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질투, 그 두 번째 이야기

아이루다 2014. 8. 15. 09:15

 
예전에 감정에 대한 고찰 편 시리즈를 기획했다가 몇 개의 주제만 나열하고 말았었다. 뭐, 그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이 그리고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정말로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으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좀 과격한 감정인 질투, 분노 등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끝냈다.
 
그런데 오늘은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 역시도 전체적으로 보면 감정에 대한 분석 과정 중 일부가 될 것이다. 언젠가 좀 더 나이를 먹고 또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한 후 나는 내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타인이 느낄 것 같은 감정에 대한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질투는 다들 알다시피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단지 부러워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심하게 상처를 입고 그래서 기분이 아주 나빠지는 상태를 표현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질투와 분노 혹은 화를 내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꽤나 재미난 접근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분노나 화를 낼 때 그것을 명시적으로 감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화를 낼 때의 표정과 목소리, 행동 등은 꽤나 정형적이고 인간 세상에서 익숙해진 이들은 것을 쉽게 감지해낼 수 있다. 우리는 화가 난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신경을 쓴다. 위로를 하든, 멀어지든, 조심하든.
 
그럼 질투는 어떨까? 질투는 화나 분노에 비해서 조금 덜 명시적이다. 그래서 무딘 사람들은 감지를 못하는 경우도 많고 설령 감지가 된다고 해도 그것을 명확하게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예상 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의 가장 큰 이유에는 바로 질투를 내는 당사자들은 보통 자신이 질투를 느끼는 것에 대해서 최대한 표출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기 때문인데, 그 배경엔 당연히 질투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한 몫 한다.
 
우리는 흔히 질투를 하는 것을 한심함, 열등감 표출, 찌질 함, 자신의 못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타인의 행운을 있는 그대로 축하해주지 못하는 아량 없음 까지도 추가된다. 거기에 더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 현재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꼴이 되어서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행복할수록 타인의 행복과 행운에 무감각해진다. 그래서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과 행운에 대해서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다. 그러니 만약 타인의 행운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는 말은 말 그래도 현재 자신이 행복하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질투를 하는 사람은 질투 자체 때문에도 화가 나지만 자신이 만약 그 질투하는 감정을 들키게 되면 이젠 두 번째 분노가 생겨난다. 자신의 불행함, 모자람을 스스로 인정한 현장을 타인들이 인식한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이렇듯 분노와 질투는 완전히 다른 감정처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 두 개를 단순한 시선에서 바라보면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기분이 나쁘고 그 순간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 역시도 생각보다 단순하다. 분노와 화는 그것을 불러 일으킨 원인을 남들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고, 반대로 질투는 그 원인이 보통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것일 뿐이다.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식당에서 자신이 주문한 식사가 더 늦게 온 사람들보다 늦어지게 된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옆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때는 종업원을 불러서 화를 낸다. 하지만 순서는 지켜졌지만 옆 테이블에 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가 5개인 반면, 자신들의 테이블엔 3개였을때 사람마다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누군가 공정하게 반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종업원을 불러 5개를 채워줄 것을 요구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것이 찌질 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속으로는 불만이라도 그냥 밥을 먹고 나가게 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제 삼아서 종업원에게 심하게 화를 낸다.
 
여기에서 분노와 질투는 어지럽게 섞인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옆 테이블에 올라간 반찬 따위에 질투심까지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그 대상의 비용이 높아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회사에서 추석 선물을 나눠주는데 뽑기를 통해 1등은 100만원 정도의 상품권을 주고 대다수의 꽝에게는 김을 준다고 했다면 상품권을 받은 사람에게 김을 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분명히 질투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이득을 얻는 대상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질투를 느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 연인 관계인 사이에 질투가 벌어지면 그것이 얼마나 큰 분노가 될까?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도가 지나칠 만큼 신경을 써 준다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건 계란말이도 아니고 100만원짜리 상품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지도 모르는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분노와 질투의 경계는 바로 '도가 지나치다' 라고 느끼는 부분이 된다. 문제는 이 도가 지나침은 사람마다 너무 다른 판단 기준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인해 기분이 상한 사람들은 이것을 분노로써 정당하게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질투로 여기서 최대한 표시내지 않아야 할지 혼란스럽게 된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이것이 제대로 처리가 안되면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분노와 질투는 그 근본에서는 동일한 감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기분이 나쁜 상황을 질투로 느끼거나 분노로 느끼는 것은 오직 그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다. 그래서 그 결과 역시도 당사자가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질투와 분노의 상관관계를 간단히 이해하고 이젠 우리가 왜 질투를 느끼게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이것에 대한 답은 참 쉽다. 부러우니까 질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한다.
 
