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의리에 대한 이야기

아이루다 2014. 6. 1. 09:35

 

요즘 갑자기 김보성이란 배우가 인터넷 상에서 인기 급상승 중이다.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모습으로 여느 토크쇼에 나올 때 마다 '의리'를 외쳐대던 그가 이번 세월호 사건 때 빚을 내어 천 만원을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시점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늘 말하던 '의리'에 대한 진정성이 통했는지 아무튼 그를 광고모델로 세운 어느 회사의 매출액이 급 상승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의리' 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느낌은 조금은 과거적이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 의리를 말하는 관계는 일명 조폭들의 세계나 남아 있을 법한, 그래서 어쩐지 촌스러움이 느껴지는 몇십 년 전에나 사람들에게 기억되던 단어인 듯 싶기도 하다.

 

또한 한국에서 조폭에 대한 미화 영화가 많이 나오면서 의리는 더욱 더 그리 좋지 않는 의미로 많이 해석되는 방향으로 더 움직인 것 같다. 그러니 사회 전체가 '의리' 라고 하면 뭔가 좀 웃기고 비현실적인 것들을 연상하는 것에 좀 더 익숙해졌나 보다. 실제로 배우 김보성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의리가 우리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대접 받아도 될만한 개념일까? 그것은 의리라는 말을 우리가 이리 가볍게 즐기는 개념으로 만들어서 희화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나의 질문이다.

 

그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 일단 가장 먼저 이 애매한 의리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당연히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정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리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것이다.

 

의리의 실제 사전적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무척 무겁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의리는 조폭들의 세계에 의해서 혹은 어느 배우가 주구장창 주장한 행동에 의해서 많이 희석되고 오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사전적 의미가 아닌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정의된 의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리란 약간의 가벼운 관계에 대한 진지함 정도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뢰와 비슷하면서도 딱히 그것을 주장하기 힘든, 그 덕분에 좀 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개념 정도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가벼움으로 인해 우리에게 의리는 점점 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아닌 어느 정도 상황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아니면 안 지킬 수도 있는 가치화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원래 의리의 의미로 돌아가서, 이것을 연결해서 해석하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지만 상황에 따라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비슷한 개념인 신뢰나 믿음과 같은 단어는 아직도 그 의미를 명백하게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신뢰나 믿음과 같은 무거운 개념의 단어를 적용하고 싶지 않은 영역에서 의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종의 빠져나갈 틈새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 관점에서도 의리를 신뢰나 기타 다른 우리의 진지한 관계성에 대한 단어들보다 가볍게 놓고 있다. 따라서 의리는 보통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아닌 정도로 사람간의 예의 정도 개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의리가 예의로 해석되는 순간 의리는 그 원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가 바로 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 언제든 지키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바로 의리를 우스꽝스러운 개념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의리는 촌스럽고 과거적이며 웃기는 대상화로 변질되어졌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의리에 대한 이야기가 될까?

 

간단한 예를 보면 친구와 둘이 같이 있을 때, 그 친구가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전화기를 붙잡고 다른 이와 통화를 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보통은 이렇게 정신 없는 친구는 드물지만 아무튼 한 시간이 아닌 10분이나 5분이라면 요즘 같은 시대엔 흔하다. 그리고 꼭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도 채팅이나 인터넷 서핑 정도의 행동일수도 있다.

 

이 때 전화를 하고 있지 않은 친구는 갑자기 혼자 있는 상황에 놓여 버린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범용적인 상식 수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하는데 이것이 보통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에 어떤 환경에서 컸느냐 나 혹은 어떤 상황 속에서 세상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판단과 결론이 모두 달라지는 경향이 있어서 이 상황을 한가지로 명확하게 정의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뭐라고 말하기 애매한 이 상황에 어떤 사람은 계속 전화 중인 친구에게 '그래 넌 계속 전화나 해라' 라고 말하면서 화를 내고 자리를 뜰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신도 지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같이 스마트 폰 삼매경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 조용히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것은 전혀 변화가 없을까? 물론 이미 그전에 이런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이 둘의 관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반드시'에서 '선택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신뢰에서 의리로 변해가는 과정이 된다.

