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감성 복사기

아이루다 2014. 9. 12. 09:51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감성이 바라 보는 방향 쪽으로 가까이 간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정말로 하고픈 것을 찾아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행복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감성을 갖길 바라고 또한 찾길 바란다. 물론 운이 좋아서 그것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조건으로 찾은 사람은 괜찮지만, 생각보다 이 감성의 바라보는 방향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로 느끼는 거의 모든 감성의 종류는 바로 타인이나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복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배가 아주 고픈 날, 삽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치자. 아마도 배고픈 이는 정말로 그 삼겹살을 먹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삼겹살을 먹으면 정말로 맛이 있다. 예상처럼 당연히 행복해지는 것이다.
 
다른 경우로, 눈이 아주 많이 쌓인 겨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TV 화면을 통해 봤다고 치자. 그래서 자신도 그런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먼 곳까지 여행을 하여 산을 올랐다. 그런데 제대로 준비를 안 한 탓인지, 너무 미끄럽고, 춥고,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걷자니 너무도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결국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행복해지지 못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감각으로부터 오는 행복과 감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각각 따라 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이다. 우리는 보통 감각으로부터 얻어지는 것, 즉 먹고, 자고, 싸고 하는 등의 본능적 욕구에 해당되는 행위를 했을 때는 큰 문제 없이 그 행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행복을 보장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감각이 아닌 머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성에 의한 행복인 경우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아주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즉, 행복 하려고 한 행동이 실제로는 돈과 시간만 버리고 심지어 불행해지기까지 한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감성 복사 행동 양식으로 인해 나타난다.
 
본능적 욕구를 제외한 우리가 느끼는 거의 모든 욕구, 즉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첫 번째로 하는 경험이라면, 어디선가 읽은 글이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간접 경험과 섞이고, 이미 자신이 경험했던 경험이라면 머리 속에 쌓인 과거의 기억과 뒤섞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카메라를 들고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거나, 영화를 보면서 맥주 한 잔을 하고 싶다거나, 사진으로만 보던 외국에 나가 멋진 도시들을 구경하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 같이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고 싶은 것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원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을 했을 때 자신이 상상했던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그것을 할 때,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서 심하게 왜곡되기까지도 한다.
 
예를 들어 우연히 일출을 찍으러 동해에 갔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10년만에 최고로 맑아서 정말로 멋진 일출 사진을 찍었거나, 외국 여행 중에 어떤 아주 친절한 외국인을 만나서 너무도 좋은 시간을 보냈거나, 맥주 한 잔을 하면서 별 생각 없이 본 영화가 너무도 재미있었거나 하는 것들은 원래 순전히 우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엔 이 때 느낀 감성의 경험에서 중요했던 운은 삭제된 채 기록이 된다. 우린 운이 좋을 때 좀 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며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한 번의 운 좋은 경험은 이 후 그 당사자가 그 행동을 반복할 수 있도록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비슷하다. 친구 중 누군가가 아름답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품 가방을 들고 나왔을 때, 이것이 부러워서 자신도 비슷한 가방을 사고자 하는 것 역시도 감성 복사의 한 종류이다. 좋은 가방을 사서 만족스러워하고 행복해 하는 친구가 느끼고 있는 감성을 복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친구의 감성이, 원래 그것을 자신이 너무도 좋아하는 남자가 사준 것이라서 행복해 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복사한 자신은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보통 이런 경우라면, 그 상대 역시도 누군가를 복사한 것일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이미 한 번 복사된 것을 다시 복사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향은 많이 나타난다. 원래 술자리에서 흥겨운 대화와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술자리가 주는 감성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복사한 사람은 술을 얼마나 많이 먹느냐를 가지고 경쟁을 한다. 이것과 명품 가방이 얼마나 비싼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원리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다. 이 둘 모두 감성을 뺀 외부의 형식만 복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린 왜 이런 잘못된 감성 복사를 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감성 복사는 이미 말했듯 행복하고 싶어서 일어난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자극 받은 후 그것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데, 이 때 복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것이 정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에 대한 문제는 스스로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런 복사된 감성은 실제로는 감성이 복사된 것이 아니라 그냥 욕망이 복사된 것이다. 그래서 욕망을 품은 대상을 얻어 냈을 때 우리는 일단 충족이 주는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혼동하여, 마치 자신이 원래 원한 감성을 얻을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욕망을 충족했기 때문에 행복한지를 판별할 방법이 없다.

 
명품 가방을 원한 사람은 명품 가방을 가진 것 그 자체로도 당분간은 행복해 한다. 또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더 주량에 세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갖기에 행복하다.
 
카메라에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멋진 카메라를 들고 멋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갖는다. 그리고 꽤나 자세히 카메라에 대해 공부를 하고는 자신의 경제력에 맞춰 적당하거나 약간 무리하게 카메라를 구입한다.
 
