기초적인 욕망조차도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밥을 먹고 싶은데 쌀이 없거나, 잠을 자고 싶은데 잠 잘 곳이 없는 경우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대처하는가' 가 두 번째 문제를 일으킨다.
 
그냥 받아들이는 태도가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도 그리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금 운이 나빠서 상황이 안 좋아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낙담하거나 심하게 불행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욕망이 삶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돈, 직업, 가정, 사람과의 관계 등등일 때는 분명히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돈과 같이 경쟁이 심한 욕망을 가진 채,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은 이런 문제에 닥쳤을 때, 매우 적극적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거나, 돈에 환장했다는 비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독하게 산다. 하지만 욕망이 적다고 알려진 이들은 이런 삶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평생을 자신이 돈과 같이 대다수가 원하는 욕망을 원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순간에 와도 매우 미온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다. 위기가 닥치거나 혹은 미래에 어떤 위기가 올 조짐이 있어도 그냥 그것을 바라만 본다. 미래를 노력보다는 운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사자의 마음을 당장은 편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천천히 침몰하는 배에 있는 승객과 같아진다. 계속 배 안에 있으면 결국 같이 침몰될 것이 뻔한데, 밖으로 나와 구명보트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갈 용기가 없거나 혹은 두려워서 그 안에 안주하고 만다. 그리고는 배가 혹시나 가라앉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아니 외면한다.
 
운이 좋아서 배가 가라앉지 않거나 혹은 외부에서 구출 팀이 와서 구출을 할 경우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있다가 배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냥 외부에서 보기엔, 그 사람은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본인도 그렇게 느낀다. 답답한 상황이긴 해도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으니까 큰 욕심 안내고 사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나이를 먹어가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딱히 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침몰하는 배에서 운 좋게 빠져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모습은 어떤 의미로 매우 부정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혼자서 살 때는 상관이 없지만, 배우자나 아이가 있을 경우 이런 태도는 심각한 갈등의 요소가 된다. 즉,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을 때 이런 태도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 결국 그 당사자들과 큰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욕심 없고 행복한 삶일지 모르지만, 그 성격으로 인해서 주변에 누군가는 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대신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을 밀치고 보트를 오르는 사람도 문제가 있다. 즉,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자신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사람도 문제가 된다.
 
욕망은 능력과 의지와 운에 따라 그것이 가진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많은 욕망을 가졌지만 능력도 의지도 부족하고 운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는 많은 욕망을 가졌지만 능력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부족하거나 운이 따르지 않아서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얼마만큼의 욕망을 가졌던 간에 능력도 되고 의지도 되며 운도 따르는 사람이다. 이것은 욕망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또한 더해서 정말로 원하는 욕망을 발견한 것도 행복을 느끼는데 있어서 크게 좌우를 한다.
 
그래서 다시 정의하자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 낼 능력을 가지고 의지도 있으며 운도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해야 한다고 해서 갖게 된 욕망을 해낼 능력도 의지도 운도 없어서 이루지 못하고 꿈만 꾸는 사람이다.
 
결국 이 말은 우리가 행복한 것과 욕망의 크기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은 있거나 없거나 두 가지로 나뉠 뿐, 글의 제목처럼 많고, 적고, 없음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정말로 많이 행복하고 싶다면 욕망을 모두 실현하거나, 욕망을 아예 갖지 말아야 한다. 혹은 대안으로 정말로 쉬운 욕망만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것은 한끼 밥 먹기, 밤에 잠 잘 자기, 건강하기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도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욕망이 아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하루 밤 잘 자기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일 수 있고, 위장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한끼 밥 맛있게 먹기 역시도 불가능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숨 쉬기, 두 발로 걷기 등의 욕망을 갖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것을 욕망이라고 표현한다면 웃기겠지만, 물 속에 빠진 이에게, 다리를 깁스 하거나 혹은 다리 하나가 없는 이들에게는 욕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욕망의 대상을 이루기 쉬운 쪽으로 가다 보면 실제로 욕망을 아예 없앤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지막 관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것이고 결국 이것은 삶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생존에 대한 욕망은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지만, 오늘도 많은 이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만족하지 못한다. 가장 큰 욕망을 실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고 당연해져서 권태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을 버린다는 말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된다. 즉, 흔히 말하는 깨달은 이는 죽음을 받아들여서 결국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욕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인간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일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욕망은 실제로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가 자연스럽게 익힌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산속 혼자서 살면 최신 전자기기나 명품 가방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보고 들어서 생긴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등산에 대한 욕망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에 대해 가진 욕망과 같다. 이것은 방향만이 다를 뿐, 크기는 동일하다. 산에 오른 후 느껴지는 행복함과 돈을 많이 번 후 느껴지는 행복은 같다는 뜻이다. 그런데 산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지만, 돈은 누구나 쉽게 벌 수 없다. 그렇다면 돈에 대한 욕망보다는 산을 오르는 욕망을 갖는게 나은 것이다. 더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이 정말로 이루고 싶은 욕망, 즉 혼자 해도 정말로 행복한 욕망을 찾아서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면 된다.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서 그것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데도 이것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모른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현인들은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서 하라고 조언한다. 도대체 그것을 찾기가 너무 힘든데 말이다. 하지만 깊은 수행을 거친 이들이라고 해도 각 개인이 무엇을 진정으로 행복해 하는지를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다. 보통 인간은 원래 자신이 하고픈 일이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간에 오랜 시간과 노력을 쏟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하고 하고픈 일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니 괜찮은 목표를 하나 정해서 적어도 10년 정도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봄이 어떨까? 물론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만들어지니까 상관없지만, 요즘처럼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시기엔 꽤나 현명한 조언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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