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공감능력이 가진 의미

아이루다 2014. 3. 5. 13:16

 

꽤나 힘들게 오랜 시간을 걸어 산 정상에 오른 후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설경에 온통 마음을 뺏기고 만다. 높은 고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는 낮은 땅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말 그대로 칼 바람인데도 불구하고 파란 하늘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하얀 설경 그리고 듬성듬성 머리를 내밀고 해를 맞이하고 있는 나무들의 풍경은 이곳이 완전히 다른 세계인 듯 느껴지게 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이곳을 꼭 담아두고 싶어서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한 컷, 한 컷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받은 그 감동의 느낌과 눈으로 보이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그냥 지금의 감동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에게 '좋다' 혹은 '눈물이 날 것 같아' 라고 만 말해도 '' 냐고 묻지 않고 조용히 나를 다독이면서 공감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혹은 그런 사람이 있어서 너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행운아라고 부를 만 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채팅 도구들과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블로그나 혹은 페이스 북과 같이 원칙적으로는 자신만의 공간이지만 다른 이들과 아주 쉽게 어울림이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툴들을 쓰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아마도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런 도구들을 이용해 무척 쉽게 내가 아닌 다른 타인들과 교류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우린 오랫동안 조금 더 불편하지만 같은 용도를 가진 것들을 이용해왔다.

 

우리 인간은 이런 발전된 도구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도 하고 타인의 정보를 얻어 듣기도 한다. 또한 나의 감정이나 상태 등을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여 누군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방문할 이에게 알리기도 한다. 그것은 행복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며 즐거움일 수도 있다. 자신이 실제로 방문한 어떤 공간이나 작게 경험한 일부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까지 모두 자신의 머리 속에만 두지 않고 사진과 글, 만화, 그림동영상 등을 통해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왜 이런 것들을 그런 공간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이들과 열심히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정확히 적을 수는 없어도 이것은 단지 이런 편한 도구가 생겼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고 있다는 것은 아니란 점은 명확하다. 과거 우리는 만나서 출력된 사진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요즘은 IT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것이 언제 어디서건 가능하다는 편리함이 생긴 것뿐이다. 물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될 수 있는 답은 바로 모든 인간의 교류는 공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요리법, 차량 정비, 법률 상식 등과 같은 거의 그 목적이 정보 전달 자체에 있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누구도 그 글을 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라고 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그런 글을 쓰겠는가? 결국 이런 정보성 글 역시도 자신이 가진 지식 공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다.

 

뭐 이것은 쉽게 보면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이다. 인간이 문명 속에서 만들어 낸 그 모든 것들, 즉 영화, 소설, 연극, 음악, 미술 등등 그 어느 것도 인간의 공감을 끌어내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장르가 없다는 점이 바로 그 답을 내는 힌트가 된다. 그 만큼 공감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목적이고 이 목적이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나 그리고 우리들의 행복이 된다.

 

우리 그래서 평소에도 잘 친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연히 자신과 비슷한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정말로 급격하게 호감이 높아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니 스스로는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그전보다는 훨씬 친밀한 관계로 발전이 가능하다. 물론 이 관계가 늘 남녀 사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감을 추구하는 우리의 본능이 삶에 미치는 영향 중 하나이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땐 맛난 음식을 매우 좋아하는 이들과 공감하고, 멋진 풍광을 보았을 땐 자연을 좋아하는 이들과 공감하고, 힘든 일이 있었을 땐 좋은 이야기와 치유를 말하는 사람들과 공감한다. 아이를 키울 땐 다른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과 공감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봤을 땐 같은 감동을 느낀 사람들과 공감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공감을 원할 때 그것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상대를 고르는 과정인데, 결국 상대가 있다고 해도 깊이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린 교류를 멈추게 된다. 실제로 그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이 느낀 깊은 감정에 대해 상대에게 털어 놓을 때 그것을 대충 듣는 듯한 느낌이 들면 대화를 멈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들로 이야기를 바꾸거나 입을 다물게 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어쩌면 이런 과정의 무한 반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린 끝없이 공감대를 만들고자 시도하지만 많은 상처를 입거나 혹은 무뎌지기도 한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고 무뎌진 사람들은 자신의 공감보다는 타인에게 공감해주는 것이 이득이란 것을 알고 연기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기 보다는 무엇을 통해 남들과 쉽게 공감하는지를 찾는다.