 

친구와의 만남에 있어서 서로의 집중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과한 요구가 될 수 있다. 나와 만났으니 나에게만 집중하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웃기고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사람과 만날 때 이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대 놓고 표현하지 않을 뿐 같이 있으면 같이 있는 사람에게 집중해주길 원한다.

 

연인이라면 더욱 이것이 강해져서 대 놓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약한 연결고리를 가진 친구들과의 그것은 그렇게 까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기본적 예의에는 분명히 같이 있는 사람에게 최우선적으로 집중해주길 바란다.

 

이것이 인간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 도리인데 어떤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이것이 깨짐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마치 전염병처럼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어딘가에서 만나 서로 스마트 폰을 바라보고 있을 때 두 사람 모두 동시에 그것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 먼저 시작하면 나머지 역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비단 스마트 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지는 한참 되었다. 가정에서는 TV가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신뢰를 의리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요즘 가정은 대부분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모두 TV를 향한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쪽이 TV만 보면 나머지 한 사람도 TV를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한 사람이 게임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역시 다른 자신의 재미를 찾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집안에 있는 시간을 100% 상대와만 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일종의 과도한 집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와의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하게 될 땐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 가정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요즘 같은 시대엔 멀리 여행을 떠나고 스마트 폰의 강력한 기능으로 인해 모두 집에서처럼 자신의 평소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게임도 하고 채팅도 하고 인터넷 기사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우리가 즐기는 여행을 좀 더 낫게 해줄까?

 

한 때 우리는 그나마 여행을 떠나면 그 여행을 하는 도중엔 서로에게 매우 강한 집중, 신뢰, 의리 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어쩌면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이 나라 땅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우리는 이동 통신의 통신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젠 여행 중에서도 서로에 대한 집중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엔 여행의 다른 요소들, 즉 즐거움과 맛있는 식사 등의 요소만을 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요즘 외식을 하러 식당에 가보면 흔히 가족 단위로 나와 있는 사람들을 꽤나 보게 되는데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들은 자식들 대로 자신의 스마트 폰만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하는 풍경을 꽤나 자주 보게 된다.

 

식사란 것이 맛있는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모습은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식사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면 이 모습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어디 캠핑을 떠나고 여행을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결국 조금이라도 심심해지면 바로 스마트 폰의 세계로 빠져들어갈 것인데.

 

의리는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지만 그 정의 때문에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의리는 신뢰, 믿음, 충성심 과 같은 비슷하지만 그 의미가 잘 유지되는 것과는 달리 계속 변해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 우리가 관계에서 끊임없이 작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신뢰의 문제가 아닌 의리의 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뢰는 상처를 받게 되면 매우 크고 치명적이지만 의리는 상대적으로 작고 그냥 사람에 따라 넘길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결국 의리에 대한 가치가 사라져갈수록 우린 관계의 진지함에 대해서 점점 잃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순간순간 좀 더 행복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결국 우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예의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언젠간 나와 약속을 한 친구가 10분 후 다른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떠도 아무렇지 않게 '그래' 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다른 약속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모두에게 다 익숙해진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의리는 우리를 행복하지 못한 쪽으로 끌기도 한다. 지금 누군가 내 앞에 있는데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내가 아는 사람이 너무도 재미있게 놀고 있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에서 가는 것은 의리를 져버리지만 행복을 얻을 수 있고 반대로 그냥 있으면 의리는 지키지만 행복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순간은 사람마다 정말 많이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점점 사람들은 의리를 지키기 보다는 행복을 찾아가는 쪽으로 변화되고 있다. 그래서 의리는 과거적인 개념으로 점점 더 퇴색된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인해 현대인의 외로움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본다. 결국 의리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고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상처를 입혀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의리가 지금처럼 다뤄져서는 안될 것이란 것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의리에 대한 강요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의리를 더욱 외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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