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우울증

아이루다 2014. 8. 26. 08:40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판단기준으로 단순히 인간의 생명만을 기준점 삼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중 가장 나쁜 것은 바로 누군가 목숨을 잃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통계치 중 최근 사망 원인을 보면, 40세 미만에서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원인 중 자살이 1위, 그 이상은 암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 전체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암, 자살, 교통사고 이 세 개가 나이에 따라 순서만 바뀔 뿐 전 연령에 걸쳐 1,2,3위를 차지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요즘 암에 걸려 죽거나, 자살하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암이나 교통사고와 자살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인해 다른 모든 사망 원인은 자살과는 완전히 다르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바로 원하지 않는 죽음과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란 차이이다. 자살은 인간이 자신을 상대로 하는 살인 행위이며, 또한 인간이 선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것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자살이 흔한 사회에 살고 있어서 무뎌져 있을지 모르지만 원래 자살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자살이 주요 사망원인이 되는 나라는 흔치 않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좋지 않은 의미로 보았을 때 나름 독특함을 가진 나라이다.
 
아무튼 이런 슬프지만 우리들 대다수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통계치는 한쪽에 치워버리고 나서 우리 인간은 왜 자살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자살은 모두 동일하게 살아갈 희망이나 목적을 찾지 못해서 자신이 목숨을 끊는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원인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우리는 희망이 없어서, 두려워서, 미안해서, 그냥 살고 싶지 않아서, 우울해서,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많은 빚 때문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어서, 경찰에 쫓겨서,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이 많은 것들 중에서 오늘은 많은 이들의 자살 이유가 되고 있는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욕구를 통해 하고픈 일을 만들어 내고 의욕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리고 이 노력의 끝은 언제나 행복이란 매우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끝없이 되풀이 하는 과정을 우리는 인생이나 혹은 삶 이라고 부른다. 즉 우리는 욕구 생성 - 의욕 발휘 - 노력 - 달성 - 행복 이라는 흐름을 살아가는 동안 무한 반복한다. 물론 여기에서 달성을 실패하면 불행으로 이어지는 다른 흐름도 있다.
 
그런데 우울증이 심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욕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아니, 이것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욕구를 느끼는 원인, 즉 행복을 느끼고 싶다는 최종 목표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것을 해야 행복할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을 수 없을 경우이다.
 
우울증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 온다. 어떤 일을 해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결국 우리는 어떤 욕구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의욕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당연히 뭔가 이루려고 노력하고 살지 않게 된다.
 
이 우울증이 상시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을 우리는 우울증이란 병에 걸렸다고 한다. 실제로 이 우울증이란 병은 정신적인 증상이 아닌 몸의 호르몬 체계에 문제가 생긴 환자이다. 즉 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장시간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호르몬 분비가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못해 실제적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증상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권태이다. 권태는 얻어진 행복을 충분히 즐긴 후 지겨움을 느끼는 단계를 의미한다. 물론 권태는 권태증과 같이 하나의 증상으로 다뤄지는 병은 아니다. 단지 순간적인 모습만 놓고 보면 우울증과 권태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 둘 모두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권태는 다른 행복거리를 찾아서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의욕을 찾아낼 수 있는 반면, 우울증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우울증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몸 안의 보상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걸린 병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울증과 권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만 그 증상이 비슷하기에 같이 다뤄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바로 우리는 '왜 이런 원하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서 설명한 행복을 얻는 흐름을 다시 바라 보아야 한다. 일단 욕구 생성 - 의욕 발휘 - 노력의 흐름에서 결론이 달성 실패로 나게 되면 우리는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 아예 시작부터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와 결국 시작조차 못하게 만든다. 즉 이것은 욕구 생성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우울증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
 
물론 우울증의 원인은 다른 경우도 있다. 그것은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른, 의도하지 않는 경우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뺏기면 우울증에 빠진다. 이것은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전업 주부들이 흔히 겪는 증상이다. 그 전에 아기 엄마는 사람도 자주 만나고 밤에 잠도 잘 잤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하루 종인 아기 뒤치다꺼리에 잠도 잘 못 자고 사람을 만나 행복할 기회도 없으며, 거울 속 외모는 금새 아줌마처럼 변해 있다.
 
