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성격 스펙트럼

아이루다 2014. 10. 28. 13:17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포르노 테이프를 복사해서 배포하는 일을 했는데, 일 자체가 조금 위험하고 더러운 일이었긴 했지만 먹고 살만 했다. 그는 어느 날 운명의 여인을 만났는데, 자신을 하는 일을 소개할 때, 애니메이션 테이프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여자는 이 남자를 믿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이 남자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동네 조직 폭력배의 보스 급인 남자가 이 남자의 타고난 배짱을 알아 본 것이다. 그는 그것을 테스트 하기 위해서 길거리에 있는 아무런 관련 없는 노숙자를 죽이고 오라고 한다. 그리고 남자는 거의 망설임 없이 그를 총으로 쏘고 난 후 차를 타고 도망친다.
 
그 후 이 남자는 전설적인 살인 청부업자가 된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 좋은 아빠였다. 그는 여느 아빠처럼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봤고 사람을 죽여서 번 돈을 이용해 풍족한 삶과 좋은 양질의 교육 기회를 선사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FBI의 오랜 추적 끝에 꼬리를 잡혔고 체포가 되었다.
 
그 후 가족은 그의 숨겨진 범죄에 대해 알고 난 후 남자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어떤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단 한차례의 면회도 오지 않았다. 이 남자는 나머지 삶을 오직 홀로 감옥에서 보내다가 죽는다. 그리고 그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긴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미국의 한 청부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특별하게 재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보는 동안 묘한 느낌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수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가족과 함께 있을 땐 누구보다도 선했다. 그는 악이었지만 선이었다.
 
아마도 그의 선한 면을 보고만 산 가족은 그의 악한 모습을 알게 되면서 거대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면에 그의 악한 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선한 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누구나 가족에겐 그렇게 하니까 이해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통 어느 정도 친분관계가 지속되면 그 사람의 특징에 대해 대충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편해지고 친해진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아는 모습 그대로일까? 착하고 선해 보이는 이들이 직업으로 하는 일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누군가에게 강압적인 행동을 하면서 이득을 취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 직접적으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아도 사람을 잘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개발 하는 일을 하거나, 담배를 만들어 팔거나, 몸에 매우 해로운 음식을 불법적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큰 돈을 벌 수 있는 계약 건을 따내기 위해서 비자금을 만들고, 그것을 담당자에게 불법 뇌물로 제공하는 일은 하고 있지 않을까? 친분 관계를 이용해서 차례로 잡혀 있는 수술 계획에서 자신이 아는 이의 순서를 앞으로 당기는 일은 하지 않을까?
 
물론 어떤 것들은 그럴 만 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아무리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의 기준점은 무엇인가?
 
병원에서 순서 하나 바꾼 것은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부모나 지인이 그것으로 인해 순서가 계속 밀려서 결국 제 시간에 수술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법적인 다툼이 벌어졌는데, 상대의 지인 중에 검찰에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있어서 재판 과정이 계속 불리하고 불합리하게 진행되어도 그것을 그냥 용인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우리는 단 10원의 손해라도 그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상황이면 참질 못한다. 우리가 대부분의 손해를 참는 이유는 그것이 대놓고 계산되지는 않기 때문이거나, 입은 손해가 따지기 위해 써야 하는 비용보다 훨씬 싸서 그럴 뿐이다. 그래서 손해를 입는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히 얼마를 어떻게 손해 입는지를 알지 못하니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손해에 대해서 너그럽지 않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아주 많은 일을 한다. 사장인 누군가는 직원들의 월급을 최대한 줄여서 자신의 가족에게 더 고급스럽고 안락한 삶을 줄려고 노력할 것이다. 변호사인 누군가는 자신에게 소송을 맡긴 사람을 최대한 설득해서 최대한의 보수를 얻어내려고 한다. 또한 어떤 의사 역시도 환자의 공포심을 자극시켜서 그가 더 많은 치료를 받아 치료비를 지불하도록 할 것이다.
 
이런 우리들의 행태는 너무도 많고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작든 크든 속이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가족과 함께 할 때 보여주는 그 자애로운 모습과 책임감 있는 모습 중 어떤 것이 이 사람들의 진정한 실체라고 봐야 할까? 그리고 같은 원리로 보았을 때, 과연 그들은 그 청부 살인업자와 다를까?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어도 그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만으로 보게 된다. 즉, 모든 사람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친절하고 누군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 드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이 언젠가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할 때는 어떤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 그 사람은 그것을 갚지 않을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로 보았을 때 우리는 실제로 좋은 사람일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이다.
 
재미로 하는 각종 성격 검사를 보면 대충 맞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판단하는 사람들 역시도 이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 특징이라고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의 비율 구성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잠재적 심리학이라고 하면서 검사하는 그 모든 문항에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에는 최대한 이기적이고, 그렇지 않는 곳에서는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 길 바란다. 누구도 이득이 걸리지 않는 곳에서 나쁘게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커다란 손해를 보는 바보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외롭고 심심하기까지 하니 누가 어리석게 그렇게 행동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 조절을 못해서 자신의 본심을 막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진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신의 감정이 드러날 때를 자세히 들어다 봐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이득이 걸리지 않는 곳에서 착하게 행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미래에 찾아올 우연한 이득의 가능성이 높아짐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끝없이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친절함과 선함을 기본으로 한다.
 
