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아이루다 2014. 6. 22. 10:17

 

사람들이 쓰는 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주고 받는 말, 영화 감독이 만든 영화, 좋은 멜로디를 가진 노래, 교훈을 남기는 옛 이야기, 비록 승자의 입장에서 씌였지만 읽어 보면 재미 있는 역사 이야기들까지 모두 그 내용엔 우리 인간들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추억일수도 있고 추앙일수도 있고 끔찍한 비난일수도 있으며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이런 인간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그 속에 있는 다른 삶을 살았던 존재들에 대해 평가를 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평소 모여서 이야기 나누길 좋아한다. 회식이란 명목으로, 친목이란 명목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모임, 친구와의 약속, 애인과의 데이트, 가족과의 여행 등등 많은 종류의 만남을 통해서 대화를 나눌 시간을 만들며 그 안에서 서로 생각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그 대화 속의 주인공들은 그 대화 참여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 알고 있거나 공통으로 알고 있는 제 삼자일 경우도 많다.

 

또한 이야기의 주제는 정치가 될 수도 있고 사회 이슈일수도 있으며 최근에 일어난 사건일수도 있다. 또한 친인척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고 옆집이나 뒷집 혹은 예전에 같이 살았던 사람들의 근황일수도 있으며 어떨 땐 전혀 모르지만 어디선가 주어 들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보이는 이야기는 그 다양한 모임과 대화 종류에 따라 실로 도대체 분류를 한다는 것이 막연해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말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창작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이 나오는 영화는 당연하고 동물이 주인공이 영화나 애니메이션 역시도 그 모습만 동물일 뿐 현실적 인간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신을 주제로 한 것이라 해도 그들이 일으킨 기적은 바로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에 기적이 된다. 그래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영웅들 이야기 역시도 평범한 인간에 비해서 탁월하기에 바로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한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그 어떤 생각과 그 어떤 새로운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보려고 노력해도 결국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관점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주고 받는 수 많은 대화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린 그 안에서 자신이나 혹은 타인에 대한 평가와 판단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 스스로는 꽤나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객관적이란 말은 절대 불가능한 입장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인간의 입장에서 하듯 모든 생각과 행동은 모두 그 자신의 입장에서 한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린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많은 대화 속에서 어떤 것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다. 타인의 행동에 대한 비난, 사람들의 의도를 해석하는 방법, 어떤 명문화 된 자료를 기반으로 사람의 죄를 판결하는 행위, 누군가에 대한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조언, 다른 이를 설득하기 위해 주장하는 논리 등등.

 

실제로 인간 세상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은 그 자신이 믿는 신념, 종교 그리고 다양한 가치 판단 기준 등이 그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객관적일 수 있다고 믿기에 타인이 가진 그들과 다른 가치들에 대해서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만약 우리가 그 자신이 옳다고 믿거나 진실이라고 믿는 그 모든 것을 바로 모두 그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라고 인정하기만 해도 그래서 그 주관적 판단이 많이 모여서 마치 객관적으로 되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란 점만 인식해도 자신과 다른 입장의 타인들과 그리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다.

 

물론 실제로 사람들이 주관적 입장을 알면서도 객관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을 우리는 정식 용어로 '대의', '명분'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관적 사고를 숨겨 실제로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

 

이 대의 명분은 세상에 있어서 정말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다른 이들의 참여를 불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적어도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 대의 명분에 대한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어떤 의견을 낼 때 그것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포장해야만 다른 이들의 찬성표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으로 인해 우리는 객관적이게 보이는 것이 그 자신의 이득에 더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오랜 시간 늘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극을 해왔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오해하게끔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개개인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아무리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할지라도 우리가 가진 내부의 저울 추는 늘 자신 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체의 타고난 본능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보통 일반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냥 가끔 이야기를 듣다보면 객관적으로 말하는 듯 열심히 저울 추를 잡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조금씩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가끔 웃음이 날 뿐이다. 이것은 상대를 비웃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의 본능적 모습이 언제나 동일하게 발현되는 것에 대한 인간 종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다.

 

하지만 일반적 범주를 벗어나 그 자신에 대해 정말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온다. 인간에 대해 알고자 하고 자기 성찰을 원하며 그 자신에 대한 엄격하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우리의 기울어진 추는 미묘한 착각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일종의 한계지점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우리가 높은 정신 세계를 경험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타고난 굴레이다. 마치 아무리 달려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고 할까?

 

만약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어서 현 시대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추앙 받는 정신 지도자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는 과거의 부처처럼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또한 행동 역시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존재였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고 또한 제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사람과 바퀴벌레가 물에 빠져서 곧 죽게 생긴 상황을 발견했다. 둘 다 구하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모슨 생명의 가치가 동일하다면 사람을 구하든 바퀴벌레를 구하든 같으므로 그는 구할 가능성이 더 높은 바퀴벌레를 구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해도 인간과 바퀴벌레가 물에 빠져 둘 다 죽게 생겼을 때 그 중 하나만을 구해야 한다면 바퀴벌레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둘 다 못 본 척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구한다면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근본적인 인간의 기울어진 추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런 판단 상황에서 인간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면 정말로 엄청난 비난을 퍼부어댈 것이다. 아무리 그 사람의 사상과 생각이 평소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 라고 해서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해서 바퀴벌레를 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의 제자들 역시도 그를 비난하면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우리는 인간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지구 온난화 현상을 불러오는 데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인간이란 종의 멸종일 뿐 생명체 전체의 멸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고향인 지구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멸종 가능성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 인간은 우리들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존재의 비밀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써왔다. 실제로 그로 인해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 종의 특징을 연구했고 우주에 속한 생명체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쌓은 지식은 모두 인간 주관적인 지식이다. 우리의 본질적 한계로 인해서 더 이상의 객관화는 불가능하다.

 

나 역시도 내 스스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늘 한계가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풀리지 않는 영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이것은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며 이성과 감정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안다고 해서 다 실천할 수 없고 옳다고 해서 늘 그렇게 할 수만 없다. 또한 머리로 이성으로 지식으로 경험으로 그것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충돌은 그 모든 가치와 사상에 대한 의견을 불완전한 상태로 만들면서 그것에 대한 의문 어린 시선과 다소 불안한 마음을 없애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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