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준점

아이루다 2014. 6. 13. 08:59

어느 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자신이 장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었다. 깨고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가 아닌가?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지금 꿈에서 깨고 보니 나는 분명 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위의 글은 장자의 호접몽에 대한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무슨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단순한 이야기이고 또 다르게 보면 뭔가 있어 보이는, 즉 장자라는 유명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있어야 할 것 같은 형이상학적 사고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글을 이해하는 당사자마다 다르게 해석될 것이고 또한 그래야 맞는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에 대해서 내 개인적인 해석을 하지 않겠다.

 

나는 요즘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시골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다 보니 느낌상 시골에 가 있는 동안은 서울의 부산함과 시끄러움으로부터 탈출해서 일종의 휴식 시간을 갖는 느낌이 들고, 반대로 그곳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올 때면 많은 사람들의 접촉과 시끄러운 도로를 경험하면서 도심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느낀다.

 

그런데 며칠 전 시골에서 온 다음 날 우연히 서울에서 꽤나 번화가로 알려진 어느 지하철역에 가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골에 가서 쉬고 오는 것인가 아니면 시골에 있다가 잠시 서울에 일을 하러 온 것인가.

 

분명히 기간상으로만 보면 나는 3/4은 서울에서 1/4은 시골에서 보내는 것이 맞으니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 했을 때 서울에 있다가 시골로 쉬러 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만약 내가 시골에서 보내는 시간을 두 배로 늘리게 되면 그땐 어떻게 생각해야 옳을까? 한 달의 반은 서울에서 반은 시골에서 보내게 된다면 말이다.

 

이것을 나는 시골에 살다가 서울에 온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울에 살다가 시골에 쉬러 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것은 일주일과 삼 주일과의 차이와는 또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이 떠오르면서 불현듯 오래 전 읽었던 호접몽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왜 이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머리 속에서 뭔가 연관을 찾아냈으니 그랬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할 때 그 글귀를 옮겨 적어봤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나의 해석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기준이란 것이 언제나 존재한다. 내가 잠시 궁금해 하던 질문에 대해 적용해보면 과연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인가를 정하는 것으로써 명확하게 결정이 난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이 사는 곳이면 서울에서 시골로 쉬러 가는 것이고 반대라면 시골에서 서울로 일하러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와 나비 역시도 인간이 기준이 되면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꾼 것이고, 반대로 나비가 기준이 되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것이 좀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단순하게 의식적인 기준점 변경만을 통해서도 매우 커다란 사고의 전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런 기준점을 무엇을 근거로 정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서울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를 어떻게 정해야 옳을까? 이 경우에 한해서만 보면, 내 머리 속에서는 어떤 쪽이 더 필수적이냐를 따질 것 같다. 먹고 살아야 하기에 아직은 서울이 시골보다는 필수적이다. 즉 서울에 살면서 시골에 가지 않고 살 수는 있지만 반대로 시골에 살다가 서울에 오지 않고는 살기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기준점은 모든 가치나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 우리가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생명가치가 소중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법의 기준에 의해서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법적 허용이 된 살인은 즐겁게 하진 않아도 하긴 한다. 전쟁에서 상대편 병사를 죽이는 것이나 사형 판결을 내리는 판사나 사형 집행을 하는 집행인이나 모두 살인을 한다.

 

그런데 이런 이렇게 중요한 기준점이란 것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 분명한 것은 이것은 절대로 타고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기준점의 거의 대부분은 사회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점 중 하나는 바로 나의 이득과 남의 이득 사이의 경계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 사이의 충돌이 일어날 때 이것을 좀 더 합법적이거나 옳다고 느끼게끔 해줄 있는 근거가 되는 기준점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돌을 던지고 싶다는 욕구는 누군가 그 돌에 맞아서 다칠 수 있다는 문제와 연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누군가 그 돌에 맞았다면 나는 그에 대한 보복이나 혹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돌을 전지는 것과 돌을 맞는 것에서는 돌을 던지는 것이 분명히 옳지 않다고 사회에서는 이미 결정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돌을 던지고 돌에 맞는 것은 물리적으로 명확한 사건이라서 그 판결 기준점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우리 세상에는 정말로 판단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도 많다. 이것을 다른 말로 가치 충돌이라고도 하는데,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닌 서로 다른 기준점으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한 후 자신의 입장이 맞는다고 혹은 상대의 입장이 틀린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최종 결론을 낼 수 있게 해준 그 기준점은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이 가진 생각과 사상 혹은 종교 등의 신념이 그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졌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참 우연스럽기도 하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경상도 지역에서 태어나느냐 아니면 전라도 지역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정치적 성향이 기본적으로 갈리게 된다. 그리고 학창시절 우연히 기독교 계열의 학교에 들어가서 교회를 다니게 되는 사람도 많고 친구가 절에 다녀서 절에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학창 시절 우연히 읽은 책 한편에 완전히 빠져서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열렬한 자본주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점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늘 같은 종류의 정보를 접하게 되면 한없이 우연성은 필연성으로 변해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어리석음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면 당연히 자신이 지금 우연히 알게 된 어떤 것들이 모두 진실이 되고 기준이 되며 그로 인해서 세상은 자신의 기준점을 근거로 명확하게 분리가 되어 진다.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서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체로써의 가치는 별로 없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데 생각하고픈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에게 있어서 가치가 아닌 해가 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의 90%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물론 그들 자신들은 자신이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한계지점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10%의 사람들의 강한 생각들이 90%의 삶을 이끈다. 그렇지만 이 강한 생각을 하는 10%의 사람들은 그 강한 생각에 의해서 절대적인 충돌이 나게 되어 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기준점을 단지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판단 기준점과 행복의 기본 요소가 되는 기준점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말한다.

 

행복해도 내가 행복하고 불행해도 내가 불행한데 기준점은 타인의 머리 속에서 빌려왔다면 우리는 과연 정말로 그것이 행복하고 불행하고 에 대한 진실을 인식할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어떤 일을 해냈다고 해서 정말로 그것이 나 자신에게 행복한 일일까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지인 중에서 아내가 서울대 수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분이 있다. 그런데 결혼 후 그 여자분은 공부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의대를 나온 아내가 집에서 전업 주부를 하고 있다는 글도 본 적 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여자들의 삶에 대해서 안타까움이나 분노를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런 입장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삶이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하다면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끝없는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 부부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으로써 이 사회에 소속되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판단을 내리는 활동의 연속이다. 우리는 눈 뜨고부터 다시 잠이 들 때까지 크고 작은 판단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에는 개개인이 가진 누구로부터 주입을 받았거나 흔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만들어 낸 판단 기준점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생각보다 쉽게 변화 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장자가 나비가 되거나 나비가 장자가 된 것처럼, 시골 집에 살다가 서울에 온 것이나 서울에 살다가 시골 집에 간 것처럼 내 머리 속에서 기준점을 바꿈으로써 변화 가능하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고 흐름이다. 장자가 꿈을 꾸고 난 후 개꿈으로 여기거나 내 머리 속에서는 늘 시골로 쉬러 간다고 느끼고만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변화 불가능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세상을 이리 어리석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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