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인간 분류 - 1편. 이용당하는 사람들

아이루다 2014. 7. 10. 07:29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가 흔히 쓰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각종 기준에 따른 분류를 하여 개별적으로 분석을 하는 방식이다. 이런 형태의 방법론은 우리 인간이 가진 꽤나 고차원적인 두뇌 능력을 이용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분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각 분류가 된 단위 별로 어떠한 의미 있는 패턴을 인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패턴 인식 능력은 인간이 현재의 문명을 일으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패턴별로 나누어서 분류하는 방법을 쓰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시도된 인간에 대한 이해 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정말로 거의 무한에 가까운 기준들이 있어 왔다. 체중, 키, 국적, 나이, 외모, 식성 등등 물리적인 차이도 있고 성격, 취향, 취미, 신념 등등의 정신적인 기준도 있으며 재산, 직업, 자녀 수, 사는 곳 등등의 환경적인 기준도 있을 수 있다.


오늘은 이 많은 분류 중에서 꽤나 고전적이고 흔한 기준점인 성격과 성향에 따른 분류를 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의 성격과 성향에 따른 분류는 그 패턴이 너무 방대하기에 이것을 진짜로 어떤 제대로 된 분류법으로 구분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솔직히 이것은 나 자신의 능력의 범주도 벗어나고 또한 그렇게 분류된 결과를 보는 것도 의미가 없다.


기존의 인간에 대한 분류법 중 혈액형을 이용하는 사이비 과학도 꽤나 유행으로 했었는데, 오늘은 그 정도까지로 근거 없고 단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단순화 시켜서 분류를 해 볼 생각이다.

 

글을 진행하기에 앞서 좀 더 명확한 분류를 위해서 성향과 성격적 기준에 각자 타고난 능력과 도덕성을 더해 판단 기준점을 삼기로 하겠다. 이것의 이유는 바로 이 조합이 되어야만 숨겨진 사람들의 근본적인 특징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서 언급한 능력이란 말의 의미는 지적, 육체적 능력과 키나 얼굴과 같은 외모, 부모의 재산, 성격, 직관력, 이해력, 현란한 말솜씨와 같은 인간이 능력화 시킬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글은 아무래도 한 페이지로는 마무리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몇 페이지나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분간 연재를 할 생각이다.


여기까지 간단히 전체적인 설명을 마쳤고 이제 실제적인 글로 들어가보자.

 

결론적인 최종 분류는 아니지만 글의 진행을 돕기 위해 가장 간단한 형태로 사람을 분류해 보겠다. 분류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타인에게 잘 이용되는 사람들.

둘째, 타인을 잘 이용하지도 또한 이용도 잘 안 되는 사람들.

셋째, 타인을 잘 이용해서 사는 사람들.


순서상으로 오늘 이 글에서는 첫 번째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 써보겠다.


우선 글의 진행에 앞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이용된다는 뜻이 무엇일까? 혹은 반대로 남을 잘 이용한다는 뜻은 어떤 의미일까? 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것을 설명하자면, 사람을 잘 이용한다는 의미는 단순하게 말해서 그 자신의 이득을 올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보통 움직여지는 이들의 이득보다는 움직이고 있는 주체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선한 의도로 사람을 움직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이런 부분은 좀 한쪽에 치워두자. 이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범용적인 선함까지 고려하면 너무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용이란 단어도 선택했다. 이용이라고 하면 일단 우선 그리 선한 의도라고는 판단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분류로 되돌아가서 타인에게 잘 이용된다는 것은 바로 이득의 반대인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니 첫 번째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득보다는 손해를 주로 입는 사람들이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살면서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많이 입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계층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은 분명히 그 본인의 의지는 아니란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의도하지 않은 손해를 입고 살아가게 되었을까?


이것은 단순하게 능력에 대한 문제로 볼 수 있다. 누구나 이득을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경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능력 부족으로 인해 경쟁에서 져서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렇다면 손해를 본 사람들은 과연 이 손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 즉 남들보다 부족한 계산 능력은 또 다른 의미의 피해를 입힌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입은 손해 조차도 계산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원래 그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해서 눈감고 뺏기는 일이 빈번하다. 물론 손에 쥔 100원짜리를 누가 뺏어가면 이것은 직접적인 것이라서 누구나 명확히 인식하지만 원래 만원이면 살 수 있는 어떤 제품을 오 만원에 사면서도 왜 이 제품이 오 만원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다섯 배의 손해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손해에 대한 경험을 받아들이는 성격에 따라서 이제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총 세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직접적인 손해를 입어서 손해에 대한 인지를 명확하게 한 사람들이다. 어떤 경로로 사기를 당했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합법을 가장한 강탈을 당한 사람들일 경우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매우 강한 분노를 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누군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불안함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 방어적인 태도는 또 다른 손해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국 다른 이들과의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타인의 의도에 대해 너무 의심을 심하게 하게 되면 그 어떤 것도 같이 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결국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결국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이해해야 하기에 여우의 신 포도처럼 늘 어떤 것에 대한 단점만을 지적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즉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두 번째는 직접적으로는 손해를 입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탓에 뭔가 손해를 봤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만 매우 심하게 화를 내는 부류가 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보통 매우 심한 팔랑귀가 되기 쉬운데, 그것은 누군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말해주거나 왜 병신처럼 당하냐고 말하면 그것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에 상당히 쉽게 설득이 된다.