 

그 덕분에 이 세상엔 쉬운 공감 주제는 꽤나 많이 생겼다. 드라마, 흥미 있는 제품, , 정치, 주식, 부동산, 육아, 교육음식, 여행, 최근 본 영화, 연예인 사생활, 주변 인들에게 일어난 이야기, 어디선가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 등등 이런 우리가 일상 속에서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가 바로 그런 종류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자신의 삶에서 거의 100%를 차지 하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그리고 이럴 경우 그 주제들에 흥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주변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쉽게 얻었고 넓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의 깊이가 얕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질보다 양으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현상은 더 많은 사람을 사귀어야 하고 더 많은 공감 주제들을 나열해야 하는 문제로 발전한다.

 

이것이 심한 사람일 경우 일명 '관심 병' 에 걸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금 심각한 상태이다. 각자 사람에게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 주어지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그 많은 이들 중에서 과연 누구와 공감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는 물론 그것을 머리로 계산해서 정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날 컨디션과 상대가 요청한 공감거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대한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공감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이 그날에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의 무리한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관심 병은 일종의 공감을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한 이들이 보여주는 불안 증세 중 하나이다.

 

아무튼 공감은 이렇듯 우리의 삶에서 정말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공감에 이렇게 목을 메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현대 인류는 지구 상의 그 모든 땅을 거의 다 탐험했다. 그래서 이젠 진정한 의미의 오지는 없다고 하는데, 만약 아직도 발견이 안된 땅이 남아 있고 계속 발견이 안 된다면 그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꽤나 고전적이고 골치 아픈 생각을 해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한다'의 의미에 대해서부터 고민하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앞에서 말했던 멋진 설경을 가진 산에 오른 사람이 단 한 사람 뿐이며 그가 느낀 감정과 그가 담은 사진에 대해서 누구와도  말할 수 없다면 실제로 그 설경은 존재하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모르는 공간과 단 한 사람만이 아는 공간의 차이가 있지만 결국 누구와도 그것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으니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판단은 다르게 내려질 수 있다.

 

설령 그 사람이 그것에 대한 기억을 하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산하는 길에 사고를 당해 혼자 죽었다면 그 후로도 그 산의 설경은 존재한다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좀 더 극적으로 말해 아무런 문제 없이 그가 집에 와서 타인들과 그 산의 설경에 대해 말했지만 그 후로 그 산엔 다시 눈이 오질 않아서 아무도 그 후로는 그 산의 설경을 볼 수 없다면 누군가 봤다는 설경은 오직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마음 속에 담았거나 혹은 매우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은, 물론 나 자신의 마음 속에 온전히 존재하지만 결국 나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되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많이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평생을 걸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죽음과 동시에 모두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라면 살아서 추구한 그 가치들은 도대체 그 온 삶을 통해 추구할 이유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의 아이가 있으면 부모는 오늘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게는 자신의 아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류 전체로도 확대가 가능하다만약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인류가 자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면 그래서 우리는 후세대를 기대 할 수 없다면 오늘도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이 모든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열정적으로 지식을 쌓고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이것은 우린 결국 우리 인류가 가진 그 모든 가치가 미래에 전달 될 수 있다는 믿음과 가능성이 있기에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류와 공감은 이것을 위한 아주 중요한 도구이며 개념이다. 어떤 가치를 느끼고 그것을 누군가에 말하여 어떤 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가치를 보존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교류를 통한 공감을 그토록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가치도 해당이 된다. 내가 죽는 순간 나의 가치는 0이 되지만 타인과 공감했던 것들은 남아서 그들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많을수록 더 가능성이 높아진다. 만약 인류 전체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면 역사책을 통해 거의 인류의 흥망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공감의 가치를 알기에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과 이것을 함께 하고자 하려 애쓴다. 하지만 실제로 공감을 원하는 상대의 가장 필수 조건은 바로 넓이가 아닌 깊이라는 점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공감을 느끼는 요소들이 모두 달라서 결국 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들을 각각 다른 이들과 다른 형태의 공감을 느끼기 위해 그렇게 다수의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것이 안정적이기에 선호한다. 즉 대상자가 많을수록 적어도 한 명쯤의 공감 자를 구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것은 분산을 의미한다. 누군가 크게 넓이를 넓혀버리면 그로 인해 공감의 깊이는 얕아지고 넓어지는데 그와 교류를 하던 다른 이들 역시도 그렇게 얇아진 공감이 깊이를 다른 존재들을 통해 채워야 하기 때문에 결국엔 그들 역시도 넓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수학적 계산을 해봐도 깊이가 깊고 넓이가 좁은 것과 깊이가 얕고 넓이가 넓은 것의 곱은 동일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공감으로서 느끼는 행복은 그 총량은 어떤 방법을 써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물론 넓이를 넓히면 장점이 있다. 분산은 언제나 안정성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오늘 내가 교감을 나누던 사람이 갑자기 바빠져도 다른 대체할 사람이 늘 존재한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교감을 하고 공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 바로 가치의 보존인데 문제는 얕게 맺어진 공감 고리는 쉽게 잊혀지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사람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그리 깊은 공감을 하지 못한 것은 정말로 그 수명이 1년도 안될 것이다.

