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사랑과 집착의 경계

아이루다 2014. 2. 27. 09:16

조그만 새장으로는 새를 사랑 할 수 없다.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당신 안에서 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점점 더 점점 더 넓어지도록 하라

 

이정하."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랑을 사랑하고 있다면.." 中

 

개인적으로 시를 그리 즐겨 읽는 감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 쓰려고 하는 주제에 제법 어울려 보여서 어디선가 빌려왔다.

 

사랑, 특히 남녀간의 사랑인 경우 그것에 대한 알려진 세상 속 이야기는 너무도 많으며 각 개인마다 역시 정말로 구구절절 하게 그리고 가슴 찢어지게 아프고 때로는 시퍼런 불꽃 같은 분노를 일으키는 배신의 사연들을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직도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도 언젠간 불꽃처럼 타오를 그런 순간이 한 번쯤은 오게 되리라 희망한다.

 

사랑이란 이 묘한 단어의 매우 특별함은 나이를 많이 먹었든 혹은 젊은 청춘이든 상관 없이 그것에 빠지게 되면 정말로 지독할 만큼 커다란 감정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중년의 사랑과 젊은이의 사랑은 확실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혈기 왕성하고 몸이 한창 때인 젊은이들은 진정한 불꽃같은 사랑을 하는 반면,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중년의 사랑은 이것보다는 좀 더 숯불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사랑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으며, 그 성공의 기준으로 판별되는 결혼 후, 두 사람의 사랑은 보통 변하게 된다. 물론 사랑의 이런 변화는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양을 이용해 충분히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감정은 따로 놀게 되어 있으며 우리는 변한 사랑 앞에 놓이게 되면 많은 혼란을 느낀다.

 

이렇듯 사랑은 변하거나 실패 할 확률이 있는 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깊은 감정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늘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언제 배신하게 될지, 혹은 지금 배신하고 있을지 그리고 그 상대를 묶어 두는 내 자신의 매력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시시때때 인식한다.

 

물론 심리적으로 매우 안정된 이들은 이런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통해 상처를 입었거나 혹은 어린 시절 정서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게 큰 사람들일 경우 이런 의심과 두려움은 늘 그들의 마음 속에서 당사자를 괴롭히고 있다.

 

남녀간의 - 혹은 요즘 같아서 남남이나 여여도 통용되는 분위기이니 그들까지 포함해서 - 사랑이란 이름으로 묶여진 그 인간 관계의 가장 큰 특이성은 바로 독점이다. 우리는 유일하게 사랑을 통해 관계의 독점을 경험한다. 그것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같은 느슨하고 안정적인 것이 아닌 정말로 내 온 몸이 원하는 상대를 향한 독점이 허용된다.

 

실제로 우린 청소년 시절에 친구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는 독점이 불가능하고 또한 그것을 했을 경우 심각한 비난이나 혹은 정신이상자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에 대한 독점을 시도했다간 거의 대부분 심각한 심리적 상처와 주변의 따가운 시선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상대는 이것이 허용된다. 그리고 그 독점은 그 누구나 지지하는 독점이면서 그로 인해 사랑에 대한 의무는 꽤나 관습적으로 굳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상대에 대한 독점권을 타인이 침범 하거나 혹은 그것을 상대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과도한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살인과 같은 물리적 해코지 역시도 일어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물리적 행동이 법적으로도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독점은 우리가 경험 가능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유일하며 그것으로 인해 우린 나 자신 이외에 자신과 거의 비슷한 가치를 가진 타인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 여기는 또 다른 존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경험이면서 그럼으로써 상대와 있을 때 깊은 교감과 함께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많이 우리를 매우 행복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랑이기에 단점 또한 명확히 존재한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두려움에 대한 것인데 거기에 독점에 대한 권리가 부여되면서 이젠 그 단점이 제어 불가능한 영역으로 가버린다. 즉 두려움이 있는 사랑은 이제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렇지만 언뜻 보기엔 사랑과 집착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독점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인데 과연 도대체 어디까지를 독점할 수 있느냐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이것이 사랑이기도 하고 집착으로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온전히 개인별 성격과 가치관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한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상대가 한 시간 마다 전화를 해도 즐겁게 받아 주는 반면, 다른 이들은 하루에 한 번의 전화도 그 빈도수가 잦다고 느낀다.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 전화를 해주는 남자가 있는 반면 거의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않는 남자도 제법 된다.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사랑은 사랑이고 친구는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며 만약 이것이 잘못 조합이 되면 어느 한쪽은 늘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더 외로워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둘의 가치관이 달라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럴 경우 상처 입은 쪽에서 상대의 행동에 대한 비난 강도를 높이고 어떻게 하든 자신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게 하려고 하면서 결국 집착이란 것으로 해석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심각한 갈등을 느끼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집착의 강도는 상대의 삶에 얼만큼 깊숙하게 관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이것 역시도 당하는 사람 성격에 따라 무척 다른 해석이 나오기에 앞에서 말한 전화의 문제도 결국 상대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 이 사랑과 집착의 해석이란 것에서 사회의 평균적 통계치가 나오기가 무척 힘들다.

