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두려움, 모든 감정의 근원

아이루다 2014. 8. 18. 07:47

 
코끼리를 처음 접한 장님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대한 손을 벌려 코끼리의 몸을 만져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참 시간을 보낸 후 그들은 다시 모여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 중 같은 생김새를 묘사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크기를 가진 우주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코끼리이다. 하지만 단지 이 우주가 거대하다고 해서 코끼리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주에 비해 비교도 안되게 작은 인간 자체도 하나의 코끼리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은 바로 장님에게 있어서 코끼리와 같다.
 
우리 인간은 그 동안 문명을 이루어서 많은 지식 체계를 이루었지만, 우리가 이해 해야 할 우주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방대하고, 인간은 매우 오랜 시간을 걸쳐 아주 복잡하게 진화해왔다. 결국 이렇게 크고 오래된 것들을 단지 몇 천 년에 걸친 지식으로 전체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또한 했다고 자부해도 그것은 우리들의 오만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비록 우리가 장님은 아닐지라도, 어떤 방법을 써도 코끼리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분명 삼차원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보는 시선은 한 순간 오직 이차원이기 때문인 것과 같다. 결국 우리는 코끼리의 옆면과 앞면을 동시에 볼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인 셈이다.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인간에 대해 꽤나 오랫동안 지식을 쌓고 분석을 해 왔지만, 인간의 복잡성은 한 쪽 단면만으로 보면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특히 우리 인간이 가진 정신세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결국 그 상황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한계는 그 상황으로 명확하게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이 글을 통해서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아니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장에 가깝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어떤 분들은 공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다른 분들은 이 글이 참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가지는 바로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기본적 감정으로 알려진 희로애락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인간은 이 기본 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아주 많은 형태의 혼합된 감정을 가진다. 애매함, 심심함, 외로움, 속상함, 부러움 등등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단어는 나열하자고 한다면 정말로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 감정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근원적인 것이 있다고 믿을만한 것은 없을까? 마치 우주론 중에 상대성이론이 이 우주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고 관찰한 그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듯이 말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기본적 감정인 즐겁고, 행복하고, 분노하고,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에 대한 힌트를 얻어보기로 하자.
 
아내가 파티장에서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신사와 아주 즐겁게 대화를 하는 광경을 본 남자는 속으로 강한 질투를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 남자는 후에 이 날을 기억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당시엔 아내의 행동으로 인해 분노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아내가 나를 떠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이 바로 분노의 원인이었다.
 
만약 아내가 남자를 떠나게 되면 남자는 그 동안 가꾸어 온 가정을 포기해야 하며,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포기해야 하며, 결국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진정한 공포이다. 그리고 이 공포를 느낀 남자는 공포심으로 인해 강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간단한 또 하나의 비슷한 예를 생각해보자.
 
어둠 속에서 친한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깜짝 놀래 킨다. 장난이었지만 너무 놀란 당사자는 크게 화를 내고 이런 장난을 다시는 치지 말라고 정색을 한다. 친구는 단지 장난이었는데 당한 친구가 너무 화를 크게 내니 당황스럽지만 일단 자신의 잘못이 있으니 알았다고 한다.
 
이 경우도 친구가 놀랜 공포심으로 인해 친구에게 분노를 느끼는 경우가 된다. 그렇다고 모든 분노가 공포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그 변화 과정을 잘 인식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공포는 분노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어떤 고통을 느낀다. 현대인은 보통 배가 고파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것이 어떤 고통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공포를 느끼게 하는지 잘 모른다. 현대의 삶처럼 풍족한 먹이가 보장된 곳에서는 먹는 행위는 즐거움을 불러오는 것이지만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는 먹는 행위는 생존에 직접 연결된다.
 