반대로 노력의 결과가 실패가 아닌 달성으로 끝날 경우엔 행복을 느끼지만, 이 경우에도 결국엔 권태로움이 찾아 오면서 우울증과 비슷한 결말이 나타난다. 이미 자극된 행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서서히 희미해지고 결국엔 더 이상 그것을 붙잡고 살면 안 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권태는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라는 단서가 붙는다. 물론 그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될 것이라서 같은 행복의 결말이라고 해도 성격에 따라 수 십 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단 몇 달이 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한 후 평생 권태를 느끼지 않는 부부도 있고 단지 몇 달 만에 행복했던 신혼을 기억하기 힘든 부부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연인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연인은 사귀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의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크게 나타난다.
 
일어나는 과정과 원인은 다르지만, 결국 이 둘 모두 공통적으로 다음에 와야 할 행복을 얻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권태로움은 이렇게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냥 현 상태가 바로 행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의 모든 행복은 유효기간이 있고 그 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권태가 이어진다. 그것이 아무리 큰 행복이라고 해도 말이다. 죽다 살아난 사람은 그 순간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다란 생존 본능적 행복을 느끼지만 10년만 지나도 까마득해지고 만다.
 
너무도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에게 있어서 유효기간은 2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후 노력하지 않는 부분은 금새 권태기가 온다. 그리고 우리는 이 권태를 싫증이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한다. 아니 실제로는 싫증을 더 많이 쓴다. 우리는 사는 것에도 싫증을 내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살고 나면 삶에 대한 권태기 혹은 싫증이 찾아 온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어떤 다른 의욕을 느낄 욕망을 발견하지 못한 채 장시간 유지되면 그것이 바로 우울증으로 발전되게 된다.
 
우리는 보통 권태를 행복과 분리한 개념으로 보기 쉬운데, 권태는 행복의 다른 한 면이다. 행복과 권태는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동전의 앞뒤처럼 정확히 붙어 있다. 우리는 그래서 그 모든 행복에서 권태를 경험하게 된다. 단지 이 권태는 노력에 따라 극복이 가능한데, 문제는 그 노력이 쉽지만은 않다.
 
우리는 행복을 얻기 전까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욕망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짧고 강한 행복의 순간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느낀 감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식어가면서 결국 권태로움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행복의 전형적인 공식이다.
 
그래서 우린 계속해서 욕망의 종류를 바꾸고 그것이 힘들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요소들을 바꾼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매일 입는 옷과 같다. 우리는 옷이라는 것은 반드시 입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같은 옷을 입길 원하지 않는다. 같은 옷은 지겨움 혹은 권태를 말한다.
 
하지만 옷의 개수는 한계가 있다. 또한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나 그 안의 다른 것들 역시도 한계가 있다. 결국 언젠가는 그것들이 다 경험해 본 순간 우리는 새로운 옷을 사거나 혹은 다른 욕망을 억지로 찾아야 한다. 물론 옷을 사는 것은 쉽다. 하지만 욕망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이 먹은 이들은 젊음이 부럽고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육체가 젊다는 것이나 살아갈 날이 많아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젊음이 좋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것이나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끝없이 새로운 지식을 쌓는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더 많은 지식에 노출되어 된다. 이 말은 바로 우리가 오래 살면 살수록 경험과 정보에 대한 권태를 갖는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젊은 시절보다 좋은 명작 영화도 많이 보았고, 정말 신기한 경험도 더 했고, 처음 가볼 수 있는 장소도 줄었고, 여자나 남자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했던 젊은 시절엔 남녀가 손끝만 스쳐도 찌릿한 경험을 했고 친구들끼리 놀러 갈 생각을 하면서 밤 잠을 설치기도 했다. 또한 여행을 가서도 친한 친구와 밤새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너무도 재미난 책이나 만화를 읽으면서 밤을 새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은 후 이 많은 짜릿한 일들은 대부분 경험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더 짜릿하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찾기가 힘들다. 살아오는 동안 우린 자전거도 배웠고, 해외 여행도 했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해봤고, 호텔에서 잠도 자봤고, 멋진 해변도 몇 차례 보았으며, 결혼도 했고, 자녀도 키워 봤으며, 취직과 승진도 경험해 봤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권태를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나마 남은 유일한 짜릿함, 즉 불륜과 같은 짓을 저지르면서 인생을 건 도박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나이를 먹은 이들이 젊은이들에게 가장 부러운 것은 바로 경험하지 않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글 시작부분에서 말했듯 권태로움과 우울증 등은 결국 심하면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아주 무서운 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인간이란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 즉 생존에 대한 욕망을 뛰어 넘는 결정을 하게 만든다. 자살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체로써 정말로 최악의 선택인 셈이다. 늘 지키려고 노력해도 잘 안되고, 열심히 노력하고 운도 따라서 오래 살지는 모르지만 결국 늙어서 죽는 우리의 삶을 생각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심각한 마음의 병을 갖게 되었을까? 암은 위험하지만 이해는 가는 병인 반면 자살을 부르는 생존 본능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는 이 우울증과 권태는 왜 생겨 났을까?
 