누구도 나쁜 사람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은 직업적으로나 필요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범죄자들을 보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말은 없는 편이었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말이다. 얌전했다고 하고 수줍음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실제로 이들을 사이코 패스라고 하지만, 이들을 사이코 패스라고 부르기엔 우리 사회엔 사이코 패스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양심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힘이 있다면 그것을 확실하게 쓰는 것이 권리라고 믿고, 누군가는 힘이 있더라도 그 힘을 불법적으로 쓰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개인의 철학과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사이코 패스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사이코 패스가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린 그럴만한 환경에 놓이지 않았고, 우리가 그들이 겪은 어린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나빠질 기회를 갖지 못해서 착하게 사는 이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나쁘게 행동할 만한 기회가 없으므로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도 역시 운이 없다면 언젠가 모든 것이 들어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괴로워하겠지만, 결국 죽지 않는 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럴 만큼 운이 나쁘지 않기에 착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착하게 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보면 우리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믿는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을 무턱대고 때리거나,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괴롭히면 분노가 폭발하여 미친 듯이 화를 내게 된다. 이런 이들일수록 조절이 안되어서 상대를 심하게 상해 입히거나 심지어 우발적인 살인까지 하는 경우도 흔하다.
 
반면에 늘 폭력과 함께 살아가는 조직 폭력배들은 사회의 악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최대한 건들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먹이 감이 되는 불법적인 영업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그들이 먹이로 삼는 나이트 클럽, 단란 주점 등은 모두 경찰을 부를 수 없을 만큼 크게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그래서 조폭들은 그곳을 자신이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뺏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필요하지 않는 한, 사람을 죽이는 짓은 안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장들은 그 돈을 뺏기고도 충분한 돈을 벌 수 있기에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사장이나 조폭이나 모두 자신의 가정에서는 다정하고 헌신적인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을 가지고 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이 발현될 기회가 없다면 굳이 들어내지 않는다. 특히나 악한 면은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주로 선한 면을 들어내려고 애쓴다.
 
우리의 차이점이라면 단지 어느 시점쯤이 되어야 악한 면을 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좀 더 일찍 들어날수록 우리는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좀처럼 들어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착한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손해를 입었을 때 견디지 못하는 것은 감정이기 때문이며, 감정은 좀처럼 조절되는 영역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비단 선악의 문제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모임의 장소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미묘하게 성격이 바뀐다. 부모와 같이 있을 땐 아이처럼, 아내와 같이 있을 땐 믿음직한 남편의 모습으로, 아이와 같이 있을 땐 아이처럼 책을 읽는 유쾌한 모습으로 바뀐다. 양복을 입고 어떤 자리에 갔을 땐 한껏 거드름 피우는 모습이 되기도 하고, 인생의 스승 앞에서는 한없이 복종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날 때와 직장 내 회식의 자리에서 다른 모습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회사 회식 자리라고 해도 말단 직원일 때와 회사의 사장일 때 다른 모습으로 참가한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 있으면 다른 모습이 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들 그 자체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아닌 모습은 없다.
 
내성적인 사람은 남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기회가 생겨서 자주 남의 앞에 서다 보면 어느새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남의 앞에서 말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성적이다. 외향적인 사람 역시도 자신이 잘 어울릴 수 있는 곳에서는 쉽게 앞에 나서지만, 자신이 전혀 모르는 영역에서는 조용히 있게 된다.
 
그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 우리는 끝없이 변하고 그 각 변화된 순간이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우리 머리 속에는 늘 어느 누군가에 대한 판단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오래 보면 볼수록 더 강하게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순간을 기억한 후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갖는다.
 
또한 그 상대 역시도 그 기대치를 알기에 둘이 만날 땐 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약 먹었냐' 혹은 '죽을 때가 되었냐' 라고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한번 고정된 모습을 바꿀 수 없다. 보통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 고정된 모습이 생기면 특별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그 모습을 유지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도 편하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편하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아는 그 사람의 다른 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말로 상황이 변화하여 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일이 정말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낯선 느낌은 바로 우리가 그 사람을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단지 평소 보여줬던 모습이 아닌 다른 곳에서나 보여줬을 법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뿐인 것이다.
 
이것이 오해를 낳고 서로의 관계를 훼손 시키기도 한다.
 
고정된 것은 편하고 안정적이다. 우리는 이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정한다. 우리는 신념과 믿음을 갖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을 만든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판단을 고정하고 그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고정은 모두 거짓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매일 매 순간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로 미세하더라도 변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변화하는 것을 고정시키면 결국 거기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그것은 흘러가는 강물을 붙잡는 것 같다.
 
그것은 잠시는 머물러 있는 듯 하지만, 금새 둑을 넘어서 흘러 버린다. 그리고 그 둑은 무너지고 만다. 우리에게 고정된 사고는 바로 이런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수 많은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의 성격은 누구나 최악의 것부터 최선의 것까지 모두 망라되어 있다. 우리들 각자의 차이는 그것의 구성이며, 도대체 자신의 최고의 이득, 즉 생명을 지키거나 가족처럼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가치를 위해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만이 다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익살스럽고 한없이 너그러운 어떤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딱딱하고 비정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단면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같이 살기도 하면서 같이 일도 해봐야 한다. 하지만 보통 그러면 많이들 실망하고 헤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만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영역은 실제로 전혀 다른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본에는 우린 한 가지로 고정된 성격이 아니란 진실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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