그래서 먹을 것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 조상들은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창을 들고 나가 사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운 좋게 성공하게 되어 사냥감을 잡는 순간 거대한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보장 받았다는 희망이며, 우리의 몸은 그것에 합당한 행복이란 보상을 준다. 또한 무리 지어 사냥을 할 때 최종적으로 사냥감의 목에 창을 꽂아 넣은 사람은 그 용맹함과 중요도를 보장 받으면서 무리로부터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감과 자존감을 만족시켜 준다. 이 역시도 행복의 원천이 되어 준다.
 
또한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이젠 배가 고픈 공포심에 의해 사냥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할 때 느껴지는 희열과 그 후 결과를 통해 받는 행복을 예상하고 나가게 된다. 그래서 힘든 사냥은 점점 즐거운 것으로 변화되어 간다. 하지만 이 사냥 행위에서 늘 쳐지고 제대로 된 결과도 못 내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깊은 공포에 빠져든다. 그렇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 완전히 다른 둘의 차이는 단지 신체적 능력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사냥꾼이기 때문에 사냥을 즐기고 사냥터를 지배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천적 공포를 지배한 것은 아니다. 그 뛰어난 사냥꾼은 언젠가 자신이 감당할 수준을 훨씬 넘어선 존재를 만나는 순간 그 동안 자신이 무엇을 착각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그 동안 쌓은 자존심으로 끝까지 적에게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미래에 행복할 수 없다는 것 역시도 두려움의 일종이다. 불행해지게 되는 것은 고통이며 고난이며 무엇인가 힘겹게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극복의 과정이나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모두 불행이며 그것을 해야 될 때는 우린 공포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원칙과 함께, 언제라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늘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 자체를 언제든지 뺏길 수 있는 공포심을 평생 지닌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생명의 연장이라는 최종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서는 끝없는 두려움을 통해 생존을 위한 다양한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영생의 삶을 약속 받는 수 밖에 없다. 고통도 느끼지 않고, 다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삶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근원적인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한다.
 
아이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원을 찾은 엄마의 얼굴에도 역시나 두려움이 가득하다. 정말로 운이 없이 아이가 만약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엄마의 마음은 가늠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세상을 더 살고 싶다는 욕구마저도 살아지겠지만 그 근원엔 앞으로 삶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가 사라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행복을 갑자기 뺏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절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절망의 공포는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너무도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고 분노의 화신이 되겠지만 그 근원엔 역시나 자신의 행복이 사라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 두려움은 두려움을 가져온 상대를 원망하게 되고 그 원망은 분노로 바뀌어 어떤 사람들은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은 살인을 한 후 자신이 받을 처벌의 두려움마저도 넘어 선 것으로, 미래의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 된다.
 
우리는 이렇듯 모든 감정적 반응의 배경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발달된 문명은 우리가 죽음을 쉽게 느끼지 못하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포식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자신보다 힘이 센 이들이 언제든 나를 때려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또한 우리는 적어도 굶어 죽는 일은 흔하지 않으며 거기에 더해서 발달된 의료 시스템은 웬만한 병은 고쳐준다.
 
그래서 과거 우리 조상들이 느꼈을 두려움 중 아주 많은 부분이 내면 깊숙이 숨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젠 두려움을 잘 모른다. 이 상태에서 우리의 기본 감정인 희로애락은 마치 그 자체가 우리의 근원 감정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조건부이다. 우리는 언제고 문명에서 버려지는 순간, 우리 조상과 마찬가지로 온통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전염병이 돌아 문명이 망가지거나 혼자서 사나운 동물들이 존재하는 무인도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우린 금새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로 느껴지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잊었던 우리의 감정의 본질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쁨은 두려움의 원천을 해결했을 때, 분노는 두려움을 느낄 때, 슬픔은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즐거움은 두려움을 잊을 수 있을 때 나타난다.
 