냉정이 말해서 우리가 이런 생존과 반대되는 개념의 병을 갖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우리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온 문명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주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서 우리 인간 종족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했고 더 나아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그 거의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켜 버렸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대형 육식 포유류는 이젠 만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우리는 건물을 짓고 도로를 뚫는 등의 작업을 통해 어디든 안전하게 이동하고 또한 잠을 잘 때나 쉴 때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으면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안전을 보장 받은 대신 생명의 보전을 위한 자극을 근본적으로 없앰으로써 우울증이과 권태라는 치명적 병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우리는 평소엔 '위험' 이란 단어를 극도로 회피한다. 하지만 실제로 적당한 위험은 우리의 삶을 활력 있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위험 앞에 섰을 때 가장 활발히 움직인다. 그리고 거기엔 오직 생존이라는 유일한 목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5년 미국 옐로스톤 공원에 회색 늑대를 복원해서 풀어 놓은 후 그 공원 생태계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 복원된 회색 늑대는 그 공원 지역에서 최상위 포식자 - 늑대를 잡아 먹고 사는 동물이 없는 상태 - 였는데, 이들이 사슴과 같은 초식 동물의 개체 수를 자연스럽게 조절하면서 숲 전체가 활기차게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식자가 생김으로써 사슴은 좀 더 빠르게 움직이고 그 덕분에 건강해졌으며, 풀은 사슴 수가 조절됨으로써 더 크고 풍성하게 자랄 기회를 얻었고, 늑대가 잡아먹고 남은 사슴의 시체는 다양한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 준 것이다.
 
회색 늑대는 그 지역 초식 동물들에겐 거대한 위험이었지만 결국 이들은 공원 전체의 생태계를 부활시켜 준 셈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인간에게도 회색 늑대와 같은 것이 생긴다면 우리는 언제 우울증과 권태를 느꼈는지도 모르게 활기차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새롭게 생긴 위험은 우리에게 큰 공포를 일으키겠지만 말이다.
 
앞으로 세상은 더욱 안전하게 갈 것이고 우리는 더 우울하고 더 권태로울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살자는 더욱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또한 멀쩡한 사람들 역시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세상에 익숙해지고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삶에 대한 권태로움을 느껴 결국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될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행복에 대한 조금 새로운 접근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잘 생각해보면 우울증은 행복을 원했지만 이룰 수 없는 상태의 반복이나 혹은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 발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권태 역시도 행복의 또 다른 얼굴이다.

 

즉 이 모든 것이 바로 행복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는 욕구나 혹은 행복하고 싶어하기에 행복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할 때 모두 권태와 우울증을 통해 불행함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웃긴 상황이다.

 

행복하려고 했기에 불행해진 것이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만약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면 불행하지 않게 된다. 웃기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렇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욕구를 버리는 순간 우리에겐 절대로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

 

불행하지 않은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단지 불행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극적이지는 않아도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것도 나름 괜찮은 삶이 아닐까 싶다. 물론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긴 한다. 그럼에도 평생을 행복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 한 번쯤 이런 시도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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