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인과응보, 사필귀정

아이루다 2014. 6. 14. 08:43

 

사람은 나쁜 짓을 한다. 그런데 이 나쁜 짓은 크게 두 가지 중류가 있다. 하나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나 혹은 감정적 폭발로 인해 벌어지는 우발적인 나쁜 짓, 다른 하나는 이성적으로 잘 계산된 나쁜 짓.

 

전자의 경우는 남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벌어져서 결국 다른 이에게 폭행을 가해 법적 처벌을 받거나 혹은 금전적 손해를 얻는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엔 그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교묘하게 속이거나 딱 들어나는 나쁜 짓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의도된 나쁜 짓이다.

 

사람이 오래 살다가 보면 흔히들 나쁜 짓을 하면 죄를 받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한 응보를 받게 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보통 전자에 해당될 뿐이다. 즉 감정의 폭발로 인해 발생한 나쁜 짓은 폭행과 같은 전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그것에 대한 사회적 고립이나 심하면 감방살이까지 명확하게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잘 계산된 나쁜 짓은 보통 그 자신의 이득으로 환산되고 끝이 난다. 물론 개중에서 아주 운이 없이 걸려서 결국 손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100 중 1도 안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런 예는 요즘 일어난 세월호 사건의 주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회장 일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일반인 관점에서 보면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엄청난 나쁜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누가 그 사람을 알 것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그가 현상금이 붙은 도망자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이 사회에서 유병언은 특별한 존재일까? 나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우리나라의 기득권 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이다. 단지 그는 운이 없어서 걸렸을 뿐 다른 비슷한 사람들은 오늘도 잘 살아가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 잘 죽어 갈 것이다.

 

그런데 정말 생각을 제대로 해보자. 우리가 손가락질 하고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정말로 나쁜 존재라고 인식하거나 인정하고 있을까? 우리는 분명히 어떤 파렴치한 짓을 한 존재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도덕적 지식과 사회적 관습에 근거해서 그 존재를 맹 비난하지만 실제로 그 존재들은 자신을 우리가 비난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나쁘다고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답은 단순하다. 이성적으로 잘 계산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그것을 능력이라고 말하고 기회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남들이 요구하는 양심적 가책도 없으며 원하던 이득도 많이 얻어 남들에 비해 훨씬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자녀 역시도 그런 환경에서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선악에 대한 가치관을 기준으로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 따위의 말을 믿으면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곤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나쁜 짓이란 것 자체가 그 자신들 마다 다른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도대체 신이 있다고 해도 과연 어떤 기준으로 나쁜 짓을 규정해야 할지 그것도 의문이다.

 

내 기준으로 나쁜 짓이라고 규정하면 누군가 처벌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나하고 내 친구, 혹은 인터넷에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고 동네 노인정에서 모인 사람들이 다들 욕하면 되는 것일까? 도대체 나쁜 짓이란 것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치기 위해 도둑질하러 집에 들어갔다가 자살하려는 사람을 발견하고 구출했다면 이 사람은 나쁜 짓을 한 것인지 좋은 짓을 한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반대로 사람을 구하려고 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면 그 사람은 과정은 좋은 짓일지 모르지만 결론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판단적 애매함으로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많은 이들은 이 죄받음을 믿고 세상이 그럼으로써 공평하고 정의로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 마리의 새의 새끼 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소란을 떠는 녀석이 먹이를 잘 먹고 잘 자란다. 즉 경쟁에서 이기는 존재가 결국 잘 자라는 것이다. 우리 역시도 결국 어느 정도까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한계지점은 개인마다 거의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부른 사자는 개와 비슷할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 반대로 배가 고픈 개는 사자보다도 위험할 수 있다. 우리 생명체는 결국 자신의 배가 불러야 착해질 수 있으며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더해서 단지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인해서 착해지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바로 우리의 두뇌능력으로 인해 만들어 진다.

 

그 덕분에 우리는 평생 동안 매일 가장 비싼 먹을 것을 먹고 가장 좋은 잠자리에 잘 수 있는 능력이 되어도 그것에 만족 못하며 더 큰 부를 원하곤 한다. 즉 우리는 한계를 모르는 욕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 거대한 부로 인해서 모든 법망을 다 빠져나갈 수 있다.

 

정말로 치명적인 실수를 해서 법망에 걸리더라도 다양한 핑계를 통해 아주 간단한 처벌을 받은 채 그것을 넘기곤 하는데 우리나라 법정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기도 하다.

 

인간을 성선설과 성악설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은 일단 틀렸다. 우리는 욕망이 만족된 상태는 착하고 반대로 욕망이 들끓는 상태는 악해진다. 이것은 단지 현 상태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천사 같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여기에서도 '나의 목숨을 가져가시오' 라고 말한다면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이렇듯 우리는 끊임없이 착함과 나쁨을 오가는 존재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보통 나쁘기 보다는 착하길 원하기에 - 착해야 더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다 - 가능하면 착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신을 최대한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놓으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고, 결국 이 행복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좀 더 착해질 수 있게 된다.