또한 우리가 목숨과 같이 원하는 행복 역시도 두려움과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미래의 두려움을 많이 해결해 놓으며 놓을수록 더욱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있어서 돈은 행복을 위한 매우 좋은 도구로 환영 받고 있다. 돈은 좀 더 견고한 집과 좀 더 확실한 보호와 좀 더 명확한 생존 가능성을 보장해준다. 그리고 더해서 더 좋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음을 약속 받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앞에서 말했듯 현대인들은 우리의 문명으로 만들어 낸 사회 시스템의 보호로 인해서 우리가 원래 가졌던 두려움을 많은 부분을 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라진 것이 아닌 잊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된 우리의 경험은 이젠 우리의 감정의 원천이 바로 두려움이란 것마저도 부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심지어는 그래서 행복하지 않으면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이런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죽음의 공포 앞에 섰다가 운이 좋게 살아 났을 때 어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지를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없앤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 것뿐이다.
 
두려움은 생존과 연결이 된다. 우리는 두려움을 통해 생존한다. 우리는 굶어 죽을 까봐 사냥을 하고 일을 한다. 우리는 지쳐 죽을 까봐 잠을 잔다. 우리는 자는 동안 보호를 받기 위해 동료를 사귄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각종 무기를 만든다.
 
단지 현대인들은 이미 확보된 다양한 안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을 주던 원래의 감정, 즉 각종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늘 금새 익숙해져 버리는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감정을 줬던 근원적 문제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누가 회사에 출근하면서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며, 잠을 자다가 적의 침입으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겠는가? 우리는 문명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거의 영원히 멀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어쩐지 이것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타인과 적절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세계 어디든 여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문명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오지라고 해도 그곳 역시도 인간의 작은 문명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매일 생사가 넘나드는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하루라도 산 것이 행운이다 싶을 것이다. 현재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생존 자체가 행복으로 느껴지게 된다. 직장에 출근했다가 퇴근 하는 길에 자신의 생존을 기뻐하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도대체 어떤 기분을 느낄까?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반복되는 상황으로 인해 공포심이 주는 긴장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 세계가 무너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두려움이 주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요즘 보통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귀찮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든 단순한 심부름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며칠을 굶은 호랑이를 잡는 일이거나 혹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워야 하는  일일 경우에 우리는 적어도 귀찮음을 느끼진 않는다. 거기엔 긴장과 공포 그리고 날이 선 신경만이 존재하고 있다.
 
쉬는 날 동네 슈퍼에 다녀오는 일이 죽음을 각오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귀찮음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온통 긴장한 상태에서 용기를 낼 것이고, 조금이라도 선택 가능 하다면 최대한 안 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그것을 해야 할 때,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그것을 하게 되었다면 남 몰래 안도감으로 인해 행복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그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 만으로 행복하고 또한 하루를 살아 남았다는 것으로만도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도 그것을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높은 산을 오르거나 끝을 알 수 없는 동굴을 탐험 하거나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화산에 가깝게 접근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믿어진다. 또한 그런 그들이 담아 온 영상은 다른 이들이 두려움을 덜 느끼면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라진 공포는 이제 그것을 통해 얻었던 것도 빼앗아 버렸다. 우리는 문명 사회에 속해서 다행히 공포와 두려움은 잊을 순 없었지만 대신 우리는 귀찮음과 권태로움과 같은 달갑지 않은 선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도 남아 있는 두려움도 아주 많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우리가 가진 두려움 중에서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을 극복할 때 커다란 희열을 선물 받는다. 마치 사냥을 즐기게 된 사냥꾼들처럼 말이다.

 

운전 경력이 부족한 초보 운전자들의 대부분은 도로 위를 달릴 때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주행 거리가 늘어감에 따라 점점 익숙해지고 자신의 마음대로 다뤄지는 듯 느껴지는 차를 운전하는 일은 점점 두려움에서 재미로 바뀌어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변화가 모든 이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탁월한 운전 실력을 보여주면서 이젠 아예 행복을 목적으로 해서 차를 운전하기 시작한다.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불리는 영역은 이보다 좀 더 극적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못내는 매우 위험한 스포츠를 자신이 타고난 육체적 능력과 노력을 더해서 거의 불가능 해 보이는 활동들을 해낸다. 그리고 그것을 해 냈을 때 그들은 엄청난 양의 희열을 선물 받는다.