 

우리는 가능성을 위해 바쁘게 교류하고 공감하고 살아가지만 결국 다시 그것들은 우리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원론적인 이유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결국엔 언젠가 허전함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넓은 교류는 필요성을 충족시키지만 목적성을 충족시키지 못 할 가능성이 크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넓고 잦은 교류는 가치 보존이라는 목적에 우리가 다다르게 할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행복하기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듯 우리는 자신이 감당하기 가능한 수준으로 최대한의 인간 관계를 맺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행동은 돈과 가치 그 두가지 목적이 동시에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관계 역시도 돈을 목적으로 하는 관계와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관계로 나뉘며 둘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과 더욱 더 많이 어울릴수록 우린 가치를 가치 있게 만드는 행복과 그 가치를 미래에 보존시킬 가능성을 높이게 되며 또한 자신이 믿는 가치가 정말로 자신 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돈이 있다고 다 행복할 수 없듯 페이스북에 끝없이 사진을 올리고 하루에도 수백명의 방문객과 방문을 하는 사람처럼 잦은 교류와 공감을 한다고 해도 이것이 가치 보존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돈이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잦은 교류의 문제점인 관계의 가벼움으로 인해서 가치 보존 기간을 급격히 줄여버리는 역효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돈 = 행복 이니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인간 관계 = 가치 보존을 통한 행복 이란 공식이 만들어져서 일단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 즉 돈을 많이 벌고 있는 자신이나 수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맺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미래의 행복 가능성과 미래의 가치 보존의 가능성을 예상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이건 완전한 착각이다. 

 

실제로 사람은 살아가기에 어느 정도의 돈과 사람간의 관계만 유지해도 평생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특히 사람간의 관계에서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만 있거나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 있는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관계를 맺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깊이가 충분히 깊어지면 넓이란 거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우린 진정한 의미의 가치 보존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우린 살아 생전에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을 위해 살아가고 또한 그렇게 느낀 가치가 그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영속적으로 남아 이 세상 속에서 있길 바라게 된다. 실제로 그의 죽음 후 얼마간의 시간이 있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죽을 당시에만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다른 관점으로 이것을 바라보면, 우리의 공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곤란스러운 점, 즉 너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되는지를 묻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각자가 최선의 답을 내는 과정과 그 답이 적어도 나만 옳다고 우기는 답이 아니라 타인의 지지를 받길 바라며 또한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정답으로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이 죽을 때가 심장이 멎을 때가 아닌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온 의사가 한 말처럼 우린 어쩌면 생물학적인 생존을 가장 우선시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자신과 교감을 나누고 공감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없어져서 결국 아무도 그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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