 

집착에 대한 스트레스는 보통 당하는 쪽에서 많이 받는다. 상대가 자신에게 너무 집착을 하니, 만나면 즐겁고 행복하지만 떨어져 있을 경우 상대의 과도한 참견 때문에 일상적인 삶이 힘든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 초반엔 그 자신도 그것을 어느 정도 즐겼겠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시시각각 변한다. 이것은 단지 느낌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은 호르몬 양을 조절해 버린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이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부정하고 그 자신이 과거의 가진 상처 등을 통해 갖게 된 두려움으로 인해 상대편을 과도하게 조정하려고 들 때 강한 반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두 사람은 이제 만나서 행복하기 보다는 만나서 자주 싸우기만 하는 사이로 변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두 사람의 이별에 대한 작은 움직임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만약 집착에 대한 문제로 인해 두 사람의 갈등이 고조된다면 이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집착을 갖은 당사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상대 역시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가진 그 사람의 집착을 최대한 이해하고 왜 그런 집착을 갖게 되었는지 알려 애쓰고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써야 한다. 즉 불안함과 두려움을 없애고 확신을 줄 수 있는 태도를 보여 줘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기에 과연 그 자신이 그런 노력까지 하면서 그 상대와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기도 하지만 사랑은 실제로 완전한 우연이며 이것에서 매우 운이 좋은 이들이 자신의 사랑을 운명이라고 과도하게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서 결국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또 다른 이성을 찾아 자신에게 원래 잘 맞는 상대를 찾으려 하는 것이 보통의 행동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을 '배신' 한다는 그 자신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 해 줄 친구의 조언이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우린 이런 문제가 생가면 친구에게 가서 상담을 하는데 실제로 그 상담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태이고 친구는 그 자신도 모르게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준다.

 

'그럼, 왜 만나니. 헤어져야겠네' 라고.

 

결국 이런 절차들로 인해서 집착은 헤어짐을 낳는다. 즉 진정으로 그 사랑을 갈구한다고 믿는 사랑과 집착이 온통 뒤섞인 사람의 최후는 바로 이별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정말 심한 집착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떠나 보내느니 차라리 죽이겠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정신병 수준의 집착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꼭 사랑만이 아닌 모든 일에 이런 집착을 보이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경우이며 보통은 사회가 관습적으로 허용하는 범위 선에서 집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집착은 그 자신을 불행하게도 하고 상대를 불행하게 하여 결국 이별을 불러오기에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최대한 줄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글의 제일 앞에 쓴 시 한 문구가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진정하게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자유로움이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상대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최대한으로 내면적 자아의 영역을 넓혀 줘야 한다. 물론 이 말은 매우 관념적인 표현이다. 이것을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상대에 대한 믿음을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혼자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결국 집착의 근본적 문제인 불안함과 두려움이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가진 것이라고 해도 그 혼자는 해결이 힘들며 상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 수준의 상대를 만났을 때 우린 그런 시도조차 할 수 있다. 약간의 집착이나 혹은 상대가 가진 어떤 문제점에 대해서 이해하거나 혹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안하고 그저 또 다른 자신과 맞는 상대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종류의 집착들은 대부분 그 당사자의 집착이 부른 이별로 끝나고 만다.