 

하지만 이런 희열은 다시 우리를 망가뜨리는 역할도 한다. 두려움이 사라진 우리는 용감하고 도전적이며 활기차고 그로 인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라진 두려움은 결국 우리의 부주의를 만들어 내고 언젠가 결국 결정적인 실수 한 번이 당사자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도전을 즐기는 이들은 도전할 용기는 잃지 않되, 마음 속의 두려움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없앤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두려움을 걱정이란 단어로 변경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치 두려움은 원초적인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걱정은 마음을 먹기 따라서는 안해도 될 선택적인 것 마냥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단어를 바꿨다고 해서 그것이 가진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 중에 '시험에 떨어질까봐 걱정이야' 라는 말은 '시험에 떨어질까봐 두려워' 라는 말로 바로 바꿔서 쓸 수 있다.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아플까봐 걱정이다' 역시도 표현이 가진 정도의 차이일 뿐, '아플까봐 두려워' 라고 써도 같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단지 걱정은 두려움이란 표현에 비해 좀 가볍게 느껴질 뿐이다.

 

이 걱정은 보통 미래에 다가올 어떤 좋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래서 이것은 아직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문명의 사회를 만들어 현재의 자신은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으나 미래에 자신은 어떻게 될 지 알 방법이 없어서 끝없는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걱정은 걱정거리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으로 인해 미래에 벌어질 연관된 각종 문제점이나 혹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은 또 다른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숙명과도 같은 삶의 진정한 맨 얼굴이다.

 

물론 우리가 하는 많은 걱정거리는 보통 기우에 불과하다. 즉,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일들인 셈이다. 또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차를 운전할 때 사고를 두려워 하거나, 외나무 다리를 건널 때 떨어질 두려움을 갖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물론 간혹 일어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엔 단지 어둡고 눈에 보이는 것만 없어도 엄청난 두려움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걱정으로 표현될 수는 없다. 우리는 평소에 어둠에 있게 되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고 살지만 이것은 그럴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만약 자주 정전이 되는 곳에서 산다면 우리는 이것도 걱정을 하고 살아가게 된다.

 

이렇듯 두려움은 보통 걱정을 포함한다. 즉, 걱정은 두려움의 일부분만을 바라 본 모습이란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가진 본능 중 유일하게 공포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식의 욕구이다. 자연계에서 그렇고 인간 역시도 그렇다. 우리는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쓴다. 풀벌레는 소리를 내어 짝을 부르지만 자신의 천적인 새도 부른다. 그 순한 초식 동물도 짝을 찾는 순간엔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벌인다. 또한 짝을 만나 교미를 하는 순간 모든 존재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놓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서 생식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영원히 존재할 수 없기에 반드시 미래의 자손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필멸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의 미래는 이미 많이 줄어든 두려움을 더 줄이는 쪽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우리는 더 안전하고 더 발전된 의료 시스템으로 삶을 연장하고 치명적인 병들의 치료법을 개발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더 우리가 원래 가졌던 두려움에 대해 잊고 마치 세상이 온통 장밋빛인냥, 행복을 위한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갈 것이다.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고, 불가능한 도전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여행 중 만난 강도에게 칼로 협박을 당하는 순간 우리는 수 십년간 잊어 온 두려움을 실체와 마딱뜨릴 것이고, 수 천미터의 산에 오르다가 사고를 당해 눈 속에서 서서히 얼어 죽어가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사랑 하는 가족 중 하나를 잃는 순간 자신이 믿었던 행복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끝없이 두려움과 싸우고 두려움을 없애면서 행복을 찾아 가겠지만 우리가 불사의 몸의 되지 않는 한 그 꿈은 언제든 깰 수 밖에 없는 춘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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