간단한 예를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돈이 많기로 손꼽히는 사람은 바로 삼성의 이건희씨이다. 알려진 자산만 조 단위가 넘어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옆자리에서 근무하는 김대리가 최근에 큰 행운으로 돈을 벌거나 혹은 빠른 진급을 했다고 했을 때 이것을 질투하는 사람들은 이건희씨를 질투하는 사람들보다 많을 수 있다. 김대리가 얻은 행운은 잘해야 몇 억 정도일 것인데 조 단위 이득을 얻든 이건희씨에 비해서 왜 사람들은 더 질투를 느낄까?
 
그 이유는 질투의 가장 큰 밑그림에는 바로 자신도 노력하거나 조금 행운이 따르면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러움 정도만 느낄 뿐 더 이상 감정이 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뛰어난 천재들을 봐도 숭배하고 부러워할 뿐 거기에서 머문다. 일반인에 비해서 비정상적인 미모와 신체 능력을 가진 배우나 스포츠 스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건희씨처럼 대단한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렇다.
 
이들이 가진 것들에 대해서 만약 질투를 느낀다면 그것은 정말로 비정상적인 집착을 것이다.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행하기 살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갖지 못할 건 빨리 포기한다.
 
문제는 조금 노력하거나 행운이 따르거나 혹은 많은 노력을 하면 얻어질 것 같은 것들을 얻은 사람들이다. 같이 공무원 공부를 한 사람들 중에서 먼저 합격을 했거나, 회사에서 입사 동료이지만 먼저 진급한 사람이거나, 대학 졸업 후 시작은 같았지만 훨씬 빠른 성공을 거둔 동창을 볼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노력하거나 운이 따랐으면 그 자신 역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그런 것들은 자신이 당연히 얻어야 하는 것들일까? 이것은 정말로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주제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같은 조건 하에서도 조금의 노력만으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다. 운이 많이 따르는 이들은 특히 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온 행운은 왜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리 인생은 불공평한 것일까?
 
이 마음을 잘 살펴 봄으로써 우리는 질투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어떤 것이라도 해도 그것은 단지 운이라는 점이다. 물론 머리가 좀 더 좋고, 뛰어난 외모를 가졌고, 발군의 신체 능력을 가진 이들은 확률적으로 운이 따를 가능성이 높아지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이다. 따라서 100%가 아닌 바에야 모두 이 확률이 삶을 지배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두에게 공평한 확률이 자신에게만 크게 작용해야 한다고 믿는 것일까? 사업을 해서 성공하고, 직장에서 빨리 진급하고, 멋진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시험을 보면 합격하고, 자녀를 키우면 훌륭히 자라고, 집을 사면 그 집 값이 오르고, 여행을 가면 최고의 날씨가 되어야 하고,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가면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되길 바란다.
 
남들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음은 당연하고, 자신에게 운이 따르지 않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좀 생각을 해보자. 과연 주변에 보면 운이 따르는 이들이 많은지, 아니면 따르지 않는 이들이 많은지를 말이다.
 
폐지를 주어 살아가는 할머니는 월급을 천 만원씩 받는 동네 총각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 할머니는 같은 동네에서 경쟁적으로 폐지를 줍는 다른 할아버지의 리어카에 올려진 박스를 보면서 질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질투의 근원은 이 할머니의 모습과 완전히 동일하다.
 
왜 우리는 자신에게만큼은 반드시 행운이 와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 자신은 남들과는 다르게 왜 이렇게 특별해야 할까?
 
자신의 특별함에 대한 착각이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이 되고 있음을 알긴 어려울까?
 
우리 인간을 원자 단위로 뜯어보면 거의 유사한 원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세포단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거의 비슷한 원자가 모여 세포를 이루고 이 세포들이 모여서 장기를 이루고 이 장기들이 모인 후 하나의 사람이 된다. 우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세포를 가진 존재이지만 우리의 시작은 모두 동일하게 단 하나의 세포였다.
 
부모를 잘 만나 뛰어난 머리를 갖든, 신체적 능력을 갖든, 돈이 많든 그것 역시도 운에 달렸다. 어떤 나라에 태어나느냐와 어떤 부모를 만나는 것은 행복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할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병철씨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한 이건희씨나 아프리카에 태어난 마이클 조던 이나 전쟁터에 끌려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입사한 동료나 옆집 아파트에 사는 사람, 자신이 절친하다고 믿는 친구나 배우자와 자녀까지 모두 그 시작은 바로 선택이 아닌 운에 의해서 결정되고 맺어진 관계라는 점을 우리는 왜 인식하지도 인정하지 못할까?

물론 시작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개인의 노력과 성향이 크게 좌지우지 하긴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나지도 못했다면 그런 일은 시작도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시작이 거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그 모든 것은 일단 운에 따를 수 밖에 없게 된다.
 
질투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질 모든 것에 대해서 당연함을 지우면 된다. 또한 이것은 행복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 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닌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행운에 대한 감사함이 우리의 삶을 좀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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