 

그러니 집착에 대한 해결은 그 본인의 의지로 시작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키를 쥔 당사자는 바로 상대가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엔 이 집착의 정도가 비슷해서 매우 잘 살아가는 연인들도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운명적 상대를 만난 셈이다. 물론 주변에서 보기엔 그 둘의 모습이 좀 눈꼴 시고 심하면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집착은 사랑의 다른 말이 아니다. 집착은 그 집착을 느끼는 당사자가 살아 오면서 받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받은 상처가 만들어 낸 일종의 정신적 불균형 상태이다. 어린 아이시절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심한 경우엔 버림을 받았거나, 청소년 시절 친구의 배신을 경험하거나 성인이 된 후 정말로 사랑한 사람의 양다리나 외도를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상처가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후로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된 사람은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마음을 닫거나 혹은 상대를 끝없이 의심하거나. 설령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일반 인간관계에서는 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이제 완전히 상대를 믿어야만 가능한 사랑에 빠지게 될 때 숨겨져 있던 문제점이 부각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사랑은 상대와 나를 거의 같은 운명 공통체로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에 신뢰가 기반되지 못한 사랑은 실제로 사랑이 아니며 그저 어떤 계약 관계일 뿐인 것이다.

 

결국 상대의 집착을 느꼈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이 집착의 원인이 된 인간에 대한 실망이나 배신에 대해서 심적인 치유를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깊은 신뢰를 보여줘야만 하는 어려운 행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럴 정도로 정신적 깊이를 가진 이들은 조금 드물다.

 

혹시나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여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이것을 가능한 한 빨리 분리하기 바란다. 사랑은 상대와 나 자신간의 감정이고 집착은 그저 나의 과거 경험을 통해 받은 상처가 들어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집착을 구별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상대에게 나를 맞추고 있느냐 혹은 상대가 나에게 맞추게 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된다. 상대를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하고 있다면 이것은 집착이다.

 

많이 들었고 한결같은 이야기지만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변화는 그 상대가 스스로 만들어 내야지 어떤 사회적 통념으로 알려진 변화를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통속적인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여 그것에 미치지 못하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럴 경우라면 그저 남들에게 보이기 좋거나 혹은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는 집착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둘 사이의 사랑은 오직 둘 사이만 공유가 가능하다. 앞에서 말했듯 사랑만이 관계성에서 유일한 독점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독점은 말 그대로 독점이다. 그 누구도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눈과 평가는 말 그대로 제 삼자이면서 절대로 그 당사자들과 같은 입장이 될 수 없다.

 

혹시나 살아가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런 상대에게 어울리는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준이 된 후 상대를 보고 판단해 자신과 그럴만한 사랑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인지 판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수준을 높이면 만나는 사람의 수준이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이미 인격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남은 단점을 보완해주면서 살아가는 일 것이다. 실제로 사랑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일단 그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힘들 때 나에게 기대고 내가 힘들 때도 상대에게 기댈 수 있다. 혼자도 버티고 상대가 기대어 와도 버텨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내력이 필요하다. 초기에 사랑은 불타지만 그 사랑의 완성은 시간이 이루어 낸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낸 사랑은 이젠 어떤 힘든 역경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만들어 내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이 주는 가장 큰 열매인 자신과 거의 동일한 다른 사람을 하나 얻게 된다. 이것을 시적으로 표현하면 나의 반쪽이라고 한다.

 

*** 사족

 

사랑을 흔히 호르몬의 분비에 따른 것이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공동체 생활 속에서 또 하나의 추가적인 행복을 찾아 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호르몬에 의해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그 시작은 호르몬이지만 결국 우린 사회 속에서 살아갈 진정한 동지를 얻음으로써 안정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최고 단계로 올라 설 수 있다.

 

중년이 되어 자신과 함께 해주는 배우자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결국 우린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를 얻음으로써 남은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안정적인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둘 사이의 시간이 오래 될 수록 강해진다.

 

삶을 조금 이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평생을 같이 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아무리 친한 친구도 부모님도 형제들도 못해주는 유일한 배우자만이 해줄 수 있는 가치이다.

 

결혼과 자녀 양육은 선택 사항이 될 수 있지만 평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필수에 가깝다. 적어도 삶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는 것은 둘의 관계가 우선한 후 나타나는 후순위가 되어야 한다. 많은 가정에서 자녀의 가치를 배우자 보다 더 높게 올림으로써 결국엔 그 좋은 부부 관계를 망치는 실수를 흔하게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 외도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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