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의식에 대한 생각

아이루다 2014. 6. 25. 08:59

 

예전부터 꾸준히 들어왔던, 다소 난해하지만 그럴 법한 이론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단지 무의식 세계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길을 가다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결정할 때 우린 분명히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그것을 결정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 사고와 결정의 주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정의하는 의식이 주체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 그 존재 조차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저런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우리의 의식은 단지 무의식이 결정한 것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역할만 한다고 한다. 즉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고 하는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최근 한 연구 결과에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실험을 하나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뇌의 활성화 영역을 감지할 수 있는 장비를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착용시키고 각종 질문을 통해 뇌의 활성화 상태를 실제 그 실험자 스스로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비교해보는 것이었다.

 

*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했는지 마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을 할 자유의지란 것이 없다는 식으로 제목을 뽑았다. 하지만 무의식이 결정하든 아니면 의식이 하든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라는 점에서는 바뀌는 것이 없다. 그리고 무의식 역시도 이미 사전에 입력된 정보가 없다면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정보는 모두 우리들 자신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실험은 과거에도 몇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결과 모두 우리 인간은 우리가 결정했다고 믿는 시간보다 적어도 30초에서 1분 전에 이미 그것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긴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범위에서 우리의 뇌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한참 멀었기 때문에 이것은 단지 겉모습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은 개인별로 생각보다 쉽게 경험을 한다. 그것은 정말로 단지 걷기만 해도 경험 할 수 있다.

 

우리가 걷는 동작을 할 때를 생각해보자. 어딘가 익숙하게 아는 곳을 갈 때 우리는 실제로 같이 걷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거나 요즘처럼 스마트 폰을 바라보면서 간다. 하지만 이 때 걷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할 경우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익숙하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지식에 수 많은 정보가 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처음 가는 길을 가야 할 때 우리는 좀처럼 딴 짓을 하면서 길을 가지 못한다. 그 땐 계속 주변을 살펴야 하고 자신이 이정표로 삼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특별한 건물, 간판 등을 유심히 보면서 지나간다. 이때는 계속 정보를 뇌에 기록하면서 이미 기록된 작은 정보들과 계속 비교하고 검증한 후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이 경우도 최종 결정은 무의식이 내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의식은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분류하여 저장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무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한 번 지나온 길은 점차 반복될수록 익숙해지며 언젠가는 다시 대화를 나누고 생각에 잠기고 스마트 폰을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게 된다.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환경은 모두 공통적으로 정보의 부재를 의미한다. 정보가 부족하니 어디에 있는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과연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인지, 이런 환경에 있어도 문제가 없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상대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어내려고 애쓴다.

 

즉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풀이하면 정보를 획득하고 저장하며 또 새롭게 습득된 정보와 기존 정보를 비교나 검증을 하여 저장된 정보를 고치거나 혹은 확정시키며, 이렇게 쌓은 정보를 기반으로 우리의 무의식이 결정을 하고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남에게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실제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세계의 지배를 받는 것이 훨씬 상식적인 판단이다. 우리의 의식은 기껏해야 10개 정도의 사고 흐름이 최대 숫자일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수천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여 그것으로 최종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 하나가 나온다.

 

우리는 보통 의식으로 알려진 존재를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 누가 잠을 자면서 꿈을 꾸거나 잠꼬대를 하는 자신을 자신의 진정한 자아라고 믿겠는가? 우리는 당연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며 그것을 통해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를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데 상당히 익숙하다.

 

그런데 우리의 판단이 실제로는 우리가 전혀 감지를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온다면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다소 웃기는 질문일수도 있다.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그것을 분리하는 것조차도 우리 인간의 지식적 한계일 수 있는데 그것을 분리하여 나는 의식이고 무의식은 잘 모른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지식의 한계로 인해서 더 이상의 가정은 힘들다. 그러니까 현재까지 쌓인 지식을 기반으로 의식적으로 믿지만 무의식의 판단을 내려보기로 하자.