 

행복은 욕망이 실현된 상태이다. 그런데 또한 행복은 또 다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 주는 좋은 점이다. 밥을 많이 먹은 개가 온순해지고 그럼으로써 인간에게 더욱 사랑을 받게 되어 또 다른 먹을 것을 얻어내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런 연관된 상태 변화로 인해서 우리는 개를 원래 착한 존재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즉 늘 잘 먹이는 개는 계속 착하게 굴기에 결국 죽는 순간까지 착해서 그 개에 대한 기억은 착한 것이라고 결정 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이 개가 십 수일을 굶게 되었다면 인간에게 이빨을 들어내지 않을까? 물론 안 그런 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는 이미 자연에서 도태되어야 했을 개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도 이 개와 완전히 동일하다. 부자 동네 사람들은 그 안은 어떨지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은 너그럽고 일명 교양이 있다. 왜냐하면 일단 풍족하기 때문에 착해진 것이다. 반면에 못사는 동네 사람들은 사납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싸움도 잘 나고 인생이 팍팍하다. 이 차이는 인간의 차이가 아닌 단순한 돈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돈은 바로 우리의 욕망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기득권과 서민을 나누어 마치 서민은 선한 존재이고 기득권은 악한 존재처럼 취급하지만 실제로 서민은 단지 기득권이 될 능력이 못 되는 사람들일 뿐이다. 개인이 가진 육체적, 지능적 능력이 뒤떨어지거나 혹은 타고난 환경이 좋지 않아서 돈을 못 벌어서 서민이 된 것 뿐이지 그들이 기득권에 들어간 사람들보다 타고 난 본성이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란 뜻이다.

 

우리가 보기에 개가 착해 보이는 것은 개의 욕망이 적기 때문이다. 개의 욕망이 적은 이유는 바로 개의 머리가 멍청해서 그렇다. 개는 당장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해 하며 내일 먹을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린 시절에도 이와 유사하다. 아이가 귀여운 이유는 바로 아이의 욕망이 성인의 기준으로 보아 아주 적기 때문이지 아이가 다른 인간과는 다르게 착하기만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원리는 기득권과 서민층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기득권에 속한 사람들은 서민층에 속한 사람에 비해서 이런 미래 행복에 대한 예측을 훨씬 많이 하고 따라서 욕망이 거대해졌으며 그것을 실현해 낸 영리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경제적인 면에서만 보면 서민들은 그들 기득권에 비해서 욕망이 커질 능력도 없으며 혹시나 커져도 그것을 채울 능력이 안 된다. 실제로 기득권이 돈을 버는 가장 영리한 방법은 서민들의 욕망을 부추겨서 실현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권하는 욕망은 바로 영리한 기득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고 있다.

 

이 전체적인 것을 보면 결국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믿고 있는 권선징악, 인과응보, 사필귀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이야기 속에서 수 많은 권선징악을 경험하며 그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런 믿음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수 많은 나쁜 짓을 하여 부를 축척한 기득권 층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 듯 누군가를 때린 나쁜 짓은 바로 경찰의 처벌을 받지만 영리한 그들이 한 나쁜 짓은 아주 치밀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만 밝혀낼 수 있기에 많은 이들이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이나 하늘이 그들의 나쁜 짓을 알아서 벌해준다면 딱히 그것을 감시하고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즉 공동체의 무관심은 바로 기득권이 더 나쁜 짓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난 후 어쩌다 밝혀진 그들의 실체를 뉴스에서 접하고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저주를 하지만 도대체 그 천벌은 누가 내릴 것인가? 구름이 내릴 것인가 아니면 달이나 태양 혹은 먼 곳에 있는 목성이 내려 줄 것인가?

 

사람들은 보통 그 자신이 바라는 것도 별로 없고 욕심도 별로 없다면서 스스로를 착한 존재로 규정한다. 하지만 욕망의 크기가 작다고 해서 착해지는 것은 아니다. 욕망의 크기가 작다는 것은 욕망을 채우기가 쉽다는 것이기에 결국 착해진 상태가 되기 쉽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인해 돈이 많아져도 욕망 자체가 작아서 욕망을 채우고 남은 돈을 남을 위해 기부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착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부 행위 역시도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욕망 실현이라는 점은 보통 사람들은 간과하고 만다.

 

우리는 욕망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데 익숙해서 마치 우리가 욕망을 갖는 것이 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는데 익숙하지만 생명체가 욕망을 갖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며 큰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은 머리가 좀 더 좋거나 혹은 머리가 나쁜데도 불구하고 TV나 드라마 많이 보다가 주입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절대로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선악의 개념을 통해 세상을 보면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는, 식물까지 포함해서 모두 악한 존재로 규정된다. 고추도 상추도 살기 위해서 가지를 뻗는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자리에서 나는 다른 식물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그래서 이런 선악을 기반으로 한 권선징악은 처음부터 관념적인 사고일 뿐이고 실제로도 전혀 동작하지 않는 소설에서나 나오는 원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딱히 해결할 의지도 방법도 없어서 결국 누군가 해주겠지 라고 믿고 마음 편하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하루 동안 하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바로 우리가 그리 징벌을 원하는 기득권에게 추가적인 이득을 주게 된다. TV를 보든, 스마트 폰을 보든, 인터넷 기사를 보든,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주고 받든 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자유의지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늘 누군가가 의도한 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욕망의 부추김을 받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번 돈을 다 쓰면서 나는 행복하다 라고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하루는 흘러가고 또 미래가 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천벌은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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