그리고 처음 얼마간은 정말 열심히 그것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진을 찍는 행위가 주는 감성을 복사하여 시작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서 점점 사진 찍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주말에 어딘가를 계속 나가야 하고, 또한 혼자서 다니면 심심하니까 같이 다니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같이 다니는 사람이 결혼을 하여 더 이상 같이 다니지 못하게 되면, 이젠 카메라는 점점 더 방에 걸려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이런 과정은 정말로 많이 일어나는 잘못된 감성 복사의 예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런 따라 하기 행동을 하다가, 진정한 자신의 감성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진 찍는 것이 시작했다가 너무 좋아서 아예 직업 자체를 사진 작가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1~2년 정도 하다가 카메라를 중고로 팔거나 그냥 장롱 깊이 숨겨 둔다.
 
또한 아주 어린 시절에 복사된 감성도 있다. 중학교 시절, 먼저 대학교에 들어가 멋진 모습을 보여준 형이나 누나 언니의 모습을 통해 대학생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자라면서 대학생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아이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 누군가 정말로 좋다고 들려준 음악을 듣고는 그냥 기억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느낌과 상관없이 누군가 멋져 보이는 이가 좋다고 하니 자신도 좋아한다고 믿는 현상이다.
 
이런 종류의 복사된 감성은 생각보다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말 그대로 그 감성에 대한 고집이 심각하게 나타나서 나이를 먹어도 좀처럼 바꾸질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 손 맛, 좋아하는 노래,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집착 현상 등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이렇게 복사된 감성을 가진 채, 자신이 정말로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하다고 믿게 되면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 속에서 조작된 감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감성을 복사한 후, 그것을 생각만 하거나 혹은 실천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그 감성은 우리의 기억과 함께 무척 심하게 왜곡이 되어 버린다. 좋은 쪽으로 느낀 감성은 정말 좋은 쪽으로 흐르고, 나쁜 쪽으로 느낀 감성은 정말로 나쁜 방향으로 흐른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감성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이 좋은 느낌을 가졌던 감성에 집착하면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당연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스스로 그럴듯한 이론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론에는 보통 우리 인간들이 좋다고 인정하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서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등산이 왜 좋은지에 대한 많은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등산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체력이 좋아서 남들보다 산을 잘 올라 좋아하는지, 아니면 같이 가는 사람이 있어서 좋은지, 아니면 오고 가면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맑은 공기가 좋은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것인지를 구분하는 방법 중 괜찮은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혼자서도 한다는 원리이다. 여행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을 혼자서도 떠난다. 영화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혼자 본다.
 
그런데 이 방법은 성격하고도 좀 연관이 있어서 이것이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완벽한 구분법은 못 된다. 그럼에도 일단 그것이 무엇이든지 혼자서 할 수 있다면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창조적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구분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을 할 때 과연 본질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냐에 대한 스스로의 관찰이다.
 
문제는 이것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깊은 사고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통 많은 사람들은 그 만큼의 깊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해도 별 상관이 없다. 쉽게 말해서 술 많이 먹는 것이 자랑스러워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술자리의 분위기에서 오는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 술자리에서 행복하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이것은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것들은 문제가 생긴다. 간에 이상이 생겨서 술을 먹지 못하게 된 사람 중에서 술자리 자체를 좋아한 사람은 계속 그 술자리에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술 많이 먹는 것을 자랑하던 사람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참석 할 수 없다.
 
또한 복사된 감성은 그 생명 주기가 상대적으로 짧다. 음악적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평생 다양한 음악을 즐기며 살지만, 10개의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그 모든 악기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장소만 차지하는 것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감성의 복사 여부를 판별하는 또 하나의 괜찮은 방법은 바로 그 감성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보면 된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감성에 대해서는 여유롭다. 하지만 반대로 남이 가진 것을 복사했을 땐, 이미 그 감성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내 스스로 만든 것은 가치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만들어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은 가치가 있어야만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외부에서 쓰레기를 주어오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 쓸모 있거나 가치 있는 것을 주어 온다. 따라서 복사된 감성은 반드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감성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즉, 복사된 감성은 신념화 되고 만다. 그래서 복사된 감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척 고집스럽게 그것을 지키려고 애쓴다. 스스로 만들어진 감성은 즐기고 끝나지만, 남으로부터 얻어 온 감성은 삶의 의미로 발전한다.
 

자신만의 감성을 갖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걸쳐 이것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결론으로 얻는 것은 삶의 공허함이다.
 
또한 과거의 조작된 기억으로부터 자신만의 감성을 찾았다고 느끼는 사람 역시도 결국 나이를 먹은 후 그 허상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하지만 이땐 이미 다른 감성을 찾기엔 너무 늦어서 그냥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 변했다고 생각한다.
 
슬프지만, 이 세상에는 스스로 감성을 창조해내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의 감성을 복사해서 자신의 것으로 믿는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다들 감성 복사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린 그것이 복사된 감성이란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비록 복사가 되었다고 해도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엇비슷해지는 경우도 있고, 무척 운이 좋아서 푹 빠지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단지 중요한 점은, 복사된 감성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할 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이 착각이 오래되고 왜곡될수록 우리는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하기가 쉽다. 또한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집착하고 고집스러워 진다.
 
우리는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것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지도 않고, 그것을 하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냥 행복해서 하는데 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감성을 스스로 만들어 낸 이들은 '왜 그것이 좋으냐고 물으면' 가장 곤란해 한다. 그냥 좋은데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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