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인간 분류 - 2편. 중립에 선 사람들

아이루다 2014. 7. 11. 06:51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서 인간 분류 그 두 번째 이야기로써 '타인을 잘 이용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이용도 잘 안 되는 사람들'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실제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계층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일단 일반적이지도 흔하지도 않은 성격이면서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 계층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기 만족도가 높다는 점이다. 즉, 좋게 이야기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여 그 안에서 충분히 만족할 만큼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거나 혹은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는 짓을 잘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진 욕망을 이미 충분히 충족시켰기에 그것을 위해 힘들게 남을 이용하려고 하거나 가진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남에게 이용당할 가능성도 많이 줄어든다.


또한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타고난 능력이 좋은 경우는 정말로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혼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해서 잘 살아갈 수 있으며,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돈이나 환경에 크게 영향 받지 않으면서 즐기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최고의 삶으로 평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타고난 능력이 좋아서 자신이 가진 욕망의 대부분을 충족할 수 있었기에 그리 욕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남을 잘 이용할 필요도 또한 이용당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두 경우는 결론은 같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것이 맞다. 원래 이 글에서 언급하려고 했던 계층의 사람들은 보통 어떤 조건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돈이 많든 적든 능력이 뛰어나든 아니든 상황이 어렵든 쉽든 상관없이 그 안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최대한 뽑아내는 능력이 있는 반면, 욕망이 충분히 충족되어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르게 그 존재를 그렇게 만들어준 돈이나 집안 환경 등의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금새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돌변하게 된다.


이것은 집에서 키우는 착하고 순한 개와 이미 사납지만 충분히 먹어서 착해 보이는 사자의 차이와 같다. 하지만 배가 고파질 때 개는 사람을 물지 않지만 사자는 언제든 사람을 잡아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는 배가 계속 불러 있을 경우엔 마치 개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자가 그 자신을 마치 정말로 개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 사자가 아주 오랫동안 먹을 것 걱정 없는 삶에 노출되었다면 그 야성이 줄어들지는 몰라도 그 잠재적 야성은 죽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두 번째 부류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는 조건부로만 유효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그 조건만 유지된다면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기에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제법 있어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글에서 말하려고 하는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진정으로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좋으면 좋은 대로 만족하고 반대로 그렇지 못하면 못한 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능력이 되고 시간이 되면 멋지고 폼 나게 살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더라도 남들이 보기엔 구질구질해 보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아가기에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특징은 타인들의 비해 이들의 삶을 훨씬 더 행복하게 하는데 원천적인 원인이 된다. 또한 이렇게 얻어진 행복은 추가적으로 더욱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 바로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보통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본인이 특별히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면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큰 문제가 없다면 불행하게 사는 이들보다는 행복하게 사는 이들이 자기 주변에 있길 바란다. 그리고 행복하면서도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사람을 원한다. 즉 이 말은 상대가 자신의 질투심이나 시기심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심 없고 행복한 사람을 선호하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의 본능 중에서 계산을 최대한 하지 않고 살아가고픈 욕구와 또한 계산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희망이 합쳐져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세상에 누가 주변에서 끝없이 계산하면서 자기 손해를 안 보려고 하는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결국 그 자신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같이 덩달아서 계산해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런 우리의 성향으로 인해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즉 행복하고 이용을 하려고 하지도 않기에 같이 있기에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고 연락을 하기보다는 연락을 주로 받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반면에 이용을 하지도 않지만 되지도 않기에 가끔 주변인들이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끝없는 주변인들의 참견을 받게 되는데 타고난 천성으로 인해서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명백한 생각이 없을 경우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장점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냥 보기엔 인간관계 원활하고 충분히 만족하게 살며 그로 인해서 행복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인간 세상이 그들의 세상처럼 그렇게 마냥 행복하지만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나만 행복하다고 해서 이 세상이 행복한 것은 아니고 또한 우리의 권리인 행복하게 사는 것에는 잠재적으로 우리 전체가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가 숨겨져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이 어렵게 풀렸는데, 아무튼 쉽게 정리하면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 이외의 타인의 삶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즉 이것은 이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각종 문제들과 현안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또한 그럼으로써 더욱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맞지만 만약 자신이 속한 사회가 무엇인가 잠재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또한 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책무가 맞다.


