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힘

아이루다 2014. 6. 21. 08:25

 

어린 시절에 해와 구름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를 두고 내기를 하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정말로 웃기는 얘기이긴 한데 아무튼 이 이야기에서 햇빛 정책이란 말도 탄생했으니 우리 사회에서 이 이야기는 꽤나 많이 알려진 우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나그네를 날려버릴 듯 한 강한 바람이 아니라 더워서 벗게 만드는 따뜻함이었다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힌트를 준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변화 시키고 싶다면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하며 또한 방향을 틀어주면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봐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후자의 입장으로 누군가를 대하려면 말 그래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참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첫 번째 방법을 쓴다. 즉 훈계하고 가르치고 잘못을 지적하며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나 사상이나 종교와 같은 것들은 정말로 변하기 힘들고 이것보다는 약하지만 오래된 가치관 등도 쉽게 변할 수 없다.

 

이 변하지 않는 현상이 우리 사회를 고정시키고 있는 것은 맞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여 무엇인가 다른 것을 느낀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다수를 위해 그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그 다수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 생각해서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강한 바람이다. 이런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나그네가 외투를 더 여미듯 사람들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에게 강한 반발을 느끼며 도대체 네가 뭔데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 라고 되묻고 싶어 진다. 그리고 점점 더 마음을 닫아 버린다.

 

이것이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집에 도둑이 들어서 돈을 훔쳐 가서 마음이 상해 있는데 소위 좀 배웠다는 조카가 와서 왜 문단속을 이따위로 해서 도둑이 들게 했냐고 비난한다. 그리고 자기가 소개해 주는 전자 열쇠를 사다가 바꾸라고 말한다. 이 때 집 주인은 돈을 훔쳐간 도둑놈도 밉지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길 바라며 해결책까지 내 놓는 조카도 이상하게 밉다.

 

여기에서 만약 조카가 삼촌의 불행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혹시 몸 상한데 없는지 걱정하면서 작은 돈이라도 꼭 쥐어주고 열쇠를 바꾸라고 했다면 삼촌은 과연 이것에 대해서 조카에 대한 미움이 생겼을까? 삼촌이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조카가 고마워야 하지 밉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부터 이해와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는 꽤나 있어왔다. 작은 친절, 낯선 이에 대한 배려, 행운처럼 다가오는 베풂,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 등등 이런 것들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좀 더 살아 볼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위험을 무릅쓴 생명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나 처음 본 사람을 위해 베푸는 작은 친절 등의 이야기가 기사화 되기도 하여 많은 이들에게 작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서로의 잘못을 칼로 찌르듯 지적하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듯 으르렁대며 서로에게 발톱을 세우고 있고 내가 옳으니 너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지적과 훈계를 늘어 놓고 있다.

 

이것은 비난 나 자신이 남 얘기 하듯 할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이 블로그의 많은 글들이 모두 이런 지적 질 투성이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도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지적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에 좀 더 능숙하다. 아니 실제로 불특정 다수의 대상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다.

 

그 자신이 낳은 아이도 미운 짓을 하면 아이가 미운데 어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또한 그냥 보기에도 전혀 공감도 안가고 한심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을 그저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가 궁금하기도 하다.

 

실제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과거에 몇몇 종교 창시자들의 모습이 이렇긴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로도 아주 드물게 이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이었다고 전해지긴 한다. 하지만 이들 숫자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부족해 보인다.

 

오늘 이야기를 쓴 배경에는 얼마 전 우연히 본 흑인과 백인간의 갈등을 바라보며 조언을 하던 어떤 흑인 여자의 태도가 있다. 그녀는 백인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다른 흑인 여자를 보면서 손을 잡아 주라고 조언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런 그녀를 보고 화가 났냐는 질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내가 그녀로부터 받은 가장 큰 감동이었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이나 인식의 오류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고 합당하게 설명하며 제대로 된 이성적 논리를 전개하여 그 사람을 설득 할 수 있다. 이것이 완벽하게 이치에 맞고 전혀 빈틈이 없는 완벽한 대처라고 해도 결국 그것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감성이 없으면 이 태도는 순간 교과서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많은 옳고 제대로 된 것에 대한 기준을 배운다. 이것은 머리로 배우고 현실에서 실천이 된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배운 지식을 통해 행해지는 그 모든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남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니 남을 돕는 것과 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도와주고 싶어서 돕는 것은 절대 같은 도움이 아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추가적인 지식이나 타인의 논리 정연한 충고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움직여야 바뀐다. 그리고 이 마음은 바로 감정이다. 그 어떤 절대적 진리도 감정이라는 거대한 벽을 만나고 나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한계이자 또한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스타트렉이라는 오래된 미국 드라마에서는 감정이 없이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는 존재가 하나 나온다. 그는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이것은 끝없는 인간과의 갈등을 야기 시킨다. 물론 이성이 시키는 데로 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이성적 태도와 행동의 배경엔 반드시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성을 통해 바라볼 수 있지만 이 이성은 단지 세상이 보여주는 결과만을 받아 드릴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사랑하는 아이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면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와 아이가 부딪히면 사람의 몸이 크게 상하여 죽을 수 있다는 이성적 판단과 자동차라는 도구는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란 지식이 부모의 아픔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설령 차의 운전자가 모든 법규를 준수했고 아이가 급작스럽게 무단 횡단을 하다가 죽었다고 쳐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 차의 운전자가 원망스럽게 된다. 이것은 절대로 이성적으로 판단되기가 힘든 일 중 하나이다.

 

그 슬픔이 클수록 부모는 더욱 이성을 벗어나게 되며 완전히 감정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이 가진 한계이며 우리가 이성적인 면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세상에는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정의로움과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을 고치고 미래의 전체 행복을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좋은 분들이 있다. 그 의도가 어떠하든 또한 그들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든 간에 그런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이라도 덜 썩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설득한다. 실제로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정말로 틀린 말 하나도 없고 소중한 조언들이다. 하지만 정작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그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사람에게 이 말들은 모두 차갑고 센 바람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오랫동안 믿어온 믿음을 지키려고 더욱 외투를 여민다.

 

이런 상황이 되면 좋은 말로 설득을 하던 사람들 역시도 그런 한심한 그들의 모습에서 절망을 느끼게 되고 이젠 좋은 말이 아닌 비난이 섞인 말로 그들에게 훈계를 한다. 그리고 이 모습은 다시 그들을 더욱 자극시켜서 외투를 벗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외투를 하나 더 입게 만든다.

 

물론 그런 그들의 태도가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오늘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론과 설득과 논리가 아닌 이해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나 자신은 평생 이것을 해내지 못하겠지만 정말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해가 된다면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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