이것이 바로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며 바로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 1000원짜리를 1200원 샀다는 것을 안 순간 매우 크게 분노하지만 그 제품이 원래 100원짜리라는 것은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또한 그래서 결국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의 주된 먹이 감이 되고 만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작은 손해엔 민감하고 큰 손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런 원리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업들이 무척 많이 쓰는 마케팅 수법이다. 대형 마트에서 이용하는 미끼 상품이나 사은품, 포인트 등이 모두 이것에 관련된 기법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에 속한 사람들은 어렴풋이 자신이 손해를 많이 입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받아드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써 타고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면 그냥 받아드릴 수 있는 아량을 타고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 첫 번째나 두 번째로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경쟁에 진 후 그냥 받아들이는 모습은 절대로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다. 그래서 그 당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입고 그것으로 인해 자존감이 줄어든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단순하게 기계처럼 판단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에 이렇게 줄어든 자존감을 어떤 식으로든 복구하려는 노력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채 벌어진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다. 쉽게 말해서 경쟁에서 진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위로가 필요한 것인데, 이 위로는 자신을 이긴 상대가 거대한 거인이라든가 절대로 넘볼 수 없는 강한 존재라고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다. 그래야 자신이 진 이유가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발전해서 자신을 이긴 존재들을 숭배하고 존경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 역시도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이용하는 자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 이들은 과거 조선시대엔 주인의 뜻에 따라 죽고 사는 노비였으며 지금 현대 사회에 와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을 경제적인 입장에서 보면, 마냥 이용 당해서 못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돈을 벌 수 있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고 어떤 능력들은 매우 특별한 분야에서 크게 성공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해서 도덕적 판단기준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명제만 가지고 세상을 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엔 강도나 도둑질과 같은 범법적인 일부터 시작해서 각종 범죄에 가까운 일을 하여 돈을 벌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큰 부자가 되기도 한다.


요즘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한데 실제로 폭력을 쓰는 아이들이 이런 길을 가기가 쉽다. 즉 깡패나 조폭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계층에 속하면서 도덕적 기준점이 거의 바닥인 사람들이고 보면 된다. 그것을 의리나 혹은 사나이다움 등으로 영화 등에서 매우 심각한 왜곡을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냉정하게 말해서 인간 사회에서 정당한 경쟁을 통해서는 이길 가능성이 낮은 사람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능력이 좋지는 않으나 도덕적인 기준점이 잘 잡힌 사람들은 잘살지는 못해도 보통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운이 좋아야 그 정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조금이라도 운이 따라 주지 못하면 언제라도 말 그대로 막장 인생이 될 수도 있다.


가게를 내고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터를 잡았더니 상가 주인이 강제로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서 같은 장사를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은 종류만 다를 뿐 이 세상 각처에서 늘 벌어지는 현상이다. 사기꾼들은 자신보다 계산 능력이 떨어지는 대상을 물색하여 달콤한 감언이설로 욕망을 자극 시킨 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집어 삼키려고 늘 틈을 노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타고난 능력 중 특별히 두뇌 능력,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득 계산 능력에 부족함을 들어내는 이 계층에 속한 이들은 물론 다른 여러 가지 능력과 돈을 벌기 위한 욕망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개인적 균형에 따라서 각자 가질 만큼의 돈을 벌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끝없이 자신들을 자극하고 이용하고 욕망을 부채질하는 이들에게 끝없는 손해를 입고 만다.


살 필요가 없는 것들을 속아서 사고, 사야 할 것도 괜히 더 비싸게 사며, 누군가 비리를 통해 거대한 돈을 벌어간 후 남은 언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는 이 땅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주는 작고 큰 손해를 끝없이 감당해야 한다.


이런 판단의 배경엔 배가 침몰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강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모두 다른 사건으로만 인식하는, 결국엔 생각과 판다 능력의 부족이란 슬픈 진실이 숨겨져 있다. 즉 이들은 그 당시에 상황만을 가지고 모두 개별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동작하기 쉽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들은 자신을 끝없이 수탈해가는 사람들을 인식하더라고 언젠가 자신들 역시도 그 위치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거나 혹은 자신을 이긴 존재에 대한 우상화를 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까지 보내 준다.


이 슬픈 현상은 현재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다. 약자가 강자를 걱정해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유로 인해서 돈을 제법 벌어서 스스로 나름 중산층이라고 자부하면서 사는 이들도 이 계층에 속한 세가지 부류 중 하나에 해당되는 이들이 제법 된다. 특히 앞에서 말했 듯 두 번째에 속한 이들이 정말로 많은데, 문제는 보통 그 자신들은 그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인식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자신이 꽤나 똑똑한 삶을 살아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적어도 많은 이득은 못 취했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계산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능력 덕분에 생긴 착각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 개개인이 매년 불합리하게 손해를 보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것은 물론 대단히 어려운 계산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를 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경제적 성공' 만을 모든 가치 기준점으로 보는 삶의 태도가 매우 일반화된 까닭에 일단 호주머니와 통장에 자신이 합당하게 생각하는 돈이 들어만 있으면 거기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이 점이 바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멀어지게 하고 자신과 자신이 아는 지인만을 하나의 세상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도록 해준다.


여기까지 오늘의 연재 분은 여기에서 마무리 한다. 다음 글은 바로 두 번째, 타인을 잘 이용하지도 또한 이용도 잘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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