이것은 단지 어떤 의무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이 땅 위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자신도 모르게 받는 수 많은 편리함 뒤에 우리가 인식 못하는 수 많은 문제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슬픈 사실이 바로 현실이란 것 때문에 그렇다.


가까운 대형 마트를 이용할 때 싸고 편리하게 각종 제품을 살 수 있다면, 그 안에는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고 하루 100만원도 벌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슬픔이 있다는 점을 모르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살기 위해서는 또 어떤 젊은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어딘가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의 수 십 개월을 국방의 의무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물론 각 개인은 그 마트의 직원을 볼 때마다 상냥하게 인사하고 가능하면 배려해주는 개인적 친절을 베풀 수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 수준에서 자신의 양심에 대한 책무를 다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들이 한 달을 일하고 손에 쥐는 그 작은 돈이 가진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에 비하면 너무도 커다란 일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마냥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리고 이 옳은 것이란 뜻은 행복하게 사느냐와는 좀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업을 그만두고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고치라고 외치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몰라서 행복하게 사는 철없는 아이들의 정신 세계에서 평생 멈추고 있는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우리 인간은 행복하면 생각을 멈추는 특징을 가진 존재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의 모든 생각의 시작은 바로 그 자신에게 닥친 불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생각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서 그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그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되묻는다. 너는 너의 행복이나 신경 쓰지 왜 남의 일에 그리 관심을 갖냐고 묻는 것이다.


이 말을 잘 되새겨 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이들은 생각보다 정말로 많이 냉정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은 말 그대로 자신과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어떤 종류의 감정도 못 느낀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단지 이런 성향이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장점이 매우 커서 잘 들어나지 않을 뿐, 이들의 이런 특징은 어떤 의미에서 생각보다 냉혈한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이들 계층들이 스스로 잘 알지 못하고 주변에서도 잘 모르는 숨겨진 비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타고난 능력이 나을수록 더 강해지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경제력이 있을수록 더 행복을 느끼는 특징 때문에 그렇다. 원래도 행복하게 사는 성격인데 거기에 대해서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면 하고픈 일이나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해져서 더욱 더 주변에 관심이 없어진다. 심한 경우 어떤 문제가 있는 부부간에도 무관심한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땐 당사자는 그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배우자에게 철저한 무관심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여기에 더해서 성격적으로 뭔가 깊이 빠져서 즐기는 특징이 있다면 이젠 거의 자신과 주변의 약간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주변에 무관심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즉 충분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빠져서 살면서 경제적으로도 걱정이 없다면 누가 과연 다른 사람들의 일과 자신이 속한 세상에 관심을 가지려 하겠는가?


결국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100점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어 서로 계약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관점에서 보면 거의 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아서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존재들과 타인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을 보이기에 전체를 보면 50점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남의 것을 뺏으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세상을 유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인간의 이상적 삶에 가까운 이 계층에 속한 사람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이 계층에 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한다. 그래서 타고난 성격으로 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배부른 사자가 되어서 충분히 만족된 욕망을 통해서 점잖고 행복하고 여유 있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매우 오랫동안 배부른 사자가 되어 살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만족감이 충족되면서 꽤나 원래 그런 사람들을 닮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 냉정하게 말하면 좋은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살고 싶다면 욕망을 부족하게 채우고 사는 이들보다는 좀 풍족하게 채우면서 살아가는 이들과 사귀는 것이 좋다. 그리고 보통 여기에 속할 수 있는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이 거의 필수적이다.


또한 누구도 삶에 대한 정답을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이 가진 단점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도 꽤나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단지 조금만 이들이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여 마치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인 냥 착각하지 않고 자신과는 다른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것 같기도 하다. 그 점이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