 

우리 인간은 흔히 각자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영역이 다 다르게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우연히 잘 맞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 명의 사람을 모아서 임의로 사람들을 섞었을 때 내 옆에 나와 같은 관심 영역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는 좀처럼 힘들다. 그나마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관심사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 관심이란 말이 가진 숨겨진 의미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쌓게 되는 지식의 편식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모두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요리에 관심 있는 이들은 식재료나 조미료에 대한 정보를 주로 습득하고 자동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각종 차량 제조사의 앰블럼이나 새로 나온 차에 대해 정보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세상은 우리가 너무도 많은 정보가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는 편식을 해야만 한다. 물론 매우 똑똑한 머리를 가진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방면으로 정보를 쌓을 수 있지만 그들 역시도 한계점은 존재한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가 쌓을 수 있는 정보는 결국 한정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편중되어 쌓인 지식은 이젠 다시 무의식 세계에서 판단의 근거로 쓰인다. 시장에 가서 본 생선은 어떤 이에겐 좋은 식재료로 보이지만 또 다른 이에겐 차에 실었다간 차 안에 냄새가 배거나 차 시트를 더럽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다소 혐오스러운 대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편중된 정보로 인해서 우리의 사고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큰 관점에서 보면 무의식이 의식을 통해 설명되지만 그 무의식은 정보의 종류로 인해 조정될 수 있기에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가 내리는 모든 판단의 배경에는 바로 우리가 받아들인 정보가 있고, 그 정보는 바로 우리의 선호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선호도, 즉 관심이 있는 정보는 과연 어떻게 결정이 될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정보에 왜 관심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왜 요리에 관심을 갖고 차에 관심을 가지며 악기나 자전거 등에 관심을 갖게 되는가?

 

이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행복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잘하는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물론 순수하게 지식욕구가 있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머리의 한계가 생기면 웬만해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어떤 대상들을 잘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미리 해서 더 잘 알거나 혹은 같이 시작해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하는 것에 흥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일반적 성향은 바로 그 밑에 우리의 존재감과 삶의 의미에 대한 욕구가 숨겨져 있다.

 

단순하게 표현해서 잘하는 것을 잘해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존재감을 확인 받으면서 그로 인해 자존감이 높아질 때 우리는 행복해 한다. 그래서 우린 모두 그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려고 하고 그로 인해 정보 취득의 방향성이 결정되고 결국 이것은 우리의 다음 판단을 결정하는 지식의 요소로써 사용된다.

 

여기에서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한 것은 거의 타고난 성향이다. 즉 유전적 요인으로 우리는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한 결정된 사실을 통보 받는다. 그 다음 태어난 환경에 의해서 우리는 다시 두 번째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성격과 가정 환경이다. 부모로부터 끈질긴 인내력을 배운 이들은 설령 자신이 잘 못하는 분야라고 해도 꾸준히 해서 나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쉽게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결국 이런 연결 고리를 모두 이으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

 

우리는 타고난 성향과 육체적 특징을 배경으로 삼아 자신이 자란 환경에 의해서 선호하는 대상들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습득하는 정보의 방향성이 생겨나고 그렇게 쌓인 정보를 통해 판단된 결과로써 우리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회전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반복적으로 회전되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판단은 당연히 더 많은 정보가 더 편중되어 쌓일수록 더욱 강력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때 우리는 이것을 신념이나 믿음과 같은 좋은 말로 포장하긴 한다.

 

결국 우리가 어떤 결정에 대해 망설임이 없다는 뜻은 그만큼 정보가 획일화되어서 접해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좋을 수도 있지만 좋지 않을 가능성도 높게 된다. 실제로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면 처음 우리가 어떤 계기로 접한 대상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가치를 느껴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결국 그것에 관련된 편중된 정보를 반복적으로 습득함으로써 우리의 무의식이 내리는 판단 근거를 매우 편파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그럴 듯 하게 설명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은 그 동안 살아오면서 쌓은 정보들과 다른 이들의 이론, 말, 행동 등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 시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실제로 의식은 무의식의 대변인일 뿐이니 당연히 의식을 통해 변호되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그리 솔직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와 실제 자아의 차이이며 타인들에게 말하는 이유와 그 자신이 정말로 가지고 있는 이유의 차이가 되며 또한 그 자신조차도 착각에 빠져서 그 본질적 판단 기준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부조리의 원인될 수도 있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그 자신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서 꽤나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설령 꽤나 자신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나 오랜 시간을 사유하면서 보낸 철학자들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단지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이며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다는 것과 그 본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이 글은 처음 소개했던 무의식과 의식의 역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단지 이론이 아닌 사실로 가정한 후 쓴 글이다. 따라서 그 이론이 무의미해진다면 이 글 역시도 어느 정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 단순하고 너무도 뻔한 사실을 글을 다 쓴 후 나 